節山因碩, 1820年(文政三)-1856年(安政三) 本因坊丈和의 長子, 本名은 戶谷梅太郞, 五段에서 剃髮하여 道和, 還俗하여 葛野忠左衛門이라 이름한다. 水谷琢順의 養子로 되었다가, 水谷順策, 井上家養子로 되어, 井上秀徹, 井上家의 當主가 된다. 因碩, 隱居한 後는 節山으로 하는 등 改名을 많이 했다., 家元制度下에서 飜弄의 人生을 象徵하기도 한다. 入門時의 秀策을 위시하여 大田雄藏, 岸本左一郞 등이 對局이 많은 芸兄 들이다. 同年의 秀和와는 서로 肩를 나란히 切磋琢磨하였고, 初段부터 十代前半 五段이 될 때까지 同年同月同日에 나란히 昇級해 왔다고 한다. 道和의 爭碁人生이 暗轉한 것은, 眼病으로 十代後半을 碁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다. 全治하여 復歸한 것은 二十一세 때. 1839年(天保十)十一月, 本因坊丈和가 隱居하고, 후계자 丈策이 家督相續을 받아 十三世本因坊가 되다. 翌年七月에는 秀和의 후계자 決定이 있었다. 丈和는, 目標를 잃은 젊은 道和를 不憫으로 생각하고, 葛野家의 株를 買사주었다. 道和는 還俗하여 葛野忠左衛門으로 이름하고, 諸國 行脚의 旅行에 나선다. 山水風流로 傷心을 달랬다고 한다. 1836年(天保七)頃, 本因坊 外家의 水谷琢廉이 三十二세로 早世하자, 水谷家의 養子가 되어 順策으로 改名했다가, 1844年(天保十五)五月, 丈和가 因碩(幻庵)의 後繼者 및 井上家의 후계자로 되자, 丈策, 秀和 등을 說得하여 順策을 井上家의 養子로 承諾받는다. 順策을 水谷家에서 復籍시키고, 이름도 葛野忠左衛門으로 환원하므로써 井上家와 養子 緣組의 手續을 마친다. 十一月에는 井上秀徹로 改名, 翌年三月 正式으로 幻庵因碩의 후계자로 되었다. 1846年(弘化三)十一月, 秀徹은 나이 二十七세로 御城碁에 初出仕하여 十세 年長의 安井算知와 黑番으로 맞서 中盤에서 形勢混沌이 된 難局을 잘 타개했다. 이 무렵까지 秀徹은 秀策의 先相先을 維持하는 實力者였다. 1848年(嘉永元) 幻庵因碩이 隱居하자, 秀徹이 家督을 相續하여 十二世因碩이 된다. 赤星因徹을 잃고 有力한 後繼者가 없었던 玄庵의 잔꾀로 인해, 外家의 水谷家보다 나은 家元을 택하려는 丈和의 생각으로 인해, 坊家와 井家의 감정의 응어리는 쉽게 解氷될 수가 없었다. 玄庵의 野望을 이어받은 秀和가 名人碁所를 바라보면 이것을 阻止하는 것은 井上家의 當主가 된 秀徹因碩의 몫이었다. 만약 爭碁에서 敗退하면, 坊家出身의 當主일지라도 鼎의 輕重을 묻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집에 활을 당기는 것이 된다. 많은 重壓으로 秀徹의 精神은 極度로 緊張하고 있었다. 1850年(嘉永三) 秀徹은 門人嶋崎鎌三郞이 妻와 密通하자 嶋崎를 斬殺한다. 事件 前부터 周圍에서 그 不審한 모양을 警戒하고 있었다. 嶋崎의 主家인 細川家는 井上家의 恩顧를 받아들이고 義理로 內濟했다. 秀徹은 三十세에 隱居하여 이름을 節山이라 칭하고 相州相原에 幽捷된다. 事件後, 林家의 門人이었던 松本錦四郞이 井上家를 相續하여 十三世因碩이 된다. 井上 十三世가 된 후, 錦四郞은 사사건건 秀和의 碁所就位을 阻止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