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현·대·사 by Bonaza3000

바둑--동양의 심오한 지혜

바둑의 기원에 관한 학설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 중 이승우씨가 쓴 책 청석기담(淸石棋談)에 기성(棋聖) 오청원씨의 수필집에 실린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그 내용을 소개한다면 다음과 같다. 즉, 중국의 역사가 시작되는 까마득한 옛날, 우리가 흔히 태평성대의 대명사로 칭하는 요순시절, 요제(堯帝)는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 태원(太原)에 도읍을 정하고 있었다. 오랜 기간 동안 훌륭한 통치를 이루었지만, 말년에 깨달은 바가 있어 성현을 찾아 제위를 물려주고자 선인(仙人) 포이(蒲伊)를 찾아갔다.
포이에게 자리를 양위하겠다고 하자, 포이는 이를 완곡히 거절하고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순(舜)을 추천하였다.
그와 동시에 아들 단주(丹朱)에 대한 걱정을 하면서 그에게 바둑을 가르치라고 권하였다 한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바둑을 두기 시작하였다하니, 바둑의 기원은 지금부터 무려 5,000 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할 수 있다.
바둑의 심오함과 수의 무궁함을 생각할 때, 아마도 처음으로 바둑을 창안한 사람은 천재적인 창의력과 무한한 상상력을 지닌 사람이 틀림없었을 듯하다. 바둑은 중국에서 기원하여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으로 전파되었는데, 정작 바둑문화가 활짝 꽃피었던 곳은 일본이었다. 약 300 여 년 전부터 프로 기사 제도가 확립된 일본은 막부 통치자들로부터 보호를 받으며 질적(質的)인 성장을 거듭해 왔는데, 일본 바둑 역사상 최고의 천재로 알려진 본인방 수책(秀策), 본인방 도책(道策), 그리고 지금도 살아있는 기성 오청원의 기보를 펼쳐볼 때, 바둑 전문가들의 견해에 의한다면 수읽기의 깊이와 전략전술의 오묘함에 경탄을 금하지 못한다고 한다. 실제로 현재 시중에 나와 있는 오청원님의 대국 보 3권은 프로 바둑 기사들이 자주 읽어보는 책이라고 한다.

70년대부터 90년 대 까지 이름을 날렸던 조치훈, 조훈현, 소림(小林 ), 무궁(武宮 ), 대죽(大竹 ), 임해봉(林海峰) 등 일본 바둑사를 수놓았던 뛰어난 고수들은 모두 300 여 년 동안 일본 바둑의 선구자들이 이루어 놓았던 정석, 포석, 끝내기 등에서 펼쳐지는 전술, 전략과 기법의 토대 위에서 피었던 화려한 꽃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서 화려하게 개화(開花)한 바둑의 꽃은 1990년대와 2000년대 초기 한국으로 옮겨와서 한국이 국제기전의 거의 모든 기전에서 우승을 하였다. 일본과 중국의 기사들이 모두 한국 기사들의 최신 기보와 최근에 연구된 한국 기사들의 신수(新手)를 공부하며, 한국을 따라잡기 위하여 분투하였으며, 그 결과 중국은 한국을 따라잡았고, 일본은 세대교체가 원활하게 되지 못함에 따라서 바둑 3 국 중 가장 하위로 전락하게 되었다.
중국이 한국을 따라잡게 된 것은 중국 특유의 만만디 전략, 즉 느리지만 한 걸음 한 걸음 착실하게 실력을 키워 나가면서, 보다 앞선 한국을 배운다는 자세를 견지하여, 현재는 중국과 한국의 실력 격차가 거의 없는 경지까지 왔으며 90 후 세대(1990년 이후 출생한 세대)는 중국이 앞서가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오다가, 최근 신진서, 신민준,변상일등의 영재들이 입단하여, 중국의 90후 세대들과 년초(2013년초)에 실력을 겨루어본 결과 대등하게 둘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우리 바둑계가 큰 희망을 갖게되었다. 중국이 한국을 따라잡은 것은 다음과같은 원인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즉, 중국 리그에서 한국의 기사들을 대거 영입하여, 함께 바둑을 두면서 배운다는 겸손한 자세가 크게 작용하였다 할 수 있다.
인간 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의 옛말이 생각나게 되는데, 바둑 역시 정치와 같이 토인비 교수의 문명서점설(文明西漸設)이 적용되는 것 같다. 즉 일본에서 부흥한 바둑이 서쪽인 한국으로 그리고 한국에서 중국으로 그 중심축이 이동한다는 말인데, 과거부터 있었던 말, 즉 “바둑이 크게 발전하면 그 나라도 발전 한다”는 말이 사실인 것 같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중국이 한국을 따라 잡았으니, 앞으로 바둑계는 중국 1 국 천하가 될 것이다라고도 생각할 수 있으나, 한 편으로는 “아니, 그렇지 않다. 한국과 중국이 1,2 위를 타투는 한중 춘추전국 시대가 전개될 것이다”라는 견해도 유력해 보이나, 여하튼 바둑은 이제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진화의 과정을 걷고 있는 듯하다. 그 새로운 진화의 과정이란 종래의 일본 프로 바둑 역사 300 년간 다져졌던, 바둑의 정신 수양과 예술성을 지향하는 흐름---따라서 “모양이 좋지 않거나 속수는 비록 그 수가 승리의 첩경(捷徑)이 될지언정 프로 기사로서의 품격 때문에 두지 않는다” 라는 입장이 한국의 토종 된장 바둑에 의하여, 대폭 수정이 되어서, “빈삼각이나 모양이 아무리 나빠도 이기는 데 필요한 수는 거리낌 없이 둔다” 의 생각으로 바뀌게 되었는데, 전자(前者)를 '바둑의 미학'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실전적인 바둑'이라고 할 수 있으며, 미학의 바둑이라고 한다면 일본의 오다께(大竹)가 가장 유명하였다.
