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보 秀策, 1829年(文政十二)-1862年(文久二) 備後國 御調郡 三浦村 外之浦(因島)에서 태어나다. 어릴적 이름은 桑原虎次郞. 부친 輪三과 어머니 카메의 차남. 집에서는 잡화상[浜滿屋]을 경영했다. 어머니에게 바둑을 배우다. 바둑이 장난감. 6살 무렵 尾道港의 상인 橋本吉兵衛에게 기초를 배우다. 2년후에는 初段 吉兵衛과 호선으로 둘 정도로 바둑이 늘어 신동의 평판이 자자했다. 御調郡을 관할하는 芸州藩의 三原城主 淺野甲斐守忠敬에 소출(召出)되다. 거기서 茶坊主風의 安田榮齊로 이름을 바꾸고, 寶泉寺의 주지 保進, 유학자 坂井虎山에게 바둑과 한학을 배우다. 성을 桑原에서 부친 실가의 성인 安田으로 바꾼 것은 상인보다는 역대 촌장(村長)을 하는 安田家 쪽이 체면이 좋았다고 본 모양이다. 因島에서 배로 어성(御城)에 가는 일도 매우 어려웠으므로 安田家 양자의 형식을 취한 것이라 본다. 桑原秀策의 이름은 秀和의 후계자 원서를 寺社奉行에 제출하는 일시적인 것이었다. 이것은 양친을 생각하는 효에 돈독한 秀策의 희망이었다. 1836年(天保七)春, 5月5日의 생일로 만7세가 되는 榮齊 소년은 尾道港에 있는 伊藤松次郞(松和)과의 대국으로 기재(碁才)를 인정받았다. 松和의 권유로 익년에 淺野家의 家臣寺西右膳을 따라 丈和 문하에 들어간다. 소년의 바둑을 본 名人丈和는 [이는 150년래의 기호(碁豪)라 나보다 크게 될 사람이다]라고 절찬했다. 150년래란 道策이래란 의미이나 이 에피소드는 후의 일이다. 혼인보家가 榮齊에게 초단에서 三段, 四段의 정식 면허장을 주는 것은 아마도 三原侯의 제자로 여긴 탓이리라. 당시 내제자는 구두로 치수를 고치는 것만으로 면장을 줄 수가 없었다. 榮齊 소년도 향리에서 三原侯의 측근으로 일한 적이 있었으므로 토쿄는 언제나 수행차 온다는 생각이었다. 본인은 물론 丈和 마저도 榮齊가 坊家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1840年(天保十一) 초단의 면장을 받고 귀국한 榮齊 소년은 淺野忠敬에게 五人扶持을 받고, 坂井虎山에게 한학의 강의를 받았다. 유교적 성격은 이때에 형성되었다. 귀국 생활도 1년여만에 끝나고, 天保十三年 8月에 秀策은 다시 토쿄 수행에 나선다. 도중 오사카에서 玄庵因碩의 필두제자 中川順節과의 2점국 4국을 전승하여, [安芸小僧]의 이름이 전국에 퍼졌다. 이때의 대국보를 입수한 河北房種(耕之助)은 12세 榮齊 소년의 평판을 仁孝 천황에 보고했다 한다. 秀策의 활약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물론 혼인보家의 흥미를 자아냈다. 토쿄에 도착하자 마자, 榮齊 소년은 9月11日에 사부 丈策과 후계자 秀和로부터 秀策이란 이름과 二段의 면장을 받는다. 익년부터는 1년마다 승단을 거듭한다. 소년 秀策의 지도에 열심이었던 동문으로는 丈和의 장자 戶谷道和(十二世 井上秀徹因碩), 坊門의 숙두가 된 동향의 岸本左一郞, 천보4걸의 1인인 安井門의 太田雄三이 있다. 9년연상의 형 제자 道和와의 대국은 道和가 玄庵因碩의 후계자가 된 후에도 계속된다. 1846年(弘化三)까지 秀策은 先相先을 유지하고 백을 잡는다. 22년 연상의 雄三과는 2점국에서 시작하여 8년만에 호선으로 올라간다. 