王 積薪(왕적신), 唐나라의 詩人, 전문棋士, 國手, 棋待詔(기대소) 棋待詔는 전문기사의 직급이다. 王積薪은 唐나라 초기에 가장 유명한 棋待詔였다. 王積薪은 양귀비(楊貴妃/楊玉環)의 남편인 唐나라 황제 玄宗과 자주 대국을 했다. 外出할 때는 돌과 布製의 바둑판을 항상 들고다녔고, 바둑을 둔다고 들으면 누구와도 烏鷺를 즐겼다고 한다. 「圍碁十訣」 →解說보기 1. 貪不得勝 : 慾心을 부려서는 이기지 못한다 2. 入界宜緩 : 敵의 勢力圈에 들어갈 때는 깊이 들어가지 마라 3. 攻彼顧我 : 敵을 攻擊하려면 먼저 나를 돌아보라 4. 棄子爭先 : 돌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先手를 잡아라 5. 捨小就大 : 小를 버리고 大로 나아가라 6. 逢危須棄 : 危險을 만나면 모름지기 버려라 7. 愼勿迅速 : 부디 輕率하거나 빨리 두는 따위를 하지 마라 8. 動須相應 : 상대가 움직이면 같이 움직이고 멈추면 같이 멈춰라 9. 彼强自保 : 상대가 强하면 내말이 갈라지지 않게 保强하라 0. 勢孤取和 : 勢가 외로우면 和平을 取하라 玄宗은 당나라의 제6대 황제(재위 712∼756). 본명 이융기(李隆基, 685~762). 예종(睿宗)의 제3자. 명황(明皇)이라고도 한다. 현종는 안으로는 민생안정을 꾀하고 밖으로는 국경지대 방비를 튼튼히 하여, 개원(開元)·천보(天寶) 시대 수십 년의 태평천하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노년에 접어들자 도교(道敎)에 빠져 막대한 국비를 소비하였으며, 35세나 연하인 양귀비(楊貴妃/楊玉環)를 궁내로 끌어들인 뒤 정사를 포기하다시피 하여 패가망신했다. 755년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 쓰촨[四川]으로 피난가던 도중 양귀비는 병사에게 살해되고, 이듬해 아들 숙종(肅宗)에게 양위하고 상황(上皇)으로 은거하였으며, 장안으로 돌아온 뒤 죽었다. 그는 다재다능하여 음악은 작곡까지 했고 서도는 명필이라는 칭호를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