오늘날 한국의 현대 바둑을 개척하고 씨를 뿌린 사람은 조남철 국수인데, 그는 ‘조치훈과 아이들’이라고 애칭할 수 있는 기다니(木谷實) 문하의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기다니 문하에서 배웠으며, 갖은어려움을 극복하고 현재의 한국기원(초기에는 한성기원)을 창립하여, 50, 60년대의 바둑계 최고수이었으며, 그 당시 유행했던 말이 “초남철이 와도 안 된다” 이었다. 이는 물론 바둑의 형세가 완전히 비세(非勢)에 접어들거나 사활(死活) 문제에서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 직면할 때 쓰였던 말이었다.
조남철 시대 이후 일본이 기다니 문하에서 당시 오다께 임해봉(林海峰)과 더불어 3인방이라 칭해졌던 김인의 시대가 활짝 열렸던 60년대 말과 70년대 초에는 그의 중후(重厚)하고 깊은 수읽기와 훌륭한 인품이 한국 바둑계를 휩쓸었으며, 김인 9단의 타이틀 보유 숫자는 지금까지 역대 3위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이 때 뢰월헌작(瀨越憲作)의 제자였던 20대의 조훈현이 병역 문제로 귀국하여, 공군에서 군 복무를 마치고 김인 9단으로부터 타이틀을 하나씩 접수하기 시작하였다. 조훈현은 우리가 알듯이, 세계에서 최연소(最年少)인 9세에 입단한 천재로서, 당시 뢰월헌작 스승 밑에서 교육을 받았던 기사로는 하시모도(橋本宇太郞) 9단과 오청원 9단, 그리고한국의 조훈현이었다. 타고난 바둑의 천재성과 꾸준히 노력하는 성실성이 그 밑바탕이 됨과 동시에, 군대에서 배운 강인한 전투 정신으로 전투력을 갖추고서, 후지사와(&am;#31824;澤秀行)씨가 말했듯이 세계에서 가장 수를 빨리 본다는 빠른 수읽기, 그리고 발빠른 행마, 뒤엉켜서 싸우는 난전(亂戰)에서 누구보다도 뛰어난 수습 솜씨를 보이는 등 타인을 압도하는 역량을 발휘하여, 70년 대 중반부터 80년대에 걸쳐 3회의 전관왕(全冠王)을 차지하면서한국 바둑계의 제왕으로 군림하였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오청원이나 조훈현 같은 천재 형 기사는 100 년에 한 두 명 정도 태어나는 희귀한 존재라고 생각되는데, 조훈현의 천하 통일은 국내에 국한 되지 않고 제1회 응창기(應昌期) 배를 위시하여 모든 국제기전 타이틀을 1회 이상 획득한 그랜드슬램(grand slam)을 달성하였다. 그가 최초의 국제기전 타이틀을 획득하자, 언론에서 대서특필(大書特筆)하고, 김포공항에서 서울까지 카퍼레이드(car arade)를 펼치면서 금의환향(錦衣還鄕)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한데(이 국제기전이 응창기 배 이었다), 지난 벵쿠버 올림픽에서 온 국민들을 감동시켰던 김연아 선수나, 그외 스피드 스케이트에서 성적을 내어, 동계 올림픽사상 최고 성적을 냈었으나 카퍼레이드까지는 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면, 그 당시 조 9단의 응씨배 타이틀 획득이 얼마나 국민들을 고무시켰는가를 알 수 있다. 필자는 그때 감격해서 시 한수를 지었는데, 그 것이 다음의 시이다. 제목은 應氏盃 優勝.

應氏盃 優勝
深奧無窮千萬變 : 심오하고 무궁한 천만 번의 변화여
孫吳諸法龍天盤 : 손자 오자의 여러 법이 天盤 위의 龍이로다.
入神曺攝聰明突 : 入神의 조 훈현, 섭 위평의 총명이 충돌하니
奇數妙點衆讚嘆 : 奇數와 묘한 着點이 衆人의 찬탄을 자아내네.
善戰勇鬪終優勝 : 善戰하고 용감히 싸워 결국 우승하니
大韓男兒揮名散 : 대한 남아의 이름은 흩어져 떨치네.
神妙窮究硏探磨 : 신묘하게 窮究하고 연구하며, 탐구하고 닦아서
歲歲頭頂願汝滿 : 歲歲토록 그대 최고의 지위 가득하길 바라네.

