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보算悅 1611年(慶長十六)-1658年(万治元) 쿄토출생, 본성은 杉村. 本因坊算砂의 아들로 전해진다. 算砂가 운명하자 中村道硯의 후견을 받다. 7년 후 1630年(寬永七) 20세 때, 막부에 신규로 임명되어 三十石 五人扶持를 하사받다. 道硯의 유언에 따라 上手(七段)에 승진하고 혼인보의 이름을 이어받다. 二世혼인보의 출현으로 安井算哲가 제자인 算知를 양자한 것처럼 가원세습제의 기초를 확립시켰다. 道硯이 죽고 10년간 명인이 공석이었다. 1640年(寬永十七)경에 장군 家光의 지시로 기소회의가 열리고, 安井算哲(당시50세), 本因坊算悅(29세), 井上因碩(35세)이 소출되었다. 그때 장로격으로 기격이 준명인(八段)인 算哲은 스스로 물러났고, 道硯 문하의 형제 제자였던 算悅과 因碩은 쟁기를 해서라도 명인을 희망했다. 이로써 算哲의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1653年(正保二), 돌연 算知와의 쟁기가 시작된다. 그 경위에 대해서는 불명한 점이 많다. 실제로 쟁기였는지도 확실하지 않으나, 算悅-算知戰은 명인기소의 자리를 건 사상 초유의 쟁기로 전해진다. 전국이 어성기로 두어졌고, 1년에 1국, 9년에 걸쳐 3승3패의 성적으로 끝나 명인기소는 결정되지 않았다. 제5국과 최종국 간에 4년의 중단이 있었는 것은 장군 家光의 죽음과 由井正雪의 난이 있었던 때문이다. 쟁기 5년 후 算悅의 나이 47세로 죽다. 第一局 正保二年(1645) ×算悅 黑不計勝 ○算知 第二局 正保三年(1646) ○算悅 黑九目勝 ×算知 第三局 正保四年(1647) ×算悅 黑六目勝 ○算知 第四局 慶安元年(1648) ○算悅 黑11目勝 ×算知 第五局 慶安二年(1649) ×算悅 黑11目勝 ○算知 第六局 承應二年(1653) ○算悅 黑六目勝 ×算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