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보 秀和, 1820年(文政三)-1873年(明治六) 伊豆國 若澤郡(田方郡) 西豆村(土肥町) 小下田에서 태어나다. 성은 土屋, 이름은 俊平, 나중에는 恒太郞이라 했다. 十三세 삭발하면서 秀和로 개명하다. 명인(九段)의 기량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명인이 되지는 못했다. 秀和는 元丈, 知得, 幻庵과 더불어 바둑四哲로 불리운다. 俊平이 9세 때, 부친과 함께 三島 明神祭禮에 갔다가 沼津의 万屋의 12세 소년에게 4점을 놓고 졌다. 아바지는 그대로 아들을 토쿄로 데려나가 丈和에게 맡겨놓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가족들은 아무도 이 사실을 몰랐다. 俊平 혼자서 토쿄에서 되돌아오는 도중에 万屋의 소년과 재대결하여 호선으로 만들었다. 아버지는 가족들을 설득하여 俊平을 다시 丈和에게 맡겼다고 한다. 이때 이름을 恒太郞으로 바꾸었다. 13세에는 삭발하고 秀和라 했다. 秀和 19세에 六段으로 승단했을 때는 혼인보家에서 이미 제1인자가 되어 있었다. 1838年(天保九) 명인을 반납한 丈和는 익년 1月에 秀和와 대국을 한다. 先二 先番을 秀和가 3집을 이기자 동년 3月에는 秀和와 幻庵의 첫 대국을 주선한다. 丈和는 두 대국에서 秀和의 장족의 발전을 보고 안도했다고 한다. 동년 11月에 丈和가 은퇴하고 丈策이 가독(家督)을 상속받는다. 그 익년 1840年(天保十一) 5月에는 秀和가 후계자로 되고 七段으로 승진한다. 丈和가 은퇴하자 幻庵因碩은 명인기소의 출원을 제출한다. 이에 丈策은 즉각 이의를 신청하고 쟁기의 상대로 秀和를 지명한다. 幻庵 측에서는 쟁기의 상대가 당주 丈策이 아닌 후계자 秀和인 것에 난색을 표시한다. 이에 寺社奉行은 전의(詮議)를 소집한다. 1840年(天保十一) 11月1日, 丈和와의 두번째 대국에서는 秀和가 완패한다. 이 대국에서는 秀和가 약기(弱氣)로 되어있으나 丈和로 부터 질책과 격려를 받았다고 한다. 동년 17日의 어성기 첫 출사에서는 坂口仙得을 맞아 백으로 1집승을 거두어 밝은 내일을 약속받았다. 등성 전일, 寺社奉行 稻葉丹後守邸에 호출되어, 老中 水野越前 守忠邦의 명으로 2주 후 幻庵과의 4번기 쟁기를 하명받는다. 어흑서원은 仙得과 한참 바둑을 배우는 秀和와 바둑달인의 幻庵이 동석하여 무겁고 긴장된 공기가 충만했다. 因碩 43세, 秀和 20세. 제1국은 11月29日부터 12月13日까지 8일7야에 걸쳐 두어졌다. 결과는 秀和가 흑으로 4집승을 했다. 이 대국으로 건강에 자신을 잃은 因碩은 출원을 취하했으나, 2년 후 天保 13年의 재대국에서도 다시 秀和가 흑으로 6집승을 하고, 다시 반년을 지난 11月의 어호기(御好碁)에서도 秀和가 흑으로 4집승을 거두므로써, 幻庵의 대망은 완전히 꺾이고 말았다. 1848年(嘉永元)三月, 十四世 혼인보를 계승한 秀和는 11月에 秀策을 후계자로 세운다. 2년전 秀策은 향리 因島에서 토쿄로 오는 도중 오사카(大阪)에서 幻庵과 대국하여 先으로 전승하였다. 1846年(弘化三) 10月부터 익년 9月까지 秀策과 집중적으로 17번기 대국이 있었는데, 동문간의 친선바둑(稽古碁)이라고는 하지만 결과는 秀策의 정선으로 13승4패였다. 백으로 겨우 4번을 이긴 秀和는 이 무렵에 이미 고담(枯淡) 지경에 들어가고 있었다. 1849年(嘉永二)부터는 주최측의 의뢰로 秀和-秀策 최후의 4국이 있었다. 이 대국은 토쿄 바둑사의 총결산이라고 전해진다. 1850年(嘉永三), 秀和는 30세에 준명인 八段으로 승진하고 명인기소를 눈앞에 둔다. 伊藤松和, 坂口仙得, 太田雄三, 安井算知의 천보4걸(天保四傑)을 비롯한 만천하를 先相先 이하로 만든 秀和의 실력이라면 그의 발언력, 정치력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1859年(安政六), 秀和 40세, 幻庵因碩이 죽자 秀和는 명인기소를 출원한다. 秀和의 입장으로는 만난을 헤치고 기소 출원을 한 것이지만, 그리고 松本因碩의 고장으로 기소 허가는 불가한 것으로 보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막부 말기의 세정불안에 대해 너무도 소홀했던 것이 더 큰 문제였다. 흑선(黑船)의 래항, 막부 내의 일교파와 남기파간의 대립, 안정의 대옥, 櫻田門外의 변 등, 외환내우의 막부로서는 명인기소는 안중에도 없었다. 因碩이 당주로 있던 老中 久世大和守에 비밀리에 손을 썼다고도 전해지나, 객관적으로 보아서도 秀和의 기소 취임은 불가능이었다. 1861年(文久元), 최후의 어성기가 된 松本因碩과의 대국은 秀和가 백으로 1집을 지긴 했으나 백의 추월에는 단 한수의 틀림도 없었다고 한다. 幻庵의 신이 강림했다고도 전해진다. 