外山算節, 1770年(明和七)-1828年(文政十二)
詳細한 生死年月은 不明. 幼名은 喜太郞, 本因坊元丈 門下로 元丈에게 先相先, 六段까지 되었다. 丈和의 兄弟子가 된다. 京都를 本據地로 하고, 晩年은 京都丸山의 正阿彌라는 料亭을 讓渡받아 隱居하고, 隱居 후에는 無阿彌라 칭했다.
1822年(文政五)三月, 京都寂光寺에서 算砂의 二百回忌 法要에서 本因坊丈和와 둔 [永遠의 無勝負]로 불리는 一局은 古來有名의 대국이다. 因淑을 立會人으로 한 丈和와 算節의 對局은 記念碁인데도 불구하고 四日後에 다시 속개되었다. 百十九手를 두었을 때
算節이 眩暈卒倒하여 人事不省이 되다... 다시 일어나 對局에 임하나 氣合이 平日과 같지 않더라... 이때 因淑이 나서 이 바둑을 끝까지 繼續하다간 어느 한쪽이 죽음을 면치 못할 걸로 보고 算節에게 無勝負로 끝낼 것을 제안한다... 그렇긴하나, 오늘 이 局面을 보면 模樣이 나쁘진 않으나 算節이 질 것을 겁내 도망했다고 할까 두렵다... 지금의 形勢를 敗色이라 본다면 當然 죽음을 決하고 계속 둘 것이다... 이 말을 丈和에게 알리니, 丈和 또한 異議없이 承諾하더라... 라고 座隱談叢에 전한다.
어떻게 算節을 여기까지 몰아붙였는지는 不明이나, 이 激한 氣合이 本局을 無勝負로 중단하고 있는데도 名局으로 傳해지고 있는 것이다. 本因坊丈和는 山本源吉, 九世因碩因砂, 十世林元美, 算節은 技는 伯仲이라 해도 氣合에 있어서는 算節이 한수 위라고 評했다. 算節의 著書로 [置碁必勝]과 [置碁必勝後編]이 있다.
編集은 弟子 川北耕之助가 했다.
川北은 京都의 棋士로 最終棋格은 五段, 五세에 바둑을 배웠다. 先祖가 武田信玄의 軍師인 名門의 출신이었다. 父親으로 부터 "武士로 태어나서 爭碁나 두면 어쩌겠단 말이냐? 그러나, 碁芸가 있어 奧義를 極하면 그것으로 좋고, 段이 될 마음이 있으면 말리지는 않겠다" 라는 訓戒를 들었다. 算節에게 師事하여 三年間에 千九百局을 두었다고 한다. 川北은 [爭碁小學]의 著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