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사(圍棋史) →인물사 →연대기 →문헌자료 →바둑보감 →바둑병법36계 |
I. 바둑의 기원(The Origin of Baduk) 바둑의 기원으로는, 주역(周易) 하도락서(河圖洛書=圖書,책)의 음양설(陰陽說)에서 나왔다는 하도락서설(河圖洛書說), 천체관측과 하늘의 별자리를 표시하던 도구가 발전되어 오늘날의 바둑이 되었다는 천체도구설(天體道具說), 요순(堯舜)시대의 요(堯)임금이 어리석은 아들 단주(丹朱)를 가르치기 위해 만들었다는 요조위기설(堯造圍棋說)이 있는데 그중 요조위기설이 가장 정설(定說)로 인정받고 있다. 요조위기설은 기원전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에 나온 세본(世本)를 위시하여, 진(晉)나라의 장화(張華)가 쓴 박물지(博物志), 하법성(何法盛)이 쓴 진중흥서(晉中興書) 등 많은 중국의 위기사서(圍棋史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래 한문은 세본(世本)의 기록이다. 요(堯)임금이 산의(散宜)을 처로 맞아 단주(丹朱)를 나았는데 장성한 후에도 우매하여 선인 포이(蒲伊)에게 바둑을 배워 아들을 가르쳤다는 내용이다. 堯造圍棋 丹朱善之. 話說上古仁君帝堯, 娶妻散宜氏, 生下兒子丹朱. 丹朱雖然是聖人之子, 自小性情乖戾, 長大後又嗜好遊玩, 不務正業. 堯帝爲丹朱擔心不已, 遂 往覓 (仙人)蒲伊. 至汾水之濱, 見二人對坐蒼檜下, 劃沙爲道, 以黑白小石子行列如陣圖... 以下省略 II. 바둑의 발전(Progress of Baduk) 요조위기설(堯造圍棋說)에 따르면, 바둑은 지금부터 4,300년전인 BC2300년에 고대중국의 요(堯)임금에 의해 세상에 출현했다. 이후 우리나라에는 한사군(BC108-AD313)이 설치되면서 한인(漢人)들의 왕래로 자연스럽게 전래되었다고 본다. 일각에서는 기자조선(BC323-BC194) 시대부터 바둑이 두어졌다는 설도 있으나, 일반적인 정설로는 서기 150년경 우리나라에 바둑이 전래되고, 서기 800년경 백제문화가 일본에 전파될 때 바둑도 함께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본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고구려의 바둑 국수(國手)인 기승(棋僧) 도림(道琳)에 관한 바둑이야기와 신라 제34대 효성왕 때의 나(羅)-당(唐) 바둑 교류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효성왕과 신충에 얽힌 바둑 이야기가 실려있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보는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金玉均)이 일본 망명시절인 1886년 일본의 혼인보 슈에이(秀榮)와 두었던 6점 접바둑이다. 이 기보도 우리나라가 아닌 일본에서 바둑서지가(書誌家) 안영이가 1992년에 발견한 것이다. 한국바둑의 역사는 일본보다 훨씬 오래지만 문서화에 소홀했던 탓에 오래된 기보가 남아있지 못한 점은 중세 때부터 바둑사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 일본의 경우와 비교할 때 매우 아쉬운 일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世界最古의 실전기보는 서기 196년에 오(吳)나라의 장수 손책(孫策)과 막관 여범(呂範)이 두었다는 대국기보로 서기 1100년대 초 북송(北宋) 말기에 편찬된 중국의 바둑고전 망우청락집(忘憂淸樂集)에 실려 있다. 