조훈현에 비하여 조치훈은 일본 국내에서는 수많은 신기록을 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기전에서는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조훈현의 일본 유학파 바둑에 비해서 순수한 국산 된장바둑, 또는 끈기 있게 그 생명력을 유지한다는 의미에서, ‘잡초 바둑’으로 불리었던 서봉수 9단의 바둑 역시 우리나라 바둑 사에서 빠뜨릴 수 없는 하나의 이정표가 되고 있다. 조훈현과의 수많은 도전기에서 비록 성적은 조훈현에 훨씬 못 미쳤으나, 그의 끈기 있는 전투력과 깊은 수읽기, 그리고 기묘한 전략, 전술은 현재의 기성세대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었다. 특히 그는 2단 때에 명인전 도전기를 조남철 명인과 두어서, 약관의 나이에 타이틀을 획득하여 세인(世人)을 놀라게 하였으며, 그후 그는 유달리 명인전에 강하여 통산 3회의 우승을 하여, ‘명인전의 사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는 그 후 연승 기(連勝棋)방식으로 두어졌던 제5회 진로배에서 9연승을 달성해서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하였으며, 제2회 응창기(應昌期) 배에서의 우승 또한 매우 의미 있는 기록이었다. 진로배(지금은 농심 신라면 배) 단일 회수 9연승의 기록은 아마도 깨어지기 어려운 기록일 것 같다.

조훈현, 서봉수 9단들이 거의 모든 기전에서 우승을 독차지하자, 바둑 펜들은 새로운 강자가 나타나서, 우승을 둘러싸고 좀더 흥미로운 양상이 전개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장수영, 백성호, 서능욱, 강훈, 김수장 9단들을 도전 5강이라고 부르면서, 새로운 타이틀 홀더(title holder)를 기대하였으나, 대체로 조, 서의 높은벽에 막혀서, 준우승에 머물고 말았는데, 그중 특히 서능욱 9단은기재(棋才) 면에서 거의 조, 서와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총 13회의 준우승(제4기 최강자전, 제1기 전일 왕위전, 제1,2,3,4기 대왕전, 최고위전(87년), 바둑왕전(87년), 바둑왕전(89년), 제왕전(90년), 바둑왕전(90년), 패왕전, 최고위전(91년)을 하였다. 우승 기록이 없었다는 것은 조, 서의 벽을 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13회나 준우승 기록을 갖고 있다는 것은 그가 조, 서 다음으로 당시의 3위의 서열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인데, 서능욱 9 단이 어렸을 때부터 천재라는 말을 들으면서, 그 명성에 걸맞게 창의성과 그의 독특한 눈 목자, 손빼기, 외목, 패를 자주 거는 등 천의무봉(天衣無縫)의, 마치 손오공같은 화려한 변화와 속사포 같은 속기가 특징이 되었는데(그의 별명이 손오공이다), 그가 만일 그러한 기재(棋才)와 이창호의 신중함이 겹쳐졌으면, 아마도 그의 준우승 중 최소한 절반 이상의 우승 기록을 달성하였을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하는데, 처음에는 신중하게 두다가도, 시간이 흐르면, 속기의 습관이 본인도 모르게 나타나서, 이는 타고난 성격이 운명을 갈랐다고 하는 케이스가 될 것이고, 제갈량의 신출기몰(神出鬼沒)하고 뛰어난 전략 전술에 막혀 한탄했던 주유의 심경을 이해할 수는 있으나, 우리 같은 아마추어 같으면, “에이 13회나 준 우승을 했는데, 좀 봐주지---”라고 할 수도 있으나, 프로의 세계는 그런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곳이라는 것을 서능욱의 기록이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금년도(2011년) 12월 말, 드디어 대주배에서 생애 최초 우승을 하였으며, 2012년 말에도 또다시 우승하여, 그의 말대로 “이제시작이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 당시 서 9단이 김희중 9단과 바둑을 두면 둘다 초 속기파라, 옆에서 관전하던 동료 기사들이 아니, 탁구치나 바둑 두나?'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도전 5강은 최근까지 해설자로서 명성을 날렸으며, 그들의 명쾌하고 화려한 해설은 바둑 애호가들을 감탄하게 했는데, 백성호 9단과 장수영 9단은 지금도 뛰어난 해설을 해주고 있다. 조훈현의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철옹성(鐵瓮城)은 이창호의 등장에 의하여, 드디어 세대교체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조훈현의 수제자로 옛날 기다니 식의 한 솥밥 식구 사제지간으로서 비록 스승과의 대국 수는 몇 판 되지 않았지만, 수많은 복기(復棋) 지도와 조훈현이 일본에서 갖고 온 수 백 권의 바둑 책, 그리고 새벽 2시 까지 계속되는 열성적인 연구에 힘입어 불과 11세에 입단하고, 입단한지 3년만인 1989년에 생애 최초의 타이틀을, 그것도 사제(師弟) 대국에서 획득하여, 90년대 초는 처음 조훈현 이창호 쌍두(雙頭) 마차 시대에서 이창호 독주(獨走) 시대로 변하였는데, 국내의 거의 모든 타이틀을 스승으로부터 접수하고, 국제기전에서도 뛰어난 성적을 보이면서 명실 공히 세계 1인자의 위치를 확고히 굳히게 되었다. 90년대 말부터 조훈현의 반격이 시작되었으나, 조훈현의 타이틀 획득 수는 불과 몇 개에 그치면서 이창호의 벽이 얼마나 두터운가를 더욱 실감하게 되었다. 이창호의 바둑계 평정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별명인 우주인, 돌부처, 3중허리 (임해봉의 2중허리 별명에서 유래)--등에서 알 수 있듯이, 우선 서두르지 않고 끈질기게 때를 기다리며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승리를 향하여 거북이처럼 전진하고, 정석, 포석, 중반전, 종반전, 전투, 계가---등 어느 분야나 통달해 있으나, 실제로 바둑을 둘 때에는 멍청한 듯 그저 정수(正手) 또는 가장 간명한 수만 골라서 오로지 확실한 승리의 방향으로만 조금 씩 조금 씩 나아가고, 유리할 때나 불리할 때나 감정이 결코 얼굴에 나타나지 않고, 마치 제주도의 돌 하루방처럼 무표정한 포커페이스(oker face)를 유지하면서,