雄三과의 대국은 秀策의 총 대국 수에 4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 무렵 秀和와는 대국을 많이 하지못했는데 秀和가 玄庵에 대한 대책으로 손을 뺄 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1844年(天保十五) 10月, 秀策은 두번째의 귀국을 했다. 이듬해 봄 三原侯에 문후를 드렸다. 그리고 증록(增祿)도 받았다. 향리 체제는 1년여로 끝난다. 五段 내지 七段을 얻어 귀향하여 자신을 도와준 三原侯를 비롯한 향토 사람들에 보은을 하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1846年(弘化三) 세번째 토쿄 수행에 나선다. 이번의 여행이 秀策에게는 일대 전기를 가져온다. 5月 오사카에 온 秀策은 다시 中川順節과 대국한다. 秀策 先相先의 치수로 4연승하여 호선으로 치수가 바뀐다. 얼마후 玄庵因碩이 오사카에 온다고 하여 대국을 희망했으나 오사카 체제는 3개월로 끝난다. 順節과 주위사람들의 만류 때문이었겠으나 18세의 젊은 秀策에 대해 명인 丈和가 대국을 기피한 때문이다. 6년전 天保十一年부터 2년간, 秀和와 세번에 걸쳐 사투를 벌린 玄庵因碩과의 대국에는 심통이 있었다. 玄庵-秀和의 세번째 대국은 秀策이 토쿄 체제중에 있었다. 이때 玄庵因碩은 49세, 八段 준명인, 秀和와의 대국으로 玄庵은 명인기소의 희망을 접는다. 2년전에는 水谷順策(丈和의 장자)을 받아들여 井上秀徹로 후계자에 앉혔다. 7月20日에 2점국을 두었으나 일방적으로 밀리면서 지자, 四段의 秀策에 파격적으로 先을 허가하다. 先으로도 秀策이 3승1무 하다. 그중 1국은 [耳赤의 국]으로 고금의 명국으로 유명하고 바둑월드의 명국감상에 실려있다. 玄庵은 죽기 4년전인 58세 때도 秀策과 대국했다. 이 세기의 천재와의 대국을 끝으로 생을 마감했다. 혼인보家에 도착하자, 丈和, 丈策이 秀和에게 秀策을 후계자로 하자는 신청이 있었다. 秀策은 향리 三原侯에의 충의심으로 강경히 고사했다. 가원4가의 필두인 혼인보家의 당주를 고사하는 일은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당시 당주를 미워하여 어성기 출사를 거부한 太田雄藏은 秀策의 이런 순수함에 반했다고 한다. 秀策의 거절에 혼인보家는 寺社奉行 脇坂淡路守安宅에 연락하여, 三原淺野家의 본가가 있는 廣島의 번주(藩主) 淺野齊鼎를 움직여서 三原侯의 양해를 얻도록 하는 한편, 지금까지 대국을 않고 있던 秀和와의 대국도 주선했다. 1846年(弘化三) 10月14日부터 익년 9月16日까지 秀策이 17연승을 했다. 또 井上秀徹(丈和의 장자)과는 秀策의 先相先으로 5국을 두었고, 당주 丈策, 은거중의 丈和와도 대국을 가졌다. 당주 丈策, 은거 丈和와의 2점국 대국은 秀和를 정식 후계자로 인정한 의미도 있었다고 하겠다. 1847年(弘化四) 10月에 당주 丈策과 선대당주 丈和가 차례로 죽다. 공의(公儀) 碁士로 되는 것에 三原侯를 비롯한 향리 사람들의 적극적인 찬동이 있었다. 17연승의 대기사 秀和에 대한 존경심도 秀策을 坊家로 끌어오는 요소로 된다. 1848年(嘉永元) 11月에 正式으로 秀和의 후계자가 되다. 익년부터 秀策은 어성기(御城碁)에 출사한다. 그리고, 12회의 어성기(御城碁)에서19연승 무패의 위업을 달성한다. 