道節因碩, 1646年(正保三)-1719年(享保四) 美濃大垣에서 태어나다. 桑原氏. 井上家 歷代 中에서도 中村道硯(道石)과 幻庵因碩은 다함께 一代의 棋傑이었다. 古來의 [名人因碩]이라 불리운다. 道策門下이나 道策스승과는 나이가 한살 차이 밖에 없다. 道策의 五弟子, 六天王 中에서는 異色의 存在이다. 先代의 道悅에 入門하고, 道策 四世로 되면서 道策의 弟子에 곧다고도 생각되나, 道悅에 入門했다는 說은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道策의 後繼者로서, 二十三세 年下의 道的, 二十九세 年下의 策元에게, 후계자를 도박으로 건 바둑을 道策에게 出願한다, 繁蹙를 샀다고도 전해진다. 후계자 道的이 죽고 三個月後이 지난 1690年(元祿三), 道策의 弟인 道砂因碩의 후계자로서 井家로 한다. 그 二年後에 바꾸어, 策元이 道策의 후계자로 세워진다. 道策도 道節의 일은 상당히 愼重하게 取及했다. 道節이 相當한 知識家였던 것이 그런 環境에서 敎育을 받고 자란 것이라면, 幻庵因碩나 林元美는 다같이 武家出身이다. 武士의 과정으로 稽古를 배우던 중에 豪放實直의 性格이 元來의 데카당스에 嫌氣를 주었는지, 年齡이 비슷하여 兄事했던 道策이 坊家의 當主가 된 것을 契機로 道策門下에서 本格的인 碁道에 들어간 것은 아니나 이때 正式으로 入門했다고 하면 三十一세이다. 晩學晩成의 타입이다. 碁所를 許可하지 않았던 것은, 根부터의 碁人이 아니고, 坊門生 출신이 아니고, 井上家를 坊家의 分家라고 본 때문이다. 道節의 驚異的인 上達과 長命이 道策의 誤算이었는지도 알 수 없다. 1690年(元祿三)八月三日, 道策의 實弟 三世井上道砂의 후계자로 되고, 同年十二月八日에 御城碁에 初出仕한다. 道節의 나이 四十五세 때였다. 御城碁의 成績은 六勝三敗一無. 1696年(元祿九)九月, 道砂因碩이 죽고, 三世井上因碩이 된 것은 五十二세 때였다. 御城碁는 후계자時節 六年간에 六局, 家督을 相續한 後는 四回를 出仕하고 있다. 1702年(元祿十五)三月二十六日, 道策가 病死하자, 遺命에 의해 道知의 後見人이 되어 坊家로 移居하고, 御城碁에도 나가지 않고 道知의 指導에 專念했다. 三年간, 道知는 安井仙角(古仙角)과의 爭碁(寶永의爭碁)에서 仙角과 互角以上으로 싸울 정도로 棋力이上達했다. 道知-仙角의 爭碁 第一局의 翌年에는 道知와 十番碁를 두었다. 道知가 上手(七段)로 昇進한다. 1708年(寶永五), 六十七세의 因碩이 十九세 道知의 後見을 풀고 井家로 돌아갔다. 後見을 풀 때 다시 十番碁를 두다. 七番에서 끝났다고 하나, 實際로는 두지않았던지 七番의 棋譜는 남아있지를 않다. 同年十月, 道知養育의 師恩에 報答하기 위해 道知와 周圍의 사람들이 他家와 연명하여 名人으로 推擧했다. 이 때는 碁所就位도 하지않았다. 第一局 道知 ○-× 因碩 (三目勝) 第二局 道知 △-△ 因碩 (無勝負) 第三局 道知 ×-○ 因碩 (二目勝) 第四局 道知 ×-○ 因碩 (三目勝) 第五局 道知 ○-× 因碩 (八目勝) 第六局 道知 ×-○ 因碩 (三目勝) 第七局 道知 ×-○ 因碩 (不計勝) 第八局 道知 ○-× 因碩 (四目勝) 第九局 道知 ×-○ 因碩 (二目勝) 第十局 道知 ×-○ 因碩 (七目勝) 1710年(寶永七)十一月, 琉球國 中山王의 朝貢에 隨行해 온 屋良里之子, 仲原筑登親雲上이 치수를 求하여 온지라 因碩은 寺社奉行 安藤右京進을 通해 老中의 許可를 얻고 치수를 差配했다. 屋良이 道策과 對局한 浜比嘉에 따라 免狀을 懇請해 왔기에 外交儀禮上의 觀点에서 碁所에 就任했다. 그때, 琉球에의 儀禮가 있기전에 隱居하고 道知에게 碁所를 讓位한다고 約束했다. 그때까지도 暫定的인 就位였으나, 碁所를 道知에게 讓位한 것은 十年後인 1721年(享保六) 道知 三十二세 때였다. 道節의 바둑은 道策의 道的, 策元, 星合八硯 등의 弟子들에 비해, 布石에서는 劣勢나 中盤부터의 豪力은 拔群이었다. 그러나, 布石의 모양이 碁의 進步란 点에서 道策에게 不滿이었다면 道策流의 繼承者란 거론할 수가 없다. 모든 面에서 道策門下는 特異한 存在였다. 著書로는, [石配通圖精修編], [碁經傳要集], [要津定規], 古今東西 超一級의 詰碁集인 [圍碁發陽論] 등이 있고, 또한, 道知, 高橋友硯, 堀部因入 등이 編纂한 本因坊家의 古記錄 [傳信錄]을 남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