장기(長技)인 끝내기로 승부를 내기 위하여 계가 바둑으로 유도하면서,
1집 반을 이길 수 있는 형국에서 한집 양보하고 반집만 이기는 무시무시하게 냉철한 반면 운영으로 거의 무적의 1인자로 군림하고 국내 랭킹(ranking) 1위 자리를 오랫동안 유지하였었다. 그러나최근에는새로운 현상이 감지(感知)되고 있는데, 그의 기풍이 서서히바뀌어가고 있는 것 같다. 즉 위의 두터움과정밀한 계가로 승부를 내는양상에서 전투와 두터움을 50:50 정도로 믹스(mix)하는 방향으로 진화해가는 느낌이다. 그것은 우주 만물에 있어서 고정 불변한 것이없고, 항상 보다 높은 차원으로진화해 간다는 우주법칙을 실천하고있는 듯하다. 이창호의 가장 불가사의한 점은, 처음 타이틀을 획득할 때 그 어린 나이에 어떻게 60~70세의 노인도 혀를 내두를 만큼의 부동(不動)의 마음을 지니고 있느냐 하는 점인데, 이런 점에서 사람들은 그를 ‘우주인’ 또는 ‘외계인’인이라고 부르는 것도 일리가 있는별명이라 하겠다. 필자의 견해로는 인간이 어떤 특수한 능력을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었다는 것은 전생에 그 능력과 동일한 일을 하였거나, 그 능력과 비슷한 일을 하였기 때문에 현생에 그 능력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타난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그 능력도 한 생애가 아니고 여러 생애에 걸쳐서 갈고 닦은 결과가 현재의 능력으로 나타난다고 보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인간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단지 한 생애의 경험만으로 탁월한 능력을 갖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창호의 경우 바로 앞 전생이 일본의 뢰월헌작(瀨越憲作세고에)이라고 필자는 보고 있는데, 뢰월 헌작은 바로 조훈현의 스승이었었다. 조훈현이 병역 관계로 귀국하자 뢰월헌작9단은 몹시 상심하였고, 그 상심이 원인이 되어서 그만 타계(他界)하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조훈현에 대한 강한 제사 사랑이 그의 사후 얼마 되지 않아서 한국의 전주에 재생하게 되었고, 할아버지 어깨너머로 배운 바둑 실력이 불과 1년도 못되어서 아마추어의 최고수의 경지로 갔다는 것이, 그리고 이후 조훈현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이 필자가 이창호의 전생을 뢰월헌작이라고 보는 이유인데, 필자는 영사(靈査) 능력이 없기 때문에 오로지 추측할 뿐이나, 아마도 틀림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조훈현의 선생은 누구일까?
조훈현이 일본에서 수학(修學)하고, 일본과 친숙하다는 점은 곧 그의 전생이 일본의 과거 뛰어난 프로기사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데, 아마도 조훈현은 과거 일본의 3대 천재 기사의 한사람이었던 본인방 수책(秀策)이 아닌가 한다. 그 이유는 필자가 갖고 있는 과거 뛰어난 일본의 프로기사들, 즉 본인방 수영(秀榮), 수책, 장화(丈和), 수재(秀哉), 수보(秀甫)등의 기보를 대충 훑어볼 때, 조훈현의 실리 지향적이며 발빠른 행마와 더불어 강한 전투력을 가진 사람과 가장 닮은 사람이 바로 수책이지 않느냐 하는 것인데, 이것도 역시 필자의 추측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장담은 하지 못하나 아마도 맞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이창호 역시 위에서 언급한 사람 중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당분간은 이창호 9단이 세운 기록은 깨어지기 어려울 것 같다. 예를 들어 41연승 기록은 너무 놀라워서 이 기록이 앞으로 다시는 깨어지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 세돌 9단이 32 연승까지는 갔으나 41연승 까지는 한참 못 미치는 기록이며, 또한 최연소 국제기전 그랜드스램(grand slam) 기록도 여간해서는 깨어지기 어려울 것 같다. 그리고 최연소 국내 타이틀 획득(13세)과 최연소 세계 타이틀 획득(17세)의 기록도 당분간은 깨어지기 어려울 것이고, 정확히는 알지 못하지만 국제기전 연승기록(물론 단일 기전에서가 아니고 연속 기전임)도 깨어지기 어려운 기록이다. 한마디로 이창호 9단의 기록은 과거 10 번 기를 통해서 모든 기사들을 압도했던 오청원 9단을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창호 시대를 끝내고 드디어 이창호를 능가하는 선수가 등장했으니, 그는 물론 이세돌 9단이다.
