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보秀榮, (十三世林, 十七世/十九世혼인보), 1852年(嘉永五)-1907年(明治四十) 1852年 9月20日, 秀和의 차남으로 토쿄 本鄕湯島, 속칭 櫻馬場의 혼인보 별가에서 태어나다. 어릴적 이름은 土屋 平次郞. 형은 十五世 혼인보 秀悅, 아우 土屋百三郞은 第十六世 및 第二十世 혼인보 秀元. 11세에 林十二世 門入柏榮의 양자로 되다. 柏榮이 죽은 후 秀榮으로 개명하고, 十四세에 가독(家督)을 상속하여 林家十三世로 되나, 어성기(御城碁)에 출사할 기회는 없었다. 후에 하야시家를 떠나 第十七世 및 第十九世 혼인보가 되다. 1868年(明治元) 17세, 대국 성적이 우수하여 혼인보家, 야스이家의 찬동을 얻어 四段으로 승단할 제, 十三世 井上因碩(松本錦四郞)이 반대하는 바람에 동문인 小林鐵次郞을 맞아 쟁기를 두는 어려움도 있었다. 이때 秀榮이 井上因碩이 빚어낸 小林鐵次郞과의 대국을 양보할 수 없었던 것은 자신은 대기사 秀和의 아들인데다 低段인데다 나이도 어린데다 하야시家 당주로서의 입장도 있는데다 거기다 秀榮의 완고한 성격이 더해 혼인보家 출신의 과잉적인 과시가 함께 한 것으로 보인다. 小林과는 1876年(明治九)에 20번기를 先相先으로 개시한다. 秀榮에 가장 영향을 끼친 것은 14세 年上의 村瀨秀甫였다. 秀甫는 혼인보 秀和의 후계자 문제로 사가(師家)와는 소원하게 지냈다. 1871年(明治四) 10月부터 12月까지 秀甫는 秀和를 수행하여 나고야(名古屋)를 다녀온다. 이 여행에서 秀和는 秀甫에게 계승문제의 화해와 세 자식들에 대한 후견을 부탁했다. 익년, 秀甫는 秀榮과 함께 美濃, 尾張, 伊勢, 大阪을 여행한다. 1873年(明治六) 7月 秀和가 죽었으나 秀甫의 행동이 분명하지를 않아 혼인보家와의 관계가 또다시 냉각되기에 이르렀다. 이무렵 혼인보家는 유신개혁에 의해 가록(家祿)이 五十石에서 十三石으로 줄었는데다 혼인보 가옥이 화재를 만나 빈궁하게 지내는 터였다. 秀和가 죽은 후 十五世혼인보를 이어받은 아들 秀悅은 현실의 냉혹함에 주눅이 들어 급기야 1878年(明治十一)에는 정신이상으로 미치게 된다. 秀榮은 아우 土屋百三郞(秀元)과 협의하여 혼인보家의 中川龜三郞을 통해 秀甫를 十六世혼인보로 영입한다. 秀榮은 中川도 秀甫도 혼인보家를 위해 진력해 줄 것이라 믿었으나 중간에 들어온 中川의 정략으로 秀榮과 秀甫는 대면조차 안하는 관계로 된다. [좌은담총]에 따르면, 상담을 받은 中川은 秀甫가 十五世 상속문제를 이유로 거부하고 秀悅이 회복되기를 기다리겠다고 대답했다 한다. 秀悅의 미친 병이 심했기 때문에 三段의 百三郞을 十六世에 내정하자 中川은 돌연 秀甫를 十六世로 세울 것을 제안한다. 秀甫는 미리 귀경하여 中川 댁에 체재하고 있었다. 中川 자신이 秀甫 후에 혼인보로 나아갈 야심이 있었던지, 방원사(方円社)의 구상이 있었던지는 모르겠으나, 진상은 어쨌든 실력 제1인자인 秀甫를 지지하던 秀榮과 中川의 생각이 서로 맞아 떨어지자, 이번에는 秀榮과 秀甫간에 알력이 일어난다. 1879年(明治十二), 村瀨秀甫(당시42세), 中川龜三郞(43세), 小林鐵次郞(32세)를 중심으로 방원사가 조직되었다. 가원 측에서는 安井算英, 林秀榮, 혼인보家에서는 秀悅의 대리로 土屋百三郞(秀元), 井上家에서는 小林鐵次郞이 松本因碩의 대리로 하여, 가원4가가 모두 참가한 것은 秀和가 유신 혼란중에 조직한 연구회 [3일회]와 [6인회]가 하나의 연장선 상에 있었던 것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신후의 진취적 기풍에 민감했던 秀甫, 中川, 小林 등의 의도는 모든 봉건적 제도의 철폐, 구식 누습의 타파, 유신의 혼란으로 지리 분산된 기사들의 대동단결에 있었다. 방원사가 발행한 [위기신보]는 격식에 관계없이 단을 기준으로 발회기념 대국은 秀榮-秀甫 전이 최상위로 편성되었다. 