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보 秀甫, 1838年(天保九)-1886年(明治十九)
村瀨彌吉, 토쿄 車坂下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다. 가까이에 있는 혼인보 도장의 돌소리에 끌려 바둑기사가 될 결심을 한다. 8세 때, 星目風鈴에서 十三世 혼인보 丈策과 바둑을 둘 기회를 얻다. 丈策과 秀和에게서 기재(碁才)를 인정받아 통학하는 제자가 되다.
1848年(嘉永元), 10세에 입단하다.
가정이 빈곤하여 2기마다 지불하는 2원의 지도료도 내기가 어려운지라 彌吉의 부친이 사가(師家)에 가서 사죄하다. 이에 丈策, 秀和는 彌吉의 장래를 약속하겠다고 위로하다. 어린 마음에도 스승에게 보은하겠다는 겸양을 가지고, 다른 제자들보다 일찍 일어나고 밤늦도록 가사일을 도맡아 처리하면서 바둑에 정진했다. 사례의 건이 있었는지 嘉永四年 14세에 내제자가 되었다. 십대 후반에 들어서는 혼인보家에서 두각을 나타내었고, 秀和의 후계자 秀策에게도 先二에서 先으로 치수가 바뀌었다.
1854年(寬政七) 9月에는 岸本佐一郞를 젖히고 혼인보家의 숙두(塾頭)로 임명된다.
이 무렵부터 秀和가 彌吉을 여행길에 잘 데리고 다녔는데, 손님의 응접에서 부터 스승의 신변잡사까지 잘 챙김은 물론, 여행 중에 짬이라도 나면 사제간에 격의없이 바둑을 두는 秀和 스승의 온정도 있어, 여행에서의 사제대국에서는 밤을 새는 일도 적지않았다. 20세 전후에는 서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무사수행의 여행에 나가는 일이 잦았다. 彌吉은 나중에 秀策의 후계자으로 지명된다.
1860年(万延元) 12月, 六段으로 승진, 삭발하여 秀甫로 이름을 바꾼다.
上手 七段이 되기 전에는, 삭발하여 어성기에 출사하도록 한 것은 秀和의 기소운동과도 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흑선래항의 세정불안으로 秀甫가 어성기에 출사하는 기회는 계속해서 상실되었다. 이 무렵부터 秀甫는 [혼인보 家의 보배] 또는 [용호]라 불리운다. 文久元年에 秀策-秀甫 십번기가 두어진다.

第一局 秀策 ○-× 秀甫 (六目勝)
第二局 秀策 ×-○ 秀甫 (不計勝)
第三局 秀策 ×-○ 秀甫 (二目勝)
第四局 秀策 ×-○ 秀甫 (一目勝)
第五局 秀策 △-△ 秀甫 (無勝負)
第六局 秀策 ○-× 秀甫 (三目勝)
第七局 秀策 ×-○ 秀甫 (一目勝)
第八局 秀策 ○-× 秀甫 (不計勝)
第九局 秀策 ×-○ 秀甫 (不計勝)
第十局 秀策 ×-○ 秀甫 (不計勝)

십번기를 끝낸 文久二年 8月10日 秀策이 급서하자 후계자 문제로 인해 秀甫의 바둑인생이 크게 바뀌게 된다. 혼인보家에서는 연령으로도 기격으로도 후계자의 자격은 충분하고, 秀和의 묵계도 있고 해서, 秀甫 자신도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丈和의 미망인 勢子의 간섭으로 秀甫의 후계자는 실현되지 않았다. 소위 [勢子의 횡포]사건으로, 丈和의 후실이자 秀策의 계모란 사람이 바둑에까지 간섭하고 나서므로써 秀和가 생각한대로 후계자가 세워지지도 않았고 秀甫와의 사이도 나빠진다.
秀策의 1주기를 마친 10月에 秀和의 아들로 나이 14세의 三段 秀悅이 후계자로 세워진다. 丈和의 삼남으로 秀甫보다 한살 연장인 中川龜三郞 五段으로 후계자로 삼지 않은 것은 龜三郞은 勢子의 아들로서 세간의 이목을 너무 집중기키는 일이었기 때문이라 한다. 세정불안을 배경으로 가원의 권위를 놓치지 않으려는 勢子와 土屋家간에는 모종의 타협이 있었고, 이로써 秀悅의 후계문제는 타결되었다.
秀和는 秀甫의 불만을 풀어주고 바둑으로 일가를 이루도록 1864年(文久四) 秀甫를 七段으로 승진시킨다. 도중, 十二世 井上因碩 (松本錦四段)이 이의를 제기했으나, 쟁기로 결정하자고 맞받아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伊藤松和는 因碩이 유리한 점이 있을 때마다 아직 바둑이 미숙하다고 평했다고 한다. 27세에 七段으로 승진했으나 그해는 어성기가 열리지 않아, 秀甫는 크게 낙담하여 師家를 떠나 越後, 信州 등으로 방랑의 길을 떠난다. 명치유신 시기에 秀甫는 여러번에 걸쳐 토쿄를 떠났다.
이 시기 秀甫의 행동에는 불분명한 점이 많다.
1867年(慶應三) 1月에는 혼인보家의 원수인 井上因碩의 집에서 秀甫-松和, 坂口仙得-小林鐵次郞간에 연기바둑이 두어졌다. 秀甫와 의기투합한 이노우에家의 小林鐵次郞이 이노우에家와 혼인보家, 秀甫와 師家간의 화해를 위해 많은 애를 썼다. 그후 秀甫가 토쿄에 다시 나타난 것은 1870年(明治三) 3月이 되어서다. 그해 윤10月에는 副島種臣의 집에서 秀甫-鐵次郞과 中川龜三郞-海老澤健三(巖崎)간의 연기바둑이 있었다. 그리고 秀和의 후계자 혼인보 秀悅과도 대국을 한다.
明治三年에 村瀨秀甫의 상경 축하회가 열린 것을 보면 장기간 토쿄를 떠나 있었던 모양이다. 明治三年에 秀悅은 秀甫를 위해 上野 가까운 根岸에서 바둑모임을 열었다고 전해진다. 明治四年에는 스승 秀和와의 대국이 있었고, 10月부터 12月에는 秀和를 수행하여 名古屋을 다녀온다. 익 五年에는 14세 年少 林秀榮과 함께 美濃, 尾張, 伊勢, 大阪 등지를 유람도 했다.

