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硯因碩, 1707年(寶永四)-1772年(安永元)
下總에서 태어나다. 처음에는 伊藤春硯이라 했다.
1726年(享保十一), 二十一세, 六段으로, 후계자友碩의 뒤를 잇는 再후계자가 되고, 御城碁에 初出仕, 林門入에 先番으로 一目勝하다.
1734(享保十九)十二月二十三日, 四世井上因碩 因節이 隱居하자, 春硯이 五世因碩이 된다. 生涯 二番의 爭碁를 둔 것으로 有名하다. 棋力은 當代의 名手에 비해 떨어지나 爭碁史的으로는 重要한 人物이다.
1739(元文四), 七世本因坊秀伯은 七段 昇級을 하려고, 五世安井仙角을 통해 五世林門入과 五世井上因碩에 同意를 구했으나, 兩人이 承知하지 않는지라, 秀伯은 仙角을 添願人으로 하여 門入과 一年 二十番의 爭碁를 出願한다. 門入(五十세)이 病을 理由로 爭碁를 忌避하여, 代打로 春硯(三十二세)이 秀伯(二十四세)과 先相先으로 爭碁를 두게 된다. 第八局까지 秀伯의 四勝三敗一無가 된 상태에서 秀伯이 病死하여 爭碁가 中斷된다. 이중 二局은 大岡越前守의 屋敷에서 두어진 것이다.
1748年(寬延元)十二月, 琉球貢使의 隨行員이었던 田頭親雲上와 與那覇里之子가 島津家를 통해 井上家에 對局을 要請한다. 道策, 名人因碩 以來 三回日의 琉球棋士와의 國際手合이 이루어진다. 田頭는 春硯에게 三子, 與那覇는 春硯의 弟子 岡田春達과 四子로 對局하여 모두 完勝하다. 田頭는 [上手에 先](五段)을 요청했으나, 寺社奉行과 碁方이 협의하여 [上手에 先二](四段)를 許可하는 것으로 하다. 名人因碩의 先例에 따라 [日本國大國手]의 肩書를 찍은 免狀을 발행하다.
1764年(明和元)에는 九世本因坊察元과 함께 半名人(八段)으로 昇格하다.
1766年(明和三)七月十四日, 本因坊察元은 名人碁所를 받기 위해 春硯因碩과 爭碁二十番을 出願한다. 十月八日, 寺社奉行 久世出雲守 廣明으로 부터 察元, 春硯 兩人에게 碁所任命에 관한 二十番 勝負碁를 명하므로써, 春硯은 生涯 二番째의 爭碁를 두게 된다.
春硯 五十七세, 察元 三十一세.
同月十七日, 御城碁에서 察元-春硯 二十番碁(互先)가 開始되었다. 第一局은 儀禮的으로 春硯先番으로 빅으로 끝낸다. 翌年三月二十八日, 五勝一無가 되어 察元이 春硯에게 치수를 고칠 것을 要求했으나, 四連勝이냐 六勝이냐의 해석 차이로 紛糾를 하다가 春硯이 病을 理由로 爭碁가 中斷된다. 이에, 察元은 同年九月 名人으로 昇格하고, 三年後에는 碁所를 命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