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井仙角(春哲), 1711年(正德元)-1789年(寬政元)
會津에서 태어나다. 實父는 田中次郞兵衛. 혹은 小路權太夫의 子로서 近江 태생이라고도 한다. 처음에는 田中春哲이라 부르다가 후계자 知仙이 죽고난 후 四世仙角의 딸과 結婚하여 再후계자로 되다.
1735年(享保二十), 二十五세에 御城碁에 出仕하여 七世本因坊 秀伯에 先番으로 二目勝하다.
御城碁는 三十二局을 두다.
1737年(元文二)正月에 古仙角의 死去로 二十七세에 家督을 相續하여 安井家 五世仙角으로 되다. 家督을 相續한 그 해에는 將棋 七世名人 伊藤宗看의 碁方과 將棋方의 序列을 정하는 訴訟事件을 經驗한다. 그 翌年 五世林門入(因長門入)의 名人碁所 就位時에는 本因坊秀伯(當時二十三세)과 함께 五世門入(同四十九세)과 井上春硯因碩(同三十二세) 등에 對抗했다.
또 1739年(元文四), 本因坊秀伯의 七段昇進에 대한 爭碁出願 時에는 秀伯의 添願人을 하였고, 秀伯이 죽은 後의 門入-因碩의 碁所任命의 出願에 대해서도 八世本因坊 伯元과 함께 異議申立書을 提出하였다. 이로써 本因坊家와 安井家와의 關係는 親密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한 一連의 訴訟을 取扱한 當時의 寺社奉行는 大岡越前守忠相였다.
本因坊秀伯의 뒤를 이어 名人碁所가 된 二十二세 年少 本因坊 察元에 協力을 아끼지 않았던 것도 仙角의 冷徹한 洞察力과 遠慮深謀의 政治的能力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察元이 準名人(八段)으로 昇進한지 겨우 一年만에 碁所出願에 오를 때에는 그의 急擧는 世間의 反發을 살 우려가 있음을 내세워 反對를 表明했다.
1772年(安永元)에는 門下의 坂口仙德을 分家格으로 御城碁에 出仕시킬 수 있었는데,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二年前에 名人碁所에 就位해 있던 察元의 好意에 의한 것이었다. 大仙知, 知得, 算知, 外家의 坂口家 등, 安井家의 隆盛은 실로 仙角 代에서 전성기를 맞았다. 坂口仙德의 實子 七世仙知(大仙知)를 安井七世로 삼아 安井家의 安泰를 확인한 後, 1789年(寬政元)十二月十六日, 七十九세에 숨지다. 大仙知가 殷居後에 仙角으로 稱한 것은 五世仙角의 恩惠에 報答하기 위한 것이라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