이세돌 9단을 프로기사로 성장시킨 가장 중요한 사람은 그의 아버지인 이수오(98년 작고) 씨인데, 그는 목포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선생님이었는데, 교직을 그만 두고 그의 고향인 비금도로 환향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세돌, 세훈 형제에게 바둑을 가르쳤는데, 그 때 그의 기력은 아마 5단 정도의 실력(현재의 필자보다 약간 더 센 실력)이었다 한다. 그 후 두 형제는 서울에 와서 권갑용 바둑 도장에서 배웠고, 입단하여 형은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으나 동생 세돌은 천재형 기사의 특징을 나타내면서 뛰어난 성적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빠르고 깊은 수읽기, 다른 기사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창의적이고 파격적인 수, 강한 공격력과 아울러 실리의 균형을 항상 고려하는 운석, 그리고 전략적인 면에서 다른 최정상에 있는 기사들 못지않게 심모원려(深謀遠慮)를 갖춘 점---등등의 여러가지 장점을 갖추고, 최근에는 결혼까지 하여서 심리적인 안정까지 이루어, 32 연승의 기록과 최장 기간 1위의 기록, 그리고 국제기전 최연소 출전 기록 등을 갖고 있으며, 한국 바둑을 계속해서 세계 최강으로 견인할 기사로 인정받고 있으나, 2009년에는 여러 가지로 의견이 맞지 않아서 6개월간 정직하여 많은 논난(論難)을 야기하기도 하였다.다시 복직하여 22연승을 구가하였고, 다시 여러 국제기전과 국내 기전에서 우승하여, 6개월간의 공백 기간은 재충전(再充電)하는 발전의 기간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한편 한국의 바둑은 세대교체가 상당히 빠르게 진행되어, 사법고시보다 훨씬 어렵다는 입단의 관문을 뚫고 프로기사의 명단에 그 이름을 올리고서도, 한 때 반짝 빛을 발하다가도 말없이 사라지거나, 혹은 군대에 갔다 오면, 두뇌 회전이 둔화되어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거나 하고, 랭킹(ranking) 50 위권 안에 들어가기가 엄청나게 어려운 것이 현실로서 프로기사 개인들의 입장으로 보면, 프로로서 공식 기전에서 상금을 받고, 언론의 스포트라이트(sotlight)를 받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나, 그와 같은 기사는 극 소수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기사들은 개인 교습이나, 바둑교실, 그리고 기원 운영이나 대국료 등으로 생활을 꾸려가는 실정이다.
프로 기사들의 병역 문제는 앞에서 말했듯이, 아무리 뛰어난 기사도 군대 갔다오면, 성적을 내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이창호처럼 국제기전에서 발군의 성적을 내어서, 특별 케이스로 방위 군무를 하는 경우와 후지쓰배나 춘란배와 같은 국제기전의 우승, 준우승을 하면 군무를 면제해주는 케이스가 과거에는 있었는데, 최근에는 바둑이 대한 체육회에 가입하다보니, 다른 체육 종목과의 형평성 문제로 아시안 게임에서 우승을 해야 군무를 면제해주는 제도로 바뀌게 되어서, 체육회 가입이 정부의 지원을 받아 좋기는 하나, 프로기사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군대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방해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군대 문제를 해결하는 좋은 방안으로, 국제기전에 우승과 준우승하고 나서, 군에 입대하는 기사는 군내에서 특별 케이스로 다루면 어떨까 생각한다. 즉, 육군, 해군, 공군의 각 군 별로 장병 두뇌 훈련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바둑 강좌와 장교 바둑 특별 강좌를 개설하고, 이 프로그램의 전문 강사로는 일반 프로 기사를 채용하여 강의료도 주고, 특히 영관급과 장성급 특별 강좌나 개인 강좌 개설을 허용하고, 이 들은 국제기전과 국내 기전에서 타이틀을 획득한 기사를 채용하고, 강사료 같은 것도 입법화하여, 세계에서 가장 어렵다는한국의 사법고시 보다 더 어려운 프로기사의 관문을 통과한 이 특수 영재아들을 대우해주는 것이 문명사회에서 영재들을 가볍게 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 될 것이다.

한편 조훈현, 이창호, 서봉수와 더불어 4인방(四人幇)이라 칭했던 유창혁은 어떨까?
유창혁 9단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기재가 뛰어나서 각종 아마 바둑 대회를 휩쓸었고, 1984년에는 세계 아마 바둑 대회에서 준우승하였으며, 국내 대회에 수 없이 우승하였고, 세계 대회에서도 응씨 배 우승을 비롯하여 그랜드슬램을 달성하였던 최고의 고수 반열에 있는 간판 기사이다. 유창혁 9단은 초등학교 때부터 필자가 바둑 잡지를 통해서 익히 알고 있는 기사였으며, 실전 대국뿐만 아니라 해설에 있어서도 발군의 실력을인정받아 팬들이 매우 좋아하는 기사이다. 그는 최근에 일본처럼 침체될지도 모르는 바둑계를 일신하자고, 현재로서는 매우 파격적이고, 마치 프로 골프나 프로 테니스 처럼 상금제와 오픈제를 하자고 제안하였으며, 실제로 삼성 화재 배나 BC 카드 배 같은 기전은 아마추어에게도 개방하여 오픈제가 지금 시작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은 Naver에서 퍼온 글인데 한번 읽어보고 그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유창혁 9단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프로 기전이 답보 상태다. 바둑계 발전의 동력이 떨어지고 있다. 바둑계의 장래가 어둡다. 조만간 바둑계는 침체할지도 모른다. 일본의 예는 우리에게 타산지석이 되고 있다. 프로 기전이 답보 상태인 것은 후원사나 스폰서가 기전의 매력을 크게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전 운영 방식에 새로운 변화를 줄 필요가 있다. 그게 상금제와 오픈제다.' 이런 주장이 과연 옳은 것인지, 잘라 말하기 어려운 논제다. 그러나 일단은 반갑다. 토론의 주제가 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바둑계는 그동안 토론이랄 게 별로 없었다. 문제점, 개선책, 아이디어 그런 게 있어도 공론의 장으로 나오질 못했다. 바둑계의 문제, 한국기원의 문제에 가장 민감해야 할 프로기사들이 말을 아꼈기 때문이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조금 추상적으로 말하자면, 요는 ‘비판’에 익숙하지 않은 탓이다. 바둑계와 한국기원은 그동안 사회와 언론으로부터 과보호를 받아온 느낌이 짙다.
