巖崎健造, 1842年(天保十三)-1913年(大正二)
武州多摩에서 태어나다, 本姓은 海老澤, 幼名은 鍋吉, 後에는 新座郡新倉村東福寺의 住職實願和尙에 의탁하고 이름을 忍治로 고쳤다. 太田雄三에 師事하여, 安井門下의 富豪 吉澤文藏의 後援을 받아 正式으로 算知門下에 들어간다. 여기서 健造라 이름하다.
1857年(安政四)에 初段, 十八세에 三段으로 나아가다. 이 해에 本因坊秀策에게 十三局을 두었다. 健造는 稽古碁로 모은 五兩을 謝禮金으로 내었으나 秀策이 豊足하지도 않은 少年의 向上心을 奇特하게 여기다. 이 대국에서 健造가 七勝三敗를 하여 先二로 치수를 고쳤다.
1862年(文久二)에는 村瀨彌吉에게 이겨 五段에 오른다.
明治維新으로 碁界가 混亂에 빠진다. 大久保甲東에 들어가 東京府 消防指圖役, 神奈川縣 始審裁判所 書記 등의 官職을 담당한다. 이 기간에도 方円社를 통해 秀甫등과 대국을 계속하고 있었다.
小林鐵次郞이 病氣療養을 위해 方円社 經營에서 손을 뗀다.
1892年(明治二十五), 方円社社長 中川龜三郞의 招請으로 官職을 그만두고 方円社 副社長을 맡다. 이 무렵부터 秀榮의 全盛時代가 열린다. 方円社의 젊은 기사들도 秀榮의 門下로 들어가고 있었다. 健造 五十五세 때, 秀榮門下의 第一人者로 指目되고 있던 二十二세 年少의 田村保壽(後의 秀哉名人)에 한판을 붙다.
1899年(明治三十二)一月二十日, 中川이 引退하자 第三代 方円社 社長이 되었다.
本據를 神田 末廣町 中川의 自宅에서 下谷區 御徒町의 會館으로 移轉한다.
明治三十八年, 雁金準一이 坊門으로 빠져 나가므로써 方円社는 大打擊을 받는다.
그러나, 얼마후 方円社는 다시 隆盛한다.
秀榮이 죽자 秀哉가 실질적으로 碁界를 制壓한다.
1912年(大正元) 健造는 後事를 二代 中川龜三郞(石井千治)에게 委託하고 引退한다. 1913年(大正二) 十月二日, 健造가 舌癌으로 죽는다. 향년七十一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