幻庵因碩, 1798年(寬政十)-1859年(安政六) 출생지, 실명은 불명. 성은 橋本, 휘(諱)는 方義. 은거 후는 幻庵이라 칭했다. 또 橘齊라는 아호도 쓴다. 幻庵의 자서전 [쟁기묘전]에 의하면, 武門에서 태어난 이상 문무를 배워 청운의 꿈을 펼치라는 부친의 엄명이 있어 6세때 가을부터 바둑을 배우고 기사의 길을 걷게 된다. 6세에 鬼因徹이란 이명을 얻은 井上家의 외가 服部因淑에 입문하여 服部因徹로 칭한다. 1809年(文化六) 3月, 13세에 服部家의 양자가 되어 立徹로 개명한다. 1819年(文政二) 22세 때, 九世井上 因砂因碩의 후계자에게 간청하여 종가에 들어가다. 여기서 井上安節로 개명한다. 동년 11月17日의 어성기(御城碁)에는 服部 부자를 따라 출사했다. 기격은 五段, 실력은 七段격이었으나 本因坊元丈에게 2점국으로 대국하다. 결과는 [元丈일생의 필작]으로 元丈의 1집승. 당시, 因淑-幻庵의 라이벌인 丈和와 元美도 첫 출사했다. 丈和와 知得仙知는 여기서 명국을 남긴다. 이 한판의 대국이 幻庵과 丈和의 운명을 갈라놓는다. 후에 元丈, 知得, 幻庵, 秀和는 바둑四哲로 불리우고, 이기는 秀和, 지는 幻庵이라는 말이 나온다. 1835年(天保六)까지 어성기는 11국, 그후 6년을 쉬고 天保十三年에 재출사하여 2국, 계13국을 두었다. 1824年(文政七) 5月, 因砂因碩이 은거한다. 동년 7月27日에 幻庵은 十世井上因碩이 된다. 井上家의 원조인 中村道石을 一世로 하여 계보(系譜)를 고치면 幻庵은 十一世가 된다. 井上家 계보를 고쳐 쓴것은 幻庵因碩이 주도했다고 한다. 井上家에 들어오기 2개월 전에 , 服部立徹의 이름으로, 文化六年(13세) 奧貫智策과의 2점국에서, 동 十一年(19세) 葛野丈和과의 先番까지, 자신이 둔 바둑 98국을 자평한 전례에 없는 혁도(奕圖,기보) 4권을 간행한다. 소년기의 호적수는 [기재가 출중하여 따를 자가 없었다]고 하는 1살 연장의 櫻井知達이었으나, 知達이 18세로 죽었으므로 11살 연장의 丈和가 바둑에서나 인생에서 최대의 목표가 되었다. 11살의 나이 차이가 있는 幻庵은 丈和의 차세대이다. 丈和가 元丈의 후계자 출원에서 나이를 8살이나 낮추어 신고하여 기록상으로는 나이가 비슷하나, 幻庵은 丈和를 동시대의 라이벌로 생각하지를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적개심을 가지고 가일층 집요하게 추격했다. 井上 종가의 후계자가 된 후는 명인기소에의 야망이 더욱 구체적으로 되었다. 혁도(奕圖)의 출판과 계보의 고침은 혼인방家와 丈和에 대한 幻庵의 포석이었다. 丈和와의 대국은 1812年(文化九) 4月, 丈和 26세 四段, 立徹 15세 初段일 때, 立徹의 先二로 시작되어 이후 두사람이 八段에 오르기까지 총 68국을 남기고 있다. 立徹은 2점국에서 6승3패1무, 흑으로는 27승18패2무4중단, 백으로는 1승6패를 했다. 2점국과 先이 많았던 걸로 보아 丈和의 실력이 좀더 강했음을 알 수 있겠으나 최후의 대국에서는 丈和의 기력에 육박하고 있다. 丈和도 명인기소가 시야에 들어오자 因碩과의 대국을 기피하게 된다. 1814年(文化十一)에 9국, 익년에 16국이던 대국 수가 文化十三年에는 2국으로 극감하고, 文化十四年에는 1국도 두지않는다. 