林元美, 1778年(安永七)-1861年(文久元) 水戶에서 태어나다. 본성은 舟橋, 어릴적 이름은 源治 또는 寬度. 부친은 水戶藩士, 집은 神路町에 있었다. 호는 爛柯堂 또는 藍搜라 한다. 최종기격은 준명인(八段). 林家十三代 중에서 가장 걸출한 인물로서 [爛柯堂某話],[碁經衆妙],[碁經精妙]등 많은 명저를 남긴 바둑계 최고의 학식가였다. 1786年(天明六), 9세에 근방 절의 승려에게 바둑을 배우다. 11세 때, 부친이 토쿄에 근무할 적에 十世本因坊 烈元에 바둑을 보이고는 일단 귀가한 후 그해 12月에 입문하여 初段을 허가받다. [水戶小僧]라고도 불리운다. 1806年(享和二), 25세에 五段. 쿄토에서 유학할 때 쿄토 聖護院의 유학자 鼻中哲齊에 체제하던 중 그의 딸 季野子와 결혼하다. 토쿄에 돌아오자 林家 후계자 일도 일이려니와 스승집(師家)에 무단히 결혼한 것에 스승 烈元( 또는 후계자 元丈)이 대노하여 견책했다. 坊家에서느 8년 연소의 奧貫智策, 葛野丈和와 함께 元美를 계승자 후보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元美는 侍(사무라이)의 신분으로 학문에 뜻을 두고, 글을 좋아하는 성질이 강하고 바둑에 대한 승부사 근성은 약했던 모양이다. 元丈보다 3년 연소의 元美는 자신은 혼인보家의 주류가 아님을 자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젊어서부터 저술, 출판에 흥미가 있어, 와판이라 불리우는 기보의 목판도 만들고, 등사한 어성기 기보를 동호인들에게 배포하곤 했다. 1817年(文化十四), 이를 아들이 고생한다고 본 의부 鼻中哲齊가 애석히 여겨 어성기 50국을 수집하여 [당세기보]를 출판한 적이 있었는데, 安井知得은 가원이 비밀로 하는 어성기 기보를 무단히 게재한 것은 권리침해라 하여 가원4가가 연명하여 寺社奉行에 소장을 내므로써, 哲齊는 지적재산권(IPR) 침해로 걸리게 되었다. 이때 元美는 船橋 성을 따르고 있었으므로, 가원회의에는 출석할 자격이 없었으나, 元丈과 각 가원을 설득하느라 분주하게 뛰었다. 설득이 효과가 있어인지 哲齊를 3일만에 방면할 수가 있었다. 이 사건으로 가원측의 바둑책 출판의 통제가 완화되었다. 哲齊도 2년후에는 [4가평정 명세기감]을 출판하는 등 文政, 天保의 성황을 가져오는데 일익을 한다. 1819年(文政二) 2月29日, 林家十世 鐵元門入이 죽자, 元美가 林家를 계승하여 十一世 林元美가 되다. 元美 42세. 元美를 후계자로 한 것은 門悅(文化十 또는 文化十三年 사망) 재임중에 결정된 일이나, 鐵元이 죽은 후에 元美가 후계자를 상속하는 것이 불분명했던지 元美와 水戶家의 관계에 元丈이 배려했다고 한다. 이 해에 元美는 元丈의 후계자 丈和, 井上安節(玄庵因碩), 服部雄節 등과 함께 어성기에 첫 출사(初出仕)한다. 이후 12국의 기보를 남겼다. 현역에서 10국, 은거후에 2국이다. 대국이 적었던 것은 연령적인 문제이거나, 丈和의 기소 취임에 연관된 문제로 보인다. 文政十二年 10月, 玄庵因碩와 함께 上手(七段)로 승격한다. 1831年(天保二), 돌연 本因坊丈和가 명인기소에 취임한다. 丈和의 기소 취임은 水戶出身의 元美가 八段 준명인의 승단을 조건으로, 당시 寺社奉行 담당이 水戶家에서 양자로 들어온 土屋相模守彦直였으므로, 이를 통해 水戶에 은거하는 翡翠공(水戶家 9대 德川齊昭)을 움직여 이루어진 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丈和는 元美를 승단시키지 않았다. 이것이 노공을 속인 결과로 되었고, 元美를 궁지에 몰아넣은 결과가 되었다. 이에 대해 [좌은담총]은 기록하기를 翡翠공이 元美에게 그래도 남자라고 생각했더니,,, 하면서 자신을 속였다고 대노하는지라,,, 水戶屋敷에서는 侍(사무라이)가 위약하면 스스로 죽어야 마땅하거늘 노인에게 상성하고도 목숨은 아까운 모양이지... 하는지라, 이에 元美는 혹은 탄식하고, 혹은 울고, 혹은 丈和의 무정냉혹를 원망하며, 언젠가 복수할 것이라고 간담을 쥐어짜니, 그 모습을 보기가 심히 안타까웠다... 라고 했다. 1838年(天保九), 八世安井仙知(知得)이 중병으로 누워서는, 아들인 후계자 俊哲의 七段 승진을 명인 丈和가 인정했다고 말하자, 八段 승진을 고대하고 있던 元美는 寺社奉行에게 丈和의 기소 취임에 대한 진상을 밝히고, 이제껏 적이었던 因碩을 첨원인으로 세워 20번기 쟁기를 출원한다. 丈和51세, 元美는 환력을 맞고 있었다. 仙知(知得), 因碩(玄庵)에 이어 세번째의 쟁기를 출원받은 丈和는 이윽고 은퇴를 결심한다. 丈和가 은퇴하던 해 10月, 丈和가 元美의 정선 쟁기를 피하므로, 명인에 先相先의 치수로 八段의 자격이 있다 하고, 因碩의 양해하에 寺社奉行에 八段 승진의 각서을 제출하고, 스스로 八段으로 승진했다. 丈和를 은퇴하게 한 것 만으로는 翡翠공에게 보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丈和를 대신해서 十三世本因坊가 된 丈策은 전년 七段 승진의 은혜를 입은 九世安井算知와 함께 元美가 八段으로 상당하지 않음을 소원했으나 寺社奉行로 부터 정식 회답은 없었다. 얼마지나지 않아 丈和, 丈策이 차례로 죽는다. 元美 스스로 나무랄데 없는 실력이라고 칭찬하던 秀和가 八段 준명인으로 바둑계의 제일인자가 되다. 1849年(嘉永二), 아들 柏榮에게 가독(家督)을 넘기고 은퇴하다. 元美가 정식으로 八段으로 승인된 것은 3년 후 嘉永五年으로 75세 때였다. 익년 丈和-丈策의 7주기를 치룬 혼인보家의 조치이다. 은거의 몸으로 정규의 어성기에 출사하여 八段 준명인 秀和에게 백으로 대국하다. 어호기(御好碁)에서는 아들인 柏榮의 좌하(座下)면서도 十三世井上因碩 (松本錦四郞)에게는 2점을 놓게 한다. 재명의 翡翠공에게도 만족스런 보고가 되었다. 9년후 文久元年 6月13日, 84세로 생애를 마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