秀策 19연승의 어성기(御城碁) (1849~1861) 第 一 局 安井算知 (黑番11目勝) 第 二 局 坂口仙得 (黑番不計勝) 第 三 局 坂口仙得 (黑番八目勝) 第 四 局 伊藤松和 (黑番三目勝) 第 五 局 林 門入 (黑番七目勝) 第 六 局 安井算知 (黑番不計勝) 第 七 局 井上因碩 (白番二目勝) 第 八 局 伊藤松和 (黑番六目勝) 第 九 局 坂口仙得 (黑番不計勝) 第 十 局 安井算知 (白番一目勝) 第十一局 井上因碩 (白番不計勝) 第十二局 伊藤松和 (白番不計勝) 第十三局 安井算知 (黑番不計勝) 第十四局 坂口仙得 (白番三目勝) 第十五局 伊藤松和 (黑番九目勝) 第十六局 服部正徹 (黑番13目勝) 第十七局 林 有美 (白番四目勝) 第十八局 林 門入 (白番14目勝) 第十九局 林 有美 (白番不計勝) 1853年(嘉永六) 1月부터 당시 秀策에게 호선으로 두던 太田雄藏과의 30번기가 시작된다. 30번기는 雄藏이 先으로 치수가 바뀐 제23국을 끝으로 종료된다. 이 무렵, 秀策에 맞서는 사람은 스승 秀和와 아우 제자 秀甫뿐이었다. 文久 원년에는 秀甫와의 십번기가 두어졌는데, 秀甫의 6승3패1무, [방원신법 십번기]에서는 7승2패1무 였다. 秀策은 아우 제자와 재미삼아 두는 기분이어서 승부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저 취향을 시험해 본 것이라 했다. 秀策-秀甫의 십번기 (1861) 第一局 秀策 ○-× 秀甫 (六目勝) 第二局 秀策 ×-○ 秀甫 (不計勝) 第三局 秀策 ×-○ 秀甫 (二目勝) 第四局 秀策 ×-○ 秀甫 (一目勝) 第五局 秀策 △-△ 秀甫 (無勝負) 第六局 秀策 ○-× 秀甫 (三目勝) 第七局 秀策 ×-○ 秀甫 (一目勝) 第八局 秀策 ○-× 秀甫 (不計勝) 第九局 秀策 ×-○ 秀甫 (不計勝) 第十局 秀策 ×-○ 秀甫 (不計勝) 1862年(文久二)八月, 순풍에 돛 단듯한 기사인생이 약속되면서 돌연 秀和가 급서한다. 이 무렵 토쿄에는 콜레라가 크게 유행했는데 혼인보家에서도 많은 환자가 발생했다. 秀和가 콜레라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門人들의 간병에 정성을 다했는데 이때 秀和도 감염되었던 모양이다. 이 무렵부터 양이운동(攘夷運動), 개국과 격동의 시대가 시작되고, 어성기도 중지한 채 막부도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秀和, 秀策, 秀甫의 三秀는 토쿄 바둑의 집대성을 이루는데, 秀策의 죽음은 바로 토쿄 바둑의 종언을 상징한다. 丈和의 아들 中川龜三郞이 죽기 전까지는 전성(前聖)의 道策에 대해 후성(後聖)으로 인정받던 사람은 혼인보 丈和였으나, 秀策에게 후성(後聖)의 자리를 내어준 것은 11년 연장의 형 제자 石谷廣策의 현창(顯彰)운동이 요인이었다. 秀策이 향리에 보낸 편지에는 廣策은 신용할 수 없는 사람이니 마음을 주지말라고 써 보낸 것이 있다. 秀策의 예견대로 廣策은 秀策 현창으로 모은 기부금, 바둑책 등의 인세를 모두 廣策 자신을 위해 썼다고 한다. 이하는 秀和가 秀策의 죽음을 부친 桑原輪三에게 알리는 서한 [一筆啓上仕候. 當然 秀策儀當春母(秀策生母카메)忌中 內精進望 候故 哉, 椎茸多食, 大逆上望, 頭瘡 眼病等 大難澁致 候據, 六月 漸漸 全快仕候 得共, 平生比 氣力薄 候處, 麻疹流行 內弟子 爲始 女子 藥等 世話望, 追追 肥立候 付安心 仕候處, 八月三日 暴瀉小下, 四日暴瀉强 種種 療養相加 候得共養生 不成, 十日午 下刻死 仕候. 卽時 法名差上 候. 貴所 御嘆 推察仕候, 日日落淚致 候. 殊天性 才智勝, 芸 諸人知處, 碁所 相成人 下拙始門人 共, 申居候處 中道別, 夢心地 御座候. 先悔 斯如 御座候. 以上]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