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보 秀悅, 1850年(嘉永三)-1890年(明治二十三) 秀悅은 秀和의 장남이다. 후계자 秀策의 급서로 나이 13세 三段의 秀悅이 재후계자로 된다. 이유는 후계자로 가장 유력한 후보였던 村瀨秀甫가 丈和 미망인과의 관계가 소원해서라고 했지만, 丈和의 삼남이자 당시 26세로 五段이었던 中川龜三郞의 존재를 고려하면, 土屋家의 의향이 강하게 반영되었다고 하겠다. 元丈은 丈和를 제치고 자신의 아들 丈策으로 상속을 했으나, 혼인보家에서는 아들에 대한 가독상속의 선례는 없었다. 1873年(明治六) 부친 秀和가 죽자, 그해 秀悅은 22세 六段으로 十五世 혼인보를 상속한다. 明治十二年, 신유신의 혼란으로 바둑계 피폐의 혹독한 환경에서 타고난 병약한 체질에다 스트레스까지 겹쳐 결국은 정신이상을 일으키고 은퇴한다. 혼인보家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秀和의 차남이자 林家의 당주로 있던 秀榮이 핀치 히터로 村瀨秀甫를 영입하였으나, 영입한 村瀨秀甫와 中川龜三郞간의 불화로 자신의 아우 百三郞(秀和의 삼남)을 十六世 혼인보 秀元으로 세운다. 秀悅은 爾來門에 유폐된 채 바깥을 나오는 일 없이 41세에 죽었다. 秀甫는 말하기를 [왕후는 씨가 있다고 했다. 秀悅의 바둑이 바로 秀和의 유전이라고 한다면 혼인보家의 자식으로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고 평할 정도로 기재(碁才)가 출중했다. 秀甫는 秀和의 애제자로서 기력으로 말하면 秀和에게 선으로는 거의 지지않았고 백을 잡고도 아슬아슬한 승부로 이끌었다. 당시 秀和가 전 바둑계를 先, 先二 이하로 만든 점을 감안하면 秀甫의 실력 또한 이에 못지 않았다고 하겠다. 十五世를 秀甫가 잇고 바둑계를 챙겼더라면 그간의 불행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秀悅-秀甫의 대국기보는 2국이 남아 있다. 秀和, 秀策, 秀甫의 三秀를 토꾜(東京) 바둑의 꽃이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