한국기원을 다른 말로 하면 ‘바둑협회’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협회가 있는데, 바둑협회는 다른 협회들에 비한다면 융숭한 대접을 받아왔다. 쉽게 축구협회를 생각할 수 있다. 우리 선수들이 대회에 나가 지기라도 하면, 혹은 협회 내에 무슨 잡음이라도 생기면, 축구협회는 언론의 융단폭격을 맞곤 한다. 축구협회뿐 아니라 예술 분야의 협회들, 내 돈 들여가며 좋은 일을 하겠다고 모인 사람들의 봉사단체, 환경단체, 시민운동단체들도 마찬가지다. 언론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지만, 한국기원과 프로기사가 언론의 질타를 받아 본 경험이 별로 없다. 때로 프로기사의 자세와 행동이 다소 이상하게 보이는 경우라도, 한국기원의 행정이 미흡하게 여겨지는 경우라도, 그게 언론의 도마 위에 오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잘 하면 칭찬을 받고, 이기면 각광을 받았을 뿐이지, 못한다고, 중국기사나 일본기사에게 졌다고 비난을 받지는 않았다.
왜 그랬을까. 답은 간단하다.
바둑계와 한국기원과 프로기전은 언론이 키워 온 것이었으니까. 언론은 한국 바둑 발전의 기관차였다.
한국 바둑의 발전은 프로기전의 발전-성장과 궤를 같이 한 것이었는데, 해방 이후 우리 현대 바둑의 초창기부터 20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우리 프로기전은, 일본의 사례가 그대로 적용된 것이었기는 하지만, 99% 언론사가 주최한 것이었다. 언론사가 돈을 댄 것이었다. 내 돈 들여 만들고 키운 것을 내가 비판하기는 어려웠으리라. 언론사에도 사업부가 있다. 매체의 힘을 빌려 매체 이외의 것으로 돈 버는 일을 연구한다. 언론이 수익을 생각하지 않고 투자한 분야-종목이 둘 있으니 신춘문예와 바둑이었다. 신춘문예는 그래도 수익과 아주 무관하지는 않지만, 바둑은 정말 순수한 투자였다. 바둑팬들 때문에 부수가 조금 늘어났는지는 모르지만. 비판을 받지 않았으므로 비판에 대한 면역력이 생겼을 리 없다. 언론의 보호 속에 있었으므로 자생력을 키울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문제가 이제드러나고 있다. 요즘은 사정이 좀 달라졌다. 언론사가 자체로 돈을 대 주최하는 기전은 없다.
유창혁 9단의 제안은, 세계 챔피언에 오르기도 했던 프로기사가 자신과 동료들의 면역력과 자생력을 위해 자신들의 무대를 일반에게 솔직하게 내 보이는 ‘발언’이라는 점에서, 주장의 가-불가, 호-불호를 떠나 시대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과연 대국료를 없애고 상금제로 하는 것, 입단의 문호를 활짝 열고 아마추어도 프로기전에 참가할 수 있게 하는 것이 타개책이 될 것인지. 예컨대 64강 안에 드는 사람까지만 상금을 준다면, 프로기사의 수입이 늘어날 수 있는 것인지. 성적을 내는 기사들 사이에서는 지금보다 소득의 분배가 좀 낫게 이루어지겠지만, 나이 든 기사들, 성적을 잘 못내는 기사들에게는 상관이 없는 것 아닌지. 그래서 결국은 그게 그거로 되는 것 아닌지---.입단의 문호. 이건 꽤 오래전부터 간헐적으로 거론되던 사안이다.
현재는 일단 한국기원 연구생이 되어야 입단을 바라볼 수 있는데, 연구생으로 바둑 공부를 하다가 만18세까지 입단을 못하면 연구생에서 나오게 되어 있다. 흔히 퇴출이라고 하지만, 그건 용어가 너무 살벌하다. 연구생의 정원은 120명. 실력 순으로 1~10조로 나누어진다. 입단자는 연구생 1조에서 나오기 마련이다. 1조뿐 아니라 10조의 연구생들도 당장 프로에 내보내도 손색이 없는 실력이다. 1조와 10조는 실력 차이가 제법 날 듯하지만, 그렇지 않다. 1조가 10조를 선(先)을 접는 정도다. 6집반의 덤을 받지 않는 정도라는 얘기. 1조에서 10조 사이의 실력 거리가 6집반. 각 조별 사이의 거리는 1집도 안 된다는 얘기. 이런 실력들이니 많이 뽑아 주자는 건데, 기전 규모가 늘지 않은 상태에서 프로 식구들 숫자만 늘어난다면? 실력 있는 어린 친구들이 대거 입단하면 자연 승부의 긴박감이 높아질 것이므로 스폰서가 재미와 보람을 느껴 증액을 시킬 것이다? 그럴까. 노장들이 물러나면 처음 당분간은 긴박감이 높아질 수 있다. 그러나 어린 친구들 사이에서도 결국은 서열이 생길 것이고 어린 재목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이창호 이세돌이 되는 건 아닐 것이다.” [출처] [ 이광구 칼럼]
승부만이 바둑의 전부는 아닐 것.
