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井算哲 (一世算哲, 古算哲), 1590年(天正十八)-1652年(承應元)
쿄토(京都) 또는 오사카(大阪)에서 태어났다고 하나 확실치 않다. 어릴적 이름은 六藏, 부친는 安井忠右衛門 宗順. 1600年(慶長五), 11세 때에 神原康政의 추천으로 家康 伏見城에서 부름을 받아 扶持를 받았다.
1608年(慶長十三) 19세에 삭발하고 算哲로 이름하여, 本因坊算砂, 利玄, 中村道硯, 林門入因碩 등과 함께 바둑인의 일원으로 되다. 8살 연장의 道硯과 호적수로 많은 대국을 가졌다.
1640年(寬永十七)경에 막부(幕府)로부터 算砂, 道硯을 계승하는 바둑인의 회장(후에 碁所)인 전의(詮議)가 되었다. 후에는 기소전의로 불리우다. 덕강막부(德川幕府)도 3대 家光의 대가 이어지고 행정기구도 굳혀지게 되므로써 모든 제도가 정비되기 시작했다. 이참에 바둑인들도 조직화할 필요가 있었던 듯하다. 本因坊算悅, 安井算哲, 井上因碩(古因碩, 玄覺, 第一世井上, 계보정비후는 二世)등이 소출되었다. 算哲은 기소에 취임하기를 바랐으나 일축되었다.
혼인보家의 [전신록]은 算哲의 상소를 전하고 있다.
[전신록]은 혼인보家의 가전(家傳)이므로 할인하여 생각할 필요도 있으나 아마도 算哲의 반발을 초래한 사건이 있었던 듯하다. 道硯 문하의 형제 제자였던 算悅과 因碩은 算哲을 보좌하지않고 서로가 함께 사퇴한 때문에 결국 기소전의는 유야무야 끝나버렸다. 算哲은 자천(自薦)에 실패한 한을 품고 은거하기에 이른다. 이 사건의 사태는 일단 중지되었으나 算哲은 이 일로 명인기소의 야망을 算知에게 부탁한다.
算哲는 제자인 算知(명인算知)를 양자로 들여 실질적인 후계자로 정했으나, 49세의 나이에 아들 算哲(二世算哲, 澁川春海)이 태어났다. 아들인 二世算哲는 算知와는 12살의 나이차가 있었고, 천문, 음양술, 수학에 뛰어났다. 아들 算哲은 바둑과 함께 천문학을 좋아했다. 제자인 算知는 바둑기사로 아들인 算哲은 천문학자로 진출했다. 1652年(慶安五) 1月9日, 쿄토(京都)에서 운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