關山仙太夫, 1784年(天明四)-1859年(安政六)
信州松代藩士, 眞田家에서 藩主의 秘書로 일하다. 이름은 知行百石. 幼名은 虎之助.
隱居후에는 竹林亭이라 칭했다. 長坂猪之助, 片山知的과 함께 武家三强의 一人이고,
四宮米藏, 菊池康郞과는 아마三强의 一人으로 指目된다.
1797年(寬政九)出府, 坊門의 水谷琢元에게 師事하다가 水谷琴花의 紹介로 本因坊烈元에 入門하다. 十六세에 初段을 받았으나, 同僚로 부터 "虎之助, 碁才가 있어도 武道에 소홀하면 그건 武士의 本旨가 아니야" 하는 武芸의 未熟을 비난 받은 일이 있어 일시 바둑을 떠나다. 그 후 文武百般免許皆傳 後에 다시 바둑으로 되돌아 왔다고 한다.
本因坊丈和 時代에 棋格五段을 염원하여 歸鄕할 때는 初段이 아닌 五段을 바랐으나
丈和는 五段의 高段을 일반인에게 줄 수는 없고 三段은 줄 수 있다고 했다.
이를 曲解한 仙太夫는 三段을 마다하고 終生 初段으로 지냈다고 한다.
仙太夫는 七段格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史上 最强의 初段이었든 셈이다.
1831年(天保二) 歸國하여 中央과의 接觸이 途絶되었으나,
六十八세 때 本因坊秀策을 松代에 招請하여 二十日間 定先으로 二十番碁를 두었다.
七勝十三敗, 이 중에는 妙碁의 대국이 二局이 있다는 秀策의 評이 있다. 七十三세 때에는 當時十九세, 五段의 村瀨彌吉를 招請하여 十番碁를 두었다. 一勝八敗一無.
仙太夫는 爭碁方位初心階, 爭碁初心調練階, 聖賢純華妙碁集, 竹林修業用魂集,,, 등
著作도 많고 멋진 注釋도 붙여서 남겼다.
座隱談叢에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있다.
仙太夫는 煙草를 피울 때 항상 큰 煙管을 사용했다. 바둑이 자신의 勝利라고 생각되면 그 煙管을 꺼내 ‹M기부터 한다. 此僻百局一律. 언제나 그러했다. 그래서 상대는 仙太夫가 煙管을 꺼내는 것을 보면 加一層 注意를 해야만 했다... 라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