이상이 유창혁 9단이 주장한 내용을 이광구 씨가 그의 칼럼에서 논했던 내용인데, 상금제와 오픈제가 앞으로의 흐름일 것 같은 생각이고, 실제로 BC 카드배 같은 기전에서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해주나, 위의 이광구 씨의 논점을 보면 꼭 그와 같은 흐름이 좋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 문제는 앞으로 시간을 두고 천천히 논의와 연구를 통하여 가장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할 문제인 것 같다.
한편 여성 바둑의 현황은 어떨까? 여성 바둑이 활성화 되고, 여성이 국수 위까지 획득했다는 것은 과거 바둑사를 볼 때에 거의 기적처럼 생각될 정도인데, 후천 개벽, 5차원의 세계에 진입했다고 생각되는 현 시점에서, 사법, 행정, 외무 고시에서 여성 합격자가 거의 절반 수준에 이르고, 옛날에는 생각하지도 못했을 사관학교 여생도가 지금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시점에서 바둑 역시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우리나라 제1호 프로 기사는 윤희율 초단이며, 2호는 조 영숙 2단이었다. 둘 다 중학교 때부터 바둑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으며, 윤 초단은 일본에 원정을 가서 아마추어 여류 본인방에 우승하기도 하였다.
당시 여성은 남자들의 기력에 상당히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여성들만으로 치러지는 입단 대회를 개최하여 입단하였는데, 이는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여성 바둑이 남성 바둑과 대등한 실력을 갖고 있다고 증명한 일은 우리나라 기사가 아닌, 중국의 기사가 해냈는데, 바로 루이나이웨이(芮乃偉) 9단이었다.
루이 9단은 원래 중국에서 입단하여 활약한 중국인 기사인데, 일본의 오청원 9단의 제자로 알려져있다.
남편 장주주 9단과 함께 미국과 일본을 떠돌다가 최종적으로 한국에 정착하여 무서운 실력을 본격적으로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에 정착하기 전에 세계 최고의 상금을 자랑하는 응창기배 대회에서 제1회에는 4강, 제2회에는 8강에 올라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였는데, 한국에 정착하고 난 후 가장 우리들을 놀라게 한 일은 2000년도에 이창호를 이기고 국수전 도전자가 되어, 조훈현 당시 국수를 이기고 최초 여성 타이틀 홀더(title holder) 되었다는 사실이다. 여성이 공식 타이틀 전에서 남성을 극복하고 우승한다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 이지만 거의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루이 9단은 10세 때에 상하이에서 처음으로 바둑을 배웠는데, 승부욕이 매우 강해서 바둑에서 지면, 잠을 잘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녀는 매우 실전적인 수를 두며, 지지않는 바둑을 두고 공부는 그녀의 트레이드마크(trade mark)여서, 밥 먹고 잠자는 시간 외에는 바둑 공부를 한다고 알려져 있다. “아무리 지옥 같은 곳이라도 바둑을 둘 수 있으면, 내게는 천국이며, 아무리 천국 같은 곳이라고 바둑을 둘 수 없으면 내겐 지옥이다.”라는 어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한국에 머물고 있는 동안 바둑을 둘 수 있었기에 내내 행복했던 그녀의 기록을 살펴보면, 43기 국수전 우승을 비롯하여 여류 국수전, 여류 명인전, 보해배, 흥창배---등 많은 기전에서 우승을 하며, 다른 여성 기사들의 실력 향상에 가장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재작년도(2010년)에 중국으로 영구 이주(移住)하여 현재 중국의 여성 1인자 자리를 놓고 중국의 어린 영재 여류 기사들과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는 중이다. 루이9단 이외의 여성 기사를 보면 현재 최고의 주가를 뛰우고 있는 기사는 박지은 9단, 조혜연8단, 그리고 이민진5단 일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신진 기사로는 여류 국수인박지연 2단과 제작년에 정관장 배에서 7연승한 문도원 2단, 그리고 지지옥션 배 8연승을 한 후, 여류 명인이 된 최정 3단이 될 것이다.
한국 여성 두 번째 9단인 박지은은 97년도에 입단하여,
여류 명인전, 정관장배, 제1회 대리배, 제1회 원양 부동산배, 제13회 여류 국수전, 제1, 2 기 궁륭산 병성배 우승, 제1기 화정차업배 우승 등 많은 우승 경력을 쌓고 있는 중이다. ‘여자 유창혁’이라는 별명처럼 공격력이 돋보이고, 침착 냉정한 반면 운영으로 전략과 전투 면에서 고르게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여러 기전에서 루이나이웨이 9단에게 이겨서 획득한 타이틀이라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재작년(2011년)에 정관장 배에서 최후에 남아서 세 사람을 이겨 과거 이민진 5단이 정관장 배에서 세운 공적과 비슷하게 되어서 '정관장의 여인'이 두사람이 되었는데, 문도원 2단이 그때 정관장 배에서 7연승한 바람에 '정관장의 여인'이 세사람이 되었다.