당(唐)-송(宋)시대에는 바둑이 상당히 융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孫策-呂範의 대국기보는 43수까지가 전해지나, 이 기보는 忘憂淸樂集의 저자 이일민(李逸民)의 위작(僞作)이라는 설이 있다. → 孫策-呂範의 대국기보 현대바둑 바둑이 중국에서 한국으로 다시 일본에 전파된 후에도 오랫동안 상류층 사이에서만 두어지다가 본격적으로 게임의 토대를 갖추게 된 것은 중세 일본의 막부(幕府)시대에 들어와서다. 막부(幕府)는 바둑계를 관장하는 기소(碁所)를 운영하며 국가적 차원에서 바둑을 육성시킨다. 바둑을 전업(專業)으로 하는 전문기사와 본인방가(本因坊家), 정상가(井上家), 안정가(安井家), 임가(林家) 등의 바둑가원(家元)이 생겨나고, 단(段)의 관리와 기록의 보존, 룰의 정비, 각종 이론, 정석이 태어나는 등 비로소 프로 체계의 틀을 갖추게 된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바둑협회가 가원(家元)을 대체하고 바둑의 대중화와 각종 기전(棋戰)을 주관한다. 초기에는 신문사들이 기전의 주 스폰서였으나, 근래에는 많은 대기업들이 스폰서를 자청한다. 바둑은 세계적으로 최다의 대중을 사로잡는 가장 인기있는 게임이자 두뇌스포츠이다. → Bonaza3000 바둑현대사 III. 바둑사 요지(Summary of History) 바둑의 出現...BC 2300년 요순(堯舜)시대에 바둑이 처음으로 세상에 출현하다. 爛柯의 전설...BC 221년 진(秦)나라 때 신선놀음과 바둑에 대한 난가(爛柯)의 전설이 나오다. 最古의 棋譜...AD 196년에 둔 孫策-呂範의 대국기보가 가장 오래된 기보로 전해진다. 棋待詔...중국은 당나라 때부터 기대소(棋待詔)라고 하는 전문기사제도를 관직으로 운영했다. 그러나 棋待詔는 임금의 바둑상대가 주된 임무로 되어 있었으므로 국가적인 바둑의 발전을 가져오지는 못했다. 당(唐)나라의 왕적신(王積薪), 송(宋)나라의 유중보(劉仲甫)가 손꼽히는 대표적인 기대소(棋待詔) 이다. 碁所...日本의 중세시대에 막부(幕府)가 운영한 제도이다. 바둑의 사대가원(四大家元)이 기소(碁所)를 차지하기 위해 피나는 투쟁을 벌렸다. 기소(碁所) 제도는 1578-1923년간 약 350년 동안 운영되었고, 그 결과 청(淸)나라 시대에 들어와서는 일본의 四, 五段이 중국의 국수(國手)를 능가하는 획기적인 실력향상을 가져오게 되었다. 世界化...20세기에 들어오면서 일본은 바둑을 전세계에 보급하기 시작한다. 지금은 세계 80여 국가에서 바둑이 두뇌스포츠로 각광을 받고 있다. 드디어 바둑의 글로벌화가 시작된 것이다. 堯舜바둑설에 대한 小考 어리석은 아들에게 어떻게 바둑을 가르치느냐며 요순(堯舜)의 바둑설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둑의 출현년대에 의문을 갖는 건 좋지만, 바둑이 어렵다는 이유로 바둑의 출현을 부인함은 비논리적이다. 그리고, 바둑이 어렵다고 보는 것은 다분히 주관적인 생각이다. 바둑을 배우기는 기실 장기를 배우기 보다 더 쉽다. 장기는 조각의 이름과 글자 그리고 가는 길을 익혀야 하지만 바둑은 이름도 글자도 길도 익힐 필요가 없다. 아무데나 놓고 싶은데 놓으면 그만이다. 바둑을 즐기는데는 꼰두기 만큼이나 배우기가 쉽다... 요순(堯舜)이 아들을 프로기사로 키우려고 바둑을 가르쳤다고 생각하는가? 바둑을 프로기사처럼 잘 두려면 그거야 말로 배우기가 하늘에 오르는 만큼이나 어렵다. 