十四年은 丈和의 다른 기보도 거의 없는 걸로 보면, 토쿄를 떠났거나 무슨 사정이 있었던 걸로 보인다. 명인기소를 바라는 丈和는 幻庵과의 대국으로 지장이 생길 것을 우려했다. 1818年(文政元)에는 4국, 立徹이 井上의 후계자가 되고 丈和도 元丈의 후계자가 된 文政二年에는 겨우 3국밖에 없다. 文政四年 12月에 중단었다가 이후 익 五年 9月에 속개된 1국이 최후의 대국으로 되었다. 文政七年에 安節이 十世因碩(후에 十一世)이 되고, 文政十年에 丈和가 十二世 혼인보가 되었다. 명인기소를 바라던 두사람을 중심으로 바둑계가 갈라져 반외의 권모술수와 암투극을 벌린 것이 바로 천보의 내홍이다. 이 암투극은 因碩의 양부인 服部因淑이 주도하였는데 幻庵은 쟁기로 흑백을 분명히 하기를 바랬다. 丈和는 知得을 호랑이로 무서워했지만 더 무서웠던 것은 11세 소년 幻庵이었다. 1828年(文政十一) 1月, 丈和가 八段 준명인으로 승진하자 적극적으로 명인기소 취임운동을 시작한다. 성급한 丈和의 기소 취임을 좋게 보지않는 知得仙知을 책략으로 교묘하게 선동하여 그 익월에는 幻庵도 八段 준명인에 오른다. 幻庵은 丈和로부터 6년후에 명인기소를 양위받는 조건으로 丈和의 승진을 추천하는 취지의 구두약속을 하게 된다. 丈和와의 쟁기를 각오하고 있던 幻庵이었지만 막상 반상에서 丈和를 꺾을 확신은 없었다. 丈和에게 선동되었음을 알게된 幻庵은 즉각 쟁기를 출원한다. 寺社奉行은 이 건의 해결을 장로 知得仙知에게 위임한다. 仙知는 양자에게 쟁기 문서를 교부하고, 그 시행일은 2-3년의 유예를 두었으나 2년후 1831年(天保二) 3月, 돌연 丈和가 명인기소를 내명받아, 幻庵, 因淑, 知得을 아연시킨다. 격분한 幻庵은 집요하게 丈和의 실각 기회를 노리게 된다. 1835年(天保六) 7月, 松平家의 바둑회에 명인 丈和를 끌어들이는데 성공한다. 老中 松平周防守(石州浜田 城主)의 家老 岡田賴母가 安井家의 문인(門人)이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丈和는 장군 지남역의 어지기(御止碁)이므로 당주인 幻庵이 직접 대국할 것을 탄했으나, 因淑, 幻庵은 큰 기대와 함께 애제자 赤星因徹을 대리로 내세웠다. 그러나, 井上家를 대표하여 丈和의 대국상대로 나간 因徹은 丈和의 연속되는 묘수를 당하고는 피를 토하고 쓰러진다. 이 대국을 因徹 토혈(吐血)의 국이라 한다. 당시 幻庵은 자신이 두지않았던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因徹이 피를 토하고 쓰러진지 1개월 후 생전의 마지막 사제 대국이 두어진다. 그리고 다시 1개월 후 因徹은 세상을 뜬다. 幻庵은 麻布 妙善寺에서 성대한 1주기를 치룬다. 1839年(天保十) 11月晦日, 명인 丈和가 은퇴하고 그 익년에 幻庵이 명인기소를 출원했으나, 十三世 혼인보 丈策과 후계자 秀和가 즉각 이의 신청을 하여 秀和와 4번의 쟁기를 두게 된다. 혼인보家의 당주 丈策이 아닌 내제자 秀和와의 대국을 기피하지 않은 것은 丈和가 대국을 피하고 있었고, 애제자 赤星因徹을 죽게 한 후회의 감도 있었고, 秀和가 당대 제일의 실력자임을 누구나 인정했었던 때문이다. 