부친 秀和를 존경하고, 혼인보家에 태어난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秀榮에게는, 혼인보가 바둑계의 정점이고 단에 관계없이 최상위가 아니면 아니되었다. 8月14日, 秀榮은 정신병으로 요양중인 혼인보 秀悅을 은거시키고 아우 土屋百三郞(三段, 26세)으로 十六世혼인보 秀元으로 세워 혼인보 秀元을 최상위에 앉히므로써 방원사에 대한 가원의 서열을 상석으로 끌어올리는 데에는 일단 성공했으나, 서열 이외에도 대국료나 계고료 등의 금전면에서의 조건이 해결되지 않아 9月의 시합을 끝으로 秀榮측의 가원은 아예 탈회했다. 이를 계기로 혼인보家, 이노우에家, 하야시家는 방원사에 관계하는 기사의 단을 박탈했다. 구습에 의한 파문이었다. 연구회로서의 방원사가 분열한 후, 방원사는 秀甫를 사장으로 하여 결사제도를 정비하고 독자로 면허 발행을 하여 자본주의 시대의 새로운 가원으로서 압도적인 지지를 얻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각 가원은 추락일도를 걷게 된다. 秀榮은 가원의 권위와 혼인보家의 명예를 위해 혁신적인 방원사를 적대하고 강경한 대처에다 과도한 적개심은 秀榮을 고립시켰다. 방원사의 융성에 반해, 다른 한편에서는 정신병으로 유폐한 형 秀悅의 일, 低段의 혼인보 秀元이 고경에 처하고 있는 일, 秀榮 자신도 양부 柏榮의 미망인 喜美子와의 관계가 나빠지는 등, 내우외환의 고충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喜美子는 하야시家의 재산을 독점하고는 산산히 낭비하여 선조의 위패와 元美의 [난가당기화]만이 분가한 林佐野에서 간신히 관리했다고 전해진다. 秀榮은 굳게 문을 닫고 와신상담(臥薪嘗膽), 권토중래(捲土重來)를 기했다. 이 고난의 기간이 훗날 일대비약의 양식으로 되었다. 1882年(明治十五) 선대 柏榮의 미망인 喜美子가 죽자, 이듬해인 1883年(明治十六)에 秀榮은 하야시家를 떠나 혼인보家로 복적한다. 1884年(明治十七) 11月, 복적해서는 아우 秀元을 은거시키고 스스로 十七世 혼인보에 취임한다. 익월부터 秀甫와의 십번기가 개시되었다. 십번기의 실현은 後藤象二郞, 井上毅, 金玉均 등 많은 지인과 우인들의 열의가 있었다. 혼인보가 되어 방원사에 나타난 秀榮에게는 그 나름의 각오가 있었다. 이 십번기는 후에 [秀甫-秀榮의 쟁기] 또는 [화해의 십번기]로 불리운다. 秀榮 33세 五段, 秀甫 47세 八段. 秀榮이 先으로 둔 것은 秀甫가 은사의 수하시절에 七段격으로 두었던 때문이다. 丈和의 삼남인 中川龜三郞을 先二로 만든 후에도 2점국은 두지않았던 秀甫였다. 제1국은 방원사 정례회의 대국으로 두어졌다. 秀甫의 실착이 있어 秀榮이 당당히 이기므로써 그의 존재를 과시했으나 제2국부터 3연패를 당하여 벼랑 끝으로 몰리게 되었다. 그후 일진일퇴의 공방이 거듭되었다 제8국을 끝으로 秀榮의 3승5패로 일단 막을 내린다. 秀榮이 진퇴에 많은 생각을 한다. 남은 2국을 연승해봐야 본전이고, 만약에 연패를 하게되면 그때는 先二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5개월을 중단한 후에 제9국이 두어졌다. 秀榮이 제9국을 이겨 치수가 떨어지는 불명예는 면했다. 다시 대국은 8개월이나 중단되었다. 秀甫의 몸에 심각한 이상이 발생한 모양이다. 십번기를 종료한 후 2개월이 지나 秀甫가 죽는다. 위궤양이라고도 위암이라고도 하고 3회의 수술을 받았다고도 한다. 秀甫의 여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주위는 秀甫에의 동정이 압도적이다. 秀榮은 혼인보를 양위하라는 사면초가(四面礎歌)에서 고뇌를 거듭한다. 드디어 조건을 붙여 혼인보 양위를 결심한다. 一, 방원사가 채용하고 있는 급제도를 단제도로 환원한다. 一, 방원사가 발행하는 면허에는 혼인보의 서명을 넣는다. 