도중 松和가 근심하여 손을 씻고 있던 秀和에게 말을 걸었으나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답도 없었다고 한다. 幻庵의 야망을 주저앉힌 당시 자신이 우두머리였기 때문일까? 천보내홍(天保內訌)의 인과가 秀和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1862年(文久二) 8月, 당시 유행하던 콜레라에 감염된 후계자 秀策이 34세로 급서하자 秀和는 비탄의 연못으로 빠져든다. 익년, 秀和는 秀策과 나란히 혼인보家의 용호로 일컬어지던 秀甫(二十五세, 六段)에 대한 자신의 묵계 사실을 무시하고 당시 14세 三段이던 아들 秀悅을 후계자로 내세운다. 이유는 명인 丈和의 후처 勢子가 秀甫를 미워했기 때문이라 했다. 秀和의 차남 平次郞은 秀策가 죽은 해에 林門入(十二世)의 양자가 되고 秀榮으로 개명한다. 秀和가 丈和 미망인에 원려가 있었음은 명인 丈和의 후광이 아직 쇄하지 않았다는 사실임을 입증한다. 丈和가 스승 元丈의 아들 丈策을 후계자로 한 것 같이 丈策의 후계자는 丈和의 아들 道和(節山因碩)로 하는 것은 이미 정해진 노선이었다. 혈연관계도 아닌 秀和가 후계자로 되었을 때는 무언가 은혜를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막부말기의 정세불안 중에 丈和-丈策의 유족과 土屋家가 혼인보家의 재산을 사물화한 때문에 혼인보家의 가독이 秀甫에게 넘어가는 것을 못마땅해 했다. 그렇다고 아직 유년의 아들에게 가독을 넘긴 것은 秀和의 생애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이 되었고, 秀悅, 秀元, 秀策에도 큰 부담을 앉겨주었다. 한편, 坊家의 본류에서 초야로 방출된 秀甫가 中川龜三郞(당시 26세 五段) 등과 함께 家元이라고 하는 봉건적 체제를 타파하고 신시대의 기초를 쌓은 것은 결과적으로는 당주 秀和의 우유부단이 도움이 되었다고 하니, 역사의 아이로니를 새삼 느끼게 한다. 혼인보家는 고래부터 승적으로 정시긔 대처는 허용되지 않았다. 장자 秀悅의 후계자 원에서는 아버지를 葛野忠左衛門, 어머니를 후지, 본국은 伊豆, 출생국은 武藏으로 계출한 것은 고례에 따른 것이라고는 하나 葛野忠左衛門와 丈和의 장자(十二世因碩節山)와는 전혀 남남으로 그 아우는 二代 葛野忠左衛門이다. 秀和의 아들 秀悅은 명인 丈和의 친척과는 무관하다. 명치유신은 막부로 부터 녹을 받고 있던 가원4가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다. 秀和는 저택을 대가해야 했고, 대가받은 집에서 일어난 화재로 저택이 전소되고, 타고 남은 창고에 판자를 덮어 이슬을 피할 수 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다. 伊藤松和와 坊家門人들이 저택을 건조하자고 했으나, 자신의 실화로 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자신만 편하자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축했다. 그후 , 혼인보家의 가녹(家祿)은 五十石에서 十三石으로 줄어들고, 明治四年에는 가녹(家祿)의 상환으로 경제적 기반은 일순에 소멸했다. 그 같은 와중에서도 [3일회]를 조직하여 연구와 후진의 지도에 게으름은 없었다. [3일회]는 경제적인 압박이 너무 심하여 수년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은 秀悅, 秀榮, 中川龜三郞, 安井算英, 小林鐵次郞, 吉田半十郞 등이 이끄는 [6인회]에 흡수된다. 1871年(明治四), 죽기 2년전 秀和는 가장 아끼던 제자 秀甫와 先相先 8번국을 둔다. 秀甫는 흑으로 5승1패를 했는데 그중 흑번 1패는 秀甫 득의의 실착 때문이었고, 천하의 秀和라 해도 秀甫의 先을 이길 수는 없었다. 반면에 秀和의 흑번 2국은 어느 것이나 개수일촉(鎧袖一觸)의 위기감을 주고 있다. 제자에게 백을 쥐게 한 것은 이 2국뿐이나 秀甫는 秀和의 기사인생 최대의 유산이었다. 秀和는 雄三, 算知같은 미남도 아니고, 소남으로 풍채도 뛰어나지 않았고, 교양 학식도 丈策에 못미치고, 서예도 능필가 秀策에 비교도 되지않는다. 그러나 천성이 순하고, 외식이 없는, 대인아사(大人雅士)의 풍이었다고 한다. 秀和가 남긴 기보는 600국이 넘는다. 雄藏 139局, 算知 136局, 松和 40局, 仙得 20局 등 천보4걸(天保四傑)과 각축한 기보는 토쿄 바둑사의 총결산으로 인정받고 있다. 秀和, 秀策, 秀甫의 三秀가 남긴 기보는 근대바둑을 싹트게 했고 道策, 秀和, 吳淸源은 바둑사의 절정을 이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