제1국은 1840年(天保十一) 11月29日에서 12月13日까지, 8일7야간 寺社奉行 稻葉丹後守 집에서 두어졌다. 당시, 因碩 43세, 秀和 20세. 결과는 秀和의 흑번으로 4집승. 도중 因碩은 두번이나 피를 토하고 휴양을 취해야만 했다. 이 1국으로 실력에 자신을 잃게 된 因碩이 출원은 취하했으나, 건강이 회복되면 秀和의 先을 꺾겠다는 기분만은 강했다. 1842年 반년 후 11月, 7년만에 어성기에 출사하여 秀和와 대국, 秀和가 흑번으로 4집을 이기다. 秀和의 흑번을 깰 수 없음을 안 幻庵은 명인기소의 희망이 영원히 꺾임을 절감한다. 丈和는 松平家의 바둑회에서 28세 연하의 赤星因徹의 예봉을 꺾고 명인기소를 지켜낸다. 丈和가 승부사에 철저했음에 반해 幻庵은 승부를 떠나 자만이 가득한 바둑을 두었다. 그의 자만심은 결국 십년의 공을 일순에 무너뜨리는 결과로 이어진다. 오직 바둑만을 전념으로 한 승부사 기질의 丈和가 정점을 차지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1844年(天保十五) 11月, 丈和의 아들 水谷順策(戶谷梅太郞, 道和, 葛野忠左衛門)을 후계자로 영입하다. 1846年(弘化三), 상경도중 오사카에서 秀策과 이적(耳赤)의 국을 포함한 5국을 두다. 1848年(嘉永五), 50세에 은거하여 幻庵이라 칭하다. 井上秀徹(丈和의 아들)이 가독을 상속하여 十二世因碩 (節山因碩)이 된다. 井上家의 후계자도 상당한 지위였으므로, 후는 여생을 기분대로 즐겼다. 2년 후에 十二世因碩이 정신병으로 발광하였기 때문에 旗本 太田運八郞의 근습이었든 松本錦四郞을 十三世因碩으로 세우게 되었다. 幻庵과는 달리 가원측에서는 服部正徹을 세우려고 했으나 이때 正徹은 여행 중이었다. 1853年(嘉永五) 幻庵의 나이 55세에 [쟁기묘전]을 간행한 것은 일본과 결별할 각오였다. 幻庵은 문인 三神豪山을 데리고 토쿄를 출발하여 北陸을 돌아 大阪, 姬路, 山陽道를 거쳐 長崎로 향했다. 幻庵은 자신의 비운을 자탄하여 신천지에 희망을 걸고 청나라로 도항을 결심한다. 1854年(嘉永六) 6月, 幻庵은 豪山에게 단유호의 선두를 협박하여 진로를 청국으로 향한다. 그러나, 폭풍우로 자금 180량만 바다에 빠뜨리고 배는 구주(九州)의 해안에 표착했다. 당시는 중국을 잠자는 사자라고 불렀다. 그러나, 중국은 아편전쟁(1842)으로 구미열강이 침출하고, 홍수전의 태평천국의 난, 소도회의 난 등 동란의 와중에 있었다. 幻庵은 그같은 정세를 알지도 못한 채 막연히 중국을 바둑의 도원향으로 꿈꾸고 있었다. 幻庵에게는 일도(一途)란 것이 있으나 그 일도가 공회전하고 있다. 丈和는 [因碩의 기량은 실로 명인의 경지이나 다만 애석한 것은 때를 타고나지 못한 것이다]라고 했다. 幻庵은 [바둑은 운의 게임]이라고 자신이 말했듯이 시운이 없었든 비운의 기사였다. [쟁기묘전]에는 幻庵의 희비 심정이 토로되어 있다. [혁도], [위기종해록]등의 저작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