一, 혼인보 秀甫의 후계자는 실력 제1인자로 한다. 一, 금후는 혼인보가 방원사 사장을 겸한다. 요는 혼인보가 바둑계의 정점에 서서 모든 기사를 결속하고, 혼인보는 실력에 의해 결정한다는 것으로 혼인보를 내놓는 秀榮에게 사리사욕이란 조금도 없었다. 秀榮은 秀甫에게 八段을 인허하고 혼인보를 양위했다. 十八世 혼인보가 된 秀甫는 야인으로 돌아간 秀榮에게 혼인보 및 방원사의 명의로 七段으로 승진시키고 최종국을 두었는데 5승5패의 갈림으로 끝났다. 그러나, 秀甫의 급서로 다시금 후계자 문제가 일어난다. 第一局 秀甫 ×-○ 秀榮 (不計勝) 第二局 秀甫 ○-× 秀榮 (八目勝) 第三局 秀甫 ○-× 秀榮 (二目勝) 第四局 秀甫 ○-× 秀榮 (四目勝) 第五局 秀甫 ×-○ 秀榮 (三目勝) 第六局 秀甫 ○-× 秀榮 (不計勝) 第七局 秀甫 ×-○ 秀榮 (七目勝) 第八局 秀甫 ○-× 秀榮 (二目勝) 第九局 秀甫 ×-○ 秀榮 (十二目勝) 第十局 秀甫 ×-○ 秀榮 (四目勝) 방원사 사장인 혼인보 秀甫가 죽은 후, 秀榮은 후계를 결정하기 위해 中川龜三郞에 쟁기를 신청했으나 방원사 사원이나 선약된 입회인 後藤象二郞 등의 후원자는 오히려 秀榮에게 양위을 강요한다. 방원사 사장의 후계에 있어서도, 방원사를 창립하고 지금까지 秀甫를 보좌해 온 中川은 수완도 좋고 적임자로서 좋게 평가되고 있었으나, 秀榮이 혼인보가 되어 방원사 사장을 맡게되는 것은 조직의 운영에 대해 아무런 지식도 없는 秀榮이 방원사 사장을 맡는 것은 떨쳐낼 수 없는 불안이 있었다. 피을 보는듯한 쟁기의 결과로 인해 방원사가 공중 분해되는 것도 불을 보는 것보다 명확한 일이었다. 이러한 현실 여건에 대한 대타협으로, 中川은 혼인보 계승의 의지가 없는 것을 표명하고 제2대 방원사 사장의 지위에 올랐으나 혼인보가 방원사 사장을 겸한다고 약속을 한 秀榮에게는 난처한 일이 되었다. 1887年(明治十二) 8月인지 익년8月인지 秀榮이 혼인보에 다시 취임하나 1894年(明治二十七) 6月까지는 十九世가 아닌 十七世 혼인보로 통한 것은 秀甫에게 혼인보를 양위할 때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던 것에 대한 秀榮의 반발심이 있었다. 일방적으로 양위를 강요당하고, 추상열일(秋霜烈日)의 쓴잔을 마시며, 후년은 손개고루(捐介固陋), 의고지자(意固地者)로 사람을 믿을 수 없게 된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秀甫와의 십번기가 계기가 된 것처럼 이 무렵부터 秀榮의 바둑은 경이적으로 향상한다. 秀甫에게 맥없이 깨진 秀榮은 절친한 친구였던 조선의 망명지사 金玉均이 있는 小笠原島에 건너가 거기서 [1만개의 포석]을 만드는 엄격한 수행으로 바둑이 좋아진다. 대기사 秀和의 아들로서 혼인보家에서 태어난 秀榮이 가원의 추상적인 권위주의를 버리고 순수하게 실력 제1주의로 탈피하여 승부에서는 귀신으로 변하는 경이적인 실력향상이 [1만개의 포석]이라고 하는 전설을 만든 것이다. 秀甫의 죽음으로 秀榮-秀甫의 격한 애증극이 끝나고 내심 원수라고 여기던 반외의 잡념도 버리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秀榮의 경이적인 실력향상으로 그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게된 방원사는 1891年(明治二十四)경부터 秀榮의 바둑을 [위기신보]에 싣기 시작했으나 단도 급도 생략했다. 1892年(明治二十五) 혼인보家의 연수회인 [쟁기장려회]를 조직하고, 동년 8月13日에 제1회의 시합을 가졌다. 혼인보 가세의 충실을 꾀함과 동시에 방원사에 대한 대항인 것이다. 1893年(明治二十六) 방원사가 錦町에 신관을 건설하고 그 피로연에서 秀榮과 岩崎建造의 기념대국을 가졌다. [위기신보]에는 [본인방 秀榮 3급]으로 게재되었다. 