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보 道悅, 1636年(寬永十三)-1727年(享保十二) 伊勢國 松坂, 또는 石見國태생, 본성은 丹羽. 算悅이 죽은 1658年(万治元), 22세로 三世 혼인보가 되다. 미리 후계자로 지정되어 있지않아 사후에 상속한 것으로 생각된다. 동년, 어성기에 첫 출사하여 安井算哲(澁川春海)에 백으로 4집을 지다. 어성기 11국의 성적은 5승4패2무. 이 시대는 어성기도 정비되지않아 남아있지 않은 빠진 기록이나 기보도 있다. 算哲과의 대국에서는 도책류에 의한 의욕적인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算哲과는호선으로 2승2패1무. 1662年(寬文二) 10月13日, 바둑기사가 寺社奉行 소속으로 되고, 2년후에는 어성기가 성내의 항례행사로 정해졌다. 이것을 기회로 가원4가를 중심으로 가원제도는 급속히 정비되었다. 1668年(寬文八), 어성기 2일전인 10月18日, 관명에 의해 安井算知가 명인기소를 명받았다. 道悅은 [유배도 불사한다]며 쟁기를 원했으므로, 년 20번기씩 60번기가 시작되었다. 算知 41세, 道悅 33세. 寬文八年에는 양자의 인사차 제1국을 무승부로 하고 익년의 제2국부터 본격적인 쟁기가 시작되었다. 寬文九年에 11국, 寬文十年에 4국을 두었는데, 道悅이 4국을 연승으로 정선에서 선호선으로 치수를 고치다. 제13국 이후 연승한 것은 제자인 道策의 영향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치수가 고쳐지면 년1회 어성기로 둔다. 道悅의 3승1패, 算知가 환력을 맞이한 때에 20국이 두어졌다. 익년 1676年(延寶四)에 算知는 기소를 반납하고 은퇴한다. 算知-道悅의 쟁기 (6승 또는 4연승에서 치수를 고침) 第 一 局 寬文八年 △算知 무승부 道悅△ 道悅 선 第 二 局 寬文九年 ×算知 5집승 道悅○ 〃 第 三 局 寬文九年 △算知 무승부 道悅△ 〃 第 四 局 寬文九年 △算知 무승부 道悅△ 〃 第 五 局 寬文九年 ×算知 5집승 道悅○ 〃 第 六 局 寬文九年 ○算知 4집승 道悅× 〃 第 七 局 寬文九年 ×算知 2집승 道悅○ 〃 第 八 局 寬文九年 ×算知 5집승 道悅○ 〃 第 九 局 寬文九年 △算知 무승부 道悅△ 〃 第 十 局 寬文九年 ×算知 3집승 道悅○ 〃 第十一局 寬文九年 ○算知 9집승 道悅× 〃 第十二局 寬文九年 ○算知 4집승 道悅× 〃 第十三局 寬文十年 ×算知 불계승 道悅○ 〃 第十四局 寬文十年 ×算知 6집승 道悅○ 〃 第十五局 寬文十年 ×算知 12집승 道悅○ 〃 第十六局 寬文十年 ×算知 1집승 道悅○ 〃 道悅이 四연승하여 치수를 정선에서 선호선으로 고치다. 第十七局 寬文十一年 ×算知 9집승 道悅○ 道悅 선 第十八局 寬文十二年 ×算知 6집승 道悅○ 道悅 선 第十九局 延寶元年 ○算知 3집승 道悅× 道悅 백 第二十局 延寶三年 ×算知 13집승 道悅○ 道悅 선 익년에는 道悅도 공의의 결정에 이의를 단 것을 이유로 은퇴원을 내다. 동시에1667年(寬文七)부터 어성기에 출사했다. 후계자 道策의 가독상속 및 기소승인을 출원하다. 1678年(延寶六) 12月20日, 道悅의 은퇴원이 들어져, 道策이 四世 혼인보가 됨과 동시에 명인기소의 내명을 받았다.. 단, 道悅도 算知와 함께 입회인으로서 출사를 명받았다. 쟁기 중 1674年(延寶二)에는 융성의 극을 달리는 安井家에 대항하여, 혼인보家의 세력증진에 힘썼다. 道策의 아우 道砂를 古因碩의 후계로 삼아 三世 井上因碩을 탄생시키다. 道策의 후계자 승인 등, 이 무렵부터 가원세습제가 확립되었다. 1686年(貞享三) 50세에 주거료를 반납하고 쿄토에 거하면서 92세의 장수를 누렸다. 1727年(享保十二) 2月4日에 죽다. 道悅은 바둑판의 규격을 총높이 7치8푼, 두께 3치9푼, 길이 1자4치5푼, 폭 1자3치5푼, 모서리는 3부로 정했다. 혼인보의 대국시 복장도 개량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