[방원신법] 십번기의 전적

제5국까지는 秀甫가 정선으로 두다.
第一局 秀和 ○-× 秀甫 (先, 不計敗)
第二局 秀和 △-△ 秀甫 (先, 無勝負)
第三局 秀和 ×-○ 秀甫 (先, 八目勝)
第四局 秀和 ×-○ 秀甫 (先, 五目勝)
第五局 秀和 ×-○ 秀甫 (先, 四目勝)
定先에서 先相先으로 치수가 바뀌다.
第六局 秀和 ×-○ 秀甫 (先相先 先番, 四目勝)
第七局 秀和 ×-○ 秀甫 (先相先 先番, 六目勝)
第八局 秀和 ○-× 秀甫 (先相先 先番, 六目勝)
第九局 秀和 ○-× 秀甫 (秀和 白番, 三目勝)
第十局 秀和 ×-○ 秀甫 (先相先 先番, 不計勝)

秀榮과의 여행을 3년이나 함께 했다고 하나, 明治六年 7月 秀和가 죽었을 때 秀甫는 어디에 있었는가? 스승의 장례식에 출석했는지 조차도 분명치를 않다. 이 무렵부터 秀甫는 秀和 사망후의 師家과는 소원하게 되고 지방을 유람하게 된다. 長野의 犀北館에서 와병 중일 때 헌신적으로 간호해 준 종업원 다끼와 함께 越後에서 일가를 이루었다는 말도 있다.
1878年(明治十一), 정신병을 앓던 十五世 혼인보 秀悅이 회복 불능으로 판명되자, 林家의 당주였던 秀榮(秀和의 차남)이 혼인보家의 위급을 구하고자 秀甫를 十六世 혼인보로 영입을 시도한다. 秀甫가 토쿄에 있지 않았으므로, 中川龜三郞이 연락책을 맡았다. 中川龜三郞의 이간으로, 秀甫는 中川宅에 기숙하다가 20여일이나 지나서야 서서히 師家로 향한다. 十六世 혼인보는 秀甫와 龜三郞과의 갈등 문제로 秀榮은 자신의 아우 百三郞으로 하여금 十六世 혼인보에 세운다. 이로써 秀榮-秀甫-龜三郞간에는 수습할 수 없는 틈이 생긴다.
5년 후에는 秀榮은 아우를 밀쳐내고 자신이 직접 十七世 혼인보로 취임한다.
결과적인 사실이지만 이러한 난관들을 거쳐 秀甫는 1886年(明治十九) 7月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어렵게 어렵게 十八世 혼인보에 등극을 하게 된다.
秀甫가 죽기 불과 2개월여 전의 일이다.
中川과 秀甫간에는 방원사(方円社)의 구상이 미리 되어있었는지, 秀甫는 가원의 실력 제1인자로서 독립독보의 기개를 강하게 하고 있었다. 혼인보 계승의 뒷 이야기는 더 이상 없었다. 명치라는 시대의 풍조가 기성의 것에 대한 가치관을 바꾸었는지도 알 수 없다. 이러한 사건들이 방원사 발족의 동기가 된다. 秀甫를 필두로 中川龜三郞, 高橋周德, 小林鐵次郞이 발기인이 되어 방원사를 연구회로 발족한 것은 1879年(明治十二) 4月, 十六世 혼인보 秀元의 탄생은 동년 8月, 秀元-秀榮의 가원이 탈회한 것은 동년 10月의 일이다.
방원사 발족 당초는 기격에 의해 서열이 정해졌으나, 秀榮의 주장으로 三段의 혼인보 秀元을 필두로 가원이 상위를 차지하는 고래의 격식이 다시 부활되었다. 秀甫가 가원과의 협상에서 일방적으로 양보하는 것은 연구회를 존속시키려는 생각이 강했던 것 같다. 가원의 1인인 安井算英은 최후까지 양측의 조정에 노력하고 방원사의 정례회에도 자주 얼굴을 내밀었다.
연구회로서의 방원사는 가원측의 탈퇴로 분열되었으나, 安井를 비롯한 혼인보家, 하야시家, 이노우에家의 3가가 방원사에 소속된 기사의 단위를 박탈했으므로, 익1880年(明治十三) 5月에 면장 발행에 나서고, 7月부터는 방원사 사장 村瀨秀甫, 부사장 中川龜三郞, 이사 小林鐵次郞, 高橋杵三郞, 水谷縫次, 酒井安二郞을 중심으로 일본기원의 전신으로 되는 자본주의 시대의 새로운 가원(家元) 방원사를 탄생시킨다.
中江兆民의 평론수필집 [일년유반](1901年)의 [근대비범인 31인]에 秀甫의 이름이 거명된다. 秀甫는 방원사를 융성으로 이끌고, [위기신보]의 발행, 기금의 창설, 정식시합의 개시 등으로 사회적 명성도 얻는다. 상설 지남역으로 秀甫, 中川龜三郞, 小林鐵次郞, 水谷縫次, 高橋周德, 高橋杵三郞, 梅主長江, 酒井安次郞(安二郞), 大澤銀次郞, 林佐野, 今井金江茂, 關源吉을 윤번으로 하는 등 많은 시도가 이루어졌다. 明治十六年에는 종래의 단제도를 급수제로 바꾸고 외국인에의 보급도 꾀했다. 明治十四年에 방원사 전원의 추천으로 八段에 승진, 익년에는 방원신법(2권)을 발행한다.
1884年(明治十七) 12月, 방원사의 정례회에 十七世 혼인보가 된 秀榮이 출석했다. 이는 秀榮의 궁상을 구하려고 후계자들과 주위 사람들이 秀甫와의 화해를 획책한 것이었다. 이것을 기회로 秀甫-秀榮간에 십번기 대국이 이루어졌는데 이를 秀甫-秀榮의 [화해의 바둑]이라고 한다. 월1회 간격으로 두어지던 대국이 明治十八年 6月 제8국에서 5개월간 중단되었다가 다시금 반년이 지난 明治十九年 8月에 이르러서야 재개가 되었으나 이 대국이 秀甫의 마지막 대국이 된다.