그래서 바둑은 초보에서 프로까지의 기술 차이가 다른 어떤 게임보다도 크고 기술의 완성도가 높다. 그런 만큼 바둑은 도전할 만한 가치가 큰 게임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이다. 幸田露伴의 圍碁小史 중국의 박물지(博物志)는 BC2300년에 요(堯)가 바둑을 만들어 단주(丹朱)를 가르쳤다 전한다. 바둑이 만들어져도 그렇게 일찍부터 만들어졌겠느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논어(論語)에서 박혁(博奕)이라는 말이 나오고, 맹자(孟子)에는 혁추(奕秋)의 사(事)가 있고, 좌전(左傳)에는 태숙문자군(太叔文子君)의 혁(奕)이 나오는 등 바둑을 가르키는 奕(혁)을 문헌에서 많이 접한다. 혁추(奕秋)의 事를 보면 당시의 奕道(바둑)가 높은 수준으로 발달하였음을 관찰할 수도 있다. 이런 사실(史實)을 종합하면 혁(奕)은 최소한 주(周)나라 (BC1122) 이전에 나왔음을 알 수 있다. 바둑을 가르키는 이름도 다양했다. 송(宋)나라 유의경(劉義慶)이 저술한 세설신어(世說新語)에 나오는 바둑(奕)관련의 기록을 보면 왕중랑(王中郞)은 바둑을 좌은(座隱)이라 했고, 지도림(支道林)은 수담(手談)이라 했으며, 원(袁)은 위(圍)라 했고, 은(殷)나라의 은중감(殷仲堪)은 바둑을 역의(易義)의 문답이라 하여 응답류(應答流)라 했다. 후한(後漢)의 반고(班固)는 혁지론(奕旨論)을 지었고 같은 후한(後漢)의 마융(馬融)은 위기부(圍碁賦)를 지었다. 위(魏)나라의 감단순(邯鄲淳)은 예경(藝經)에서 기력을 구별하는 위기구품(圍棋九品)을 거론하고 있으며, 위(魏)나라의 응장(應場)은 혁내병법(奕乃兵法)의 혁세(奕勢)를 지었고 양(梁)나라의 심약(沈約)은 기품서(棋品序)를 저술하였다. 당(唐)나라의 왕적신(王積薪)은 위기십결(圍棋十訣), 북송(北宋)의 유중보(劉仲甫)는 기결(棋訣), 남송(南宋)의 안천장원(晏天章元)은 기경(棋經)을 지었다. 명(明)의 왕치등(王穉登)은 혁사(奕史) 1권을 저작하고, 임응룡(林應龍)은 적정록(適情錄) 20권을 편찬했다. 일본(日本)의 승려 허중(虛中)은 혁보(奕譜) 384보(譜)를 만들고 기경(棋經) 13편을 지었다. 幸田露伴(1867-1947)은 일본고유의 정신풍토를 그린 일본의 낭만적 작가이다. 史書,文獻上의 바둑사 중국의 여러 위기사서(圍棋史書)에는 요순조기설(堯舜造棋說)이 여기저기에 실려져 있다. 기원전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에 나온 세본(世本)에는 요(堯)가 단주(丹朱)를 가르치기 위해 바둑을 만들었다는 堯造圍棋丹朱善之의 글이 실려 있고, 진(晉)나라의 장화(張華)가 저술한 박물지(博物志)에는 堯造圍棋丹朱善之, 堯造圍棋以敎子丹朱, 舜以子商均愚 故作圍棋以敎之 등의 글이 있으며, 하법성(何法盛)이 쓴 진중흥서(晉中興書)에도 요순(堯舜)이 우매한 아들에게 바둑을 가르쳤다는 堯舜以敎愚子也의 글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에 이미 바둑이 성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통역사서인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고구려의 바둑 국수(國手)인 기승(棋僧) 도림(道琳)에 관한 바둑이야기와 신라 제34대 효성왕 때의 나(羅)-당(唐) 바둑 교류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효성왕과 신충에 얽힌 바둑 이야기가 실려있다. 