분개한 秀榮이 秀甫에게 약속을 어긴 것에 강경하게 항의하여 다음 호부터 단제도로 돌아서므로써 秀榮의 발언력이 올라가게 되었다. 익년 9月의 장려회에서는 방원사의 창립사원인 小林鐵次郞도 출석했다. 이 무렵부터 秀榮의 전성시대가 시작된다. 秀榮의 명성을 흠모하여 많은 기사들이 혼인보家의 산하로 들어오고 방원사의 연구생까지도 秀榮의 슬하로 모여들었다. 방원사를 퇴사당한 田村保壽가 金玉均의 소개로 秀榮 문하가 된 것도 장려회 발회 바로 직전이었다. 한편 실무에 능한 小林鐵次郞를 잃은 방원사는 쇠퇴하고 中川 사장의 자택에 방원사 간판을 내리는 사태로 되었다. 1895年(明治二十八)에는 秀榮 전성시대의 상징적인 연구회인 [사상회]가 시작된다. 秀榮의 직접 지도를 받으려고 방원사로 부터도 많은 젊은 기사들이 출석했다. 1898年(明治三十一年) 3月, 秀榮은 八段 준명인에 오른다. 이 무렵에는 주위를 차례차례로 先二 이하로 두게 만들었고 유일하게 田村 한사람만이 先을 유지할 뿐이었다. 秀榮이 바둑계의 제1인자가 되긴 했으나 [인성이 극히 고상순박하여 빈핍했다] 라는 犬養毅의 평처럼 경제적 혜택이라곤 없었다. 토쿄인의 기질이라고도 하고, 좋게는 내박외후라고도 말하지만, 외부원조를 사절한 것은 결과적으로는 제자들에게는 부끄러운 일이었다고 했다. [예능인 근성을 없애라]고 제자들에게 말하는 명인 기질의 秀榮은 금전에 마음이 없다기 보다는 당시의 황금 만능주의에 혐오감을 가졌었던 것 같다. [사상회]도 경제적인 이유에서 휴회가 계속되고 秀榮의 대국도 감소했다. 이것을 애석하게 여긴 재정계의 한 유력자가 밀어주어 1905年(明治三十八) 8月 [일본위기회]가 조직되었다. 이때 방원사로 부터 雁金準一을 빼내어 방원사에 대타격을 주었다. 이 무렵부터 [방원사를 멸하지 않으면 죽어도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공언하면서 秀榮은 바둑계의 완전 제패를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단 한사람 先을 유지하는 田村保壽를 七段으로 승단시켜 자신의 명인(九段) 승격에 대한 포석도 마쳤다. 동년 7月과 10月에 [일본위기회]를 기념하여 田村과 최후의 승부기를 둔다. 秀榮은 불굴의 기개로 두 대국을 완승했다. 1906年(明治三十九) 6月19日, 덕천막부(德川幕府)의 명인기소와는 관계가 없는 신시대의 명인이 실현했다. 부친 秀和가 바라지도 원하지도 못했던 명인, 秀甫가 얼굴을 붉히며 거절하면서도 명인에 오른 것은 후원회에서 이미 만들어 놓은 각본이었지만, 배경에는 일로전쟁의 승리에 의한 대중 내셔날리즘이라고 하는 국민감정의 앙양, 군대에 의한 확장주의, 천황 절대주의가 자리잡고 있었다. [일본위기회]의 명칭에서도 이 시대의 영향이 잘 나타나고 있다. 죽 한그릇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던 빈궁상태에서 건강을 상한 秀榮은 명인에 오르면서부터 천식이 심화하여 익년 2月10日에 죽는다. 일명 노인성 결핵이라고도 한다. 秀榮이 후계자를 정하지 않고 죽었기 때문에 田村과 雁金간에 혼인보 계승문제가 일어났다. 秀榮이 田村을 후계자로 정하지 않은 것은 실력에서는 田村이 雁金을 상회했으나 秀榮이 田村을 미워했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누구에게도 잘난체를 하지 않는 인망과 당대 최고의 기력을 갖춘 秀榮이 아무런 의사표시도 하지 않았던 것은 혼인보가 되기 위해서는 실력으로만 이기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막부의 비호를 잃은 가원의 권위를 지키는데는 실력만으로는 안된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낀 것도 바로 秀榮 자신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