第一局 秀甫 ×-○ 秀榮 (不計勝)
第二局 秀甫 ○-× 秀榮 (八目勝)
第三局 秀甫 ○-× 秀榮 (二目勝)
第四局 秀甫 ○-× 秀榮 (四目勝)
第五局 秀甫 ×-○ 秀榮 (三目勝)
第六局 秀甫 ○-× 秀榮 (不計勝)
第七局 秀甫 ×-○ 秀榮 (七目勝)
第八局 秀甫 ○-× 秀榮 (二目勝)
第九局 秀甫 ×-○ 秀榮 (12目勝)
第十局 秀甫 ×-○ 秀榮 (四目勝)

1886年(明治十九), 최종국을 두기 1주전에 혼인보 秀榮은 秀甫에게 八段을 정식 인정하고 아울러 혼인보를 양위하고는 土屋秀榮으로 돌아간다. 그날로 秀榮은 十八世 혼인보 秀甫로 부터 七段을 증 받는다. 혼인보 秀甫로 이름을 바꾼 후의 대국은 이 1국 뿐이다. 八段과 五段은 先二의 치수이나, 전국을 秀榮이 先으로 두고 있는 것은 아버지 秀和의 제자 시절부터 秀甫는 七段格이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丈和의 제자인 中川龜三郞에게는 先二로 두게했으나 2점국을 두지는 않았다. 제9국까지 秀榮의 先이 유지되고 있으나 秀榮이 계속 先을 유지하려면 앞으로의 남은 2국을 다 이겨야만 한다. 秀榮은 혼인보家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 혈연보다는 실력 필두의 秀甫로 하여금 혼인보의 좌에 앉혔다. 秀甫의 여명도 2개월도 남지 않음을 안 주위 사람들이 秀榮에게 양위할 것을 강요했다고도 전해진다.
1886年(明治十九) 7月30日, 秀榮에게서 혼인보를 물려받은 그날 밤 秀甫는 혼인보家에 대대로 내려오는 [浮木盤]을 머리에 이고 춤을 췄다고 한다. 秀甫는 혼인보가 된 2개월반 후 10月14日 熱海에서 부인의 간호를 받으면서 요양하다 4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죽월일전(竹月一戰)
秀甫는 위궤양인지 위암인지 때문에 세번의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만년에는 명인으로 추거된 적도 있었으나, 은사 秀和도 못한 명인을 내가 어찌 하느냐고 얼굴을 붉히면서 사양했다고 한다. 秀和가 믿고 아끼며 수염으로 키운 애제자 秀甫는 명치 바둑계를 훌륭히 통솔하고, 秀榮을 크게 키웠으며, 근대바둑에의 교두보로서 秀和의 기대에 한치 어긋남이 없이 스승의 은혜에 보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