그리고 중국의 사서(史書)인 구당서(舊唐書) 와 후주서(後周書) 에는 고구려와 백제에서 바둑과 투호(投壺) 등의 유희를 즐겨하는 풍습이 있다는 기록이 보인다. 우리나라의 역대 석학 문장대가들 중에는, 바둑을 풍류로 즐기고 시문으로 읊은 분들이 많았다. 신라 말의 최치원을 비롯하여 고려 때 박인량, 이규보, 우탁, 이곡, 이색, 정몽주, 권근, 이숭인, 근세 조선의 신숙주, 서거정, 김시습, 김종직, 성현, 류성룡, 이순신, 이덕형, 허균, 최석정, 김창업, 김정희, 정약용, 김천택, 조인영, 김옥균, 이상설 등 역대 명류(名流)들이 바둑을 담론하고 시문으로 읊어 남기고 있어 바둑의 역사성과 향취를 더하게 한다. 바둑은 그의 유구한 역사 만큼이나 불려지는 별칭도 많다. 난가(爛柯)의 전설에서는 "신선놀음(바둑)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고 했고, 세설신어(世說新語)에 따르면, 지도림(支道林)은 바둑은 말이 필요없다 하여 수담(手談)이라 했고, 왕중랑(王中郞)은 세속잡사를 벗어나 바둑 삼매경(三昧境)에 빠진다 하여 바둑을 좌은(坐隱)이라 했다. 이밖에도 바둑은 땅은 모나고 하늘은 둥글다는 지방천원(地方天圓)에서 나온 방원(方圓)이 있고, 바둑이 근심을 잊게 한다는 뜻으로 망우(忘憂), 바둑돌의 흑백을 상징하는 오로(烏鷺), 깨가 쏟아진다는 귤중지락(橘中之樂) 등 운치있는 많은 별칭들을 가지고 있다. 中國圍棋史話 →한문(漢文) 아시는 분들만 보세요! 世說新語 : 송(宋)나라 사람 유의경(劉義慶)이 편찬한 일화집(逸話集)이다. 후한(後漢)에서 동진(東晋)에 이르는 기간 중, 귀족, 학자, 문인, 승려들의 언행(言行)을 덕행(德行), 언어(言語), 정사(政事), 문학(文學), 방정(方正), 아량(雅量) 등 38개 부문으로 나누어 기술했다. 인용된 참고서적만도 무려 400여종에 이르지만 자료의 태반이 이미 망실(亡失)되고 없으므로 세설신어(世說新語)는 고증학상 중요한 자료로 관리되고 있다. 문장도 청신미(淸新味)가 있다. [世本]記錄全文 : 堯造圍棋 丹朱善之 話說上古仁君帝堯, 娶妻散宜氏, 生下兒子丹朱. 丹朱雖然是聖人之子, 自小性情乖戾, 長大後又嗜好遊玩, 不務正業. 堯帝爲丹朱擔心不已, 遂往覓(仙人)蒲伊. 至汾水之濱, 見二人對坐蒼檜下, 劃沙爲道, 以黑白小石子行列如陣圖. 右一人戴若笠, 左一人披蒲衣, 坦腹露臂, 毛長數寸, 兩目更方, 帝知卽是. ...帝...問全丹朱之術, 蒲伊曰 特易矣! 丹朱善爭而愚, 當投其所好, 以閑其情. 前翠檜下沙道石子, 是謂奕枰, 廢興存亡, 於此可見. 帝問其理, 蒲伊曰 夫萬物之數, 從一而起, 局之路三百六十有一. 且一者, 生數之主, 據其極而運四方也. 三百六十, 像週天之數, 分四隅以象四時, 各十九路以象其日, 外周七十二路以象其候, 亦名圍棋, 爲具攻圍征之用. 其子白黑相半, 以法陰陽. 局之道謂之枰, 道之間謂之罫. 局方而靜, 棋圓而動, 以法天地, 自立此戱, 世無解者. 思惟玄女知兵, 欲與一談. 尋至中條, 又會玉晨, 去久未回. 幸其高徒子州支父(卽與蒲伊對奕者)守洞, 擧至略談其槪, 卽深會其旨. 怪道行兵神速, 剪滅蚩尤也. 帝曰 聞滅蚩尤者, 風后也. 蒲伊曰 山人行從不定, 姓氏無常, 此乃其易名耳. 三人相視大笑. 蒲伊曰 棋雖小數, 實與兵合, 千變萬化, 奕無同局. 苟非精慮深思, 不能求其勝負之由也. 子歸以敎丹朱, 彼必專心致志, 何暇爭奪天下哉... 帝獨步回, 群臣齊集檜下, 看所聚石子, 不解其義. ...帝端思詳察, 越旦, 盡得其妙. 命左右斂石於囊, 晝棋局於簡, 收拾回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