문도원 2단은 남은 세 사람을 이길 경우 서봉수 9단이 세운 국제기전 단일 회수 9 연승 기록을 경신하는 '세기의소녀', '기적의 여인', 또는 '기록 경신의 금자탑을 쌓은 소녀' 같은 호칭을 들을 것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아쉽게도 7 연승에서 그쳤다. 그러나 7 연승은 보통의 기사로는 히말라야의 높은 봉우리처럼 아득하게 보이는 대단한 기록이라고 하겠다.

한편 박지은 9단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한국 여자 바둑을 견인했던 기사로는 조혜현 8단이 있다.
우승 기록은 박지은 9단에 미치지 못하지만, 루이 9단을 극복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중인데, 우승 기록을 보면 여류 명인전, 여류 국수전, 전자랜드배 주작부, 제1회 화정 창업배 3전 전승 우승(단체전), 제1기 여류 십단전 우승 등의 기록을 갖고 있으며, 조훈현, 이창호에 이어 역대 최연소 입단 기록을 갖고 있는(11세 11개월) 천재형 기사이다. 현재 고려대 영문과에 재학중이다. 조 8단은 전공인 영어를 살려서 영어 홈페이지로 한국인 보다는 국제적으로 더욱 잘 알려졌다고 하며, 최근에는 창작 사활집도 만들어서 여성 바둑 기사의 빛을 발하고 있다. ‘정관장의 여인’이라고 칭하는 이민진 5단은 매우 특이한 기사로서 2007년도 정관장 배 (국제기전)에서 5연승으로 한국의 우승을 견인하였고, 2008년도에도 3연승을 하였으나, 다른 국내 기전에서는 우승 기록이 없어서, 정관장 배와는 특이한 좋은 인연을 맺고 있으며, 최근에는 해설자로도 등극하여 활동하고 있는 중이다.

이창호, 이세돌 9단에 이어서 차세대의 1인자 자리에 오를 기사는 누구일까?
지금 떠오르는 새로운 별로서는 강동윤, 김지석, 박정환 7단이 제1순위에 올라와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작년도(20121년) BC 카드배와 TV 아시아 선수권 전에서 우승한 백홍석 9단 역시 그의 생애 최고의 해를 보내면서 대기 만성(大器晩成)의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차세대 별들과 실력 면에서 같거나 더 높으나, 나이가 이들보다 상당히 많아서 이세돌과 비슷한 기사들로는 최철한, 박영훈, 목진석, 조한승, 원성진 9단이 있다. 이들 5명의 기사들은 실력면에서 이창호, 이세돌과 거의 같은 수준의 뛰어난 기사들이나, 이창호, 이세돌 9단이 바둑 기량 뿐만 아니라 마음을 다스리는 마인드 콘트롤(Mind Control) 면에서 백지 한 장 차이가 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최철한의 대 이창호 전적이 이제50대 50을 넘어섰으니, 그의 기량이 얼마나 뛰어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더구나 2009년에 획득한 응씨배 타이틀은 국제기전 최고의 상금을 자랑하는 명실상부한 최고의 타이틀인 바, 비록 최철한 9단이 이창호, 이세돌의 우승 기록 숫자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의 실력은 의심할 바 없이 세계 최정상 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의 우승 기록을 보면 제8기,9기 바카스 배 천원전, 제47기 국수전, 제15기 기성전, 제2회 중환배, 제10기 맥심배, 제6회 응씨배 우승, 광저우 아시안 게임 남자 단체 바둑 우승, 제15기 박카스배 천원전 우승, 제54기 국수전 우승, 제16기 천원전 우승, 제7기 원익배 10단전 우승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만 12세에 입단하여 조훈현,이창호, 조 혜연에 이어 역대 4 번째로 최연소 입단을 하였었다.최철한 9단의 별명이 재미있다. ‘독사’가 그의 별명인데, 그의 바둑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단어라고 한다. 엄청난 승부 근성에서 나오는 끈기와 집념, 전투를 피하지 않고 오히려 전투를 유발시키며, 깔끔한 반면 운영보다는 이세돌 9단 식의 난해하고 복잡한 반면(盤面)으로 유도하여 상대방의 혼을 뒤흔드는 작전--등으로 이 별명이 붙은 것 같은데, 하필이면 독사냐? 다른 멋진 생물도 많은데---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으나 정작 본인은 “뭐, 괜찮은데.”라고 말한다 한다.
한편 박영훈 9단의 경우는 어떨까?
그는 1999년에 송태곤 9단과 함께 입단하자마자 불과 2년만에 천원전에서 우승을 하여, 최저단 타이틀 획득 타이 기록을 달성하였는데, 그 때 까지는 서봉수 9단이 2단 시절 명인위를 획득한 것이 기록이었다. 그 후 박카스배 한중 천원전, 제1회 중환배, 제15기 비씨카드배 신인왕전, 제16기 기성전, 제1기 영남일보배, 제18기 기성전, 제20기 후지쓰배, 제12기 GS 칼텍스배, 제9회 맥심커피배, 제13기 GS 칼텍스배, 제38회 하이원리조트 명인전 우승, 제12기 맥심커피배 입신 최강전 우승, 제39기 명인전 우승, 제17기 박카스 천원전 우승 등 최철한의 우승 기록을 능가하고 있다. 박영훈 9단의 바둑은 무엇보다도 그의 발상(發想)이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 할까? 매우 자유롭고 임기 응변에 능하고, 이창호를 능가하는 정밀한 끝내기가 주특기로 되어 있다.
한편 목진석 9단을 생각해본다면,
다른 10대 초반에 입단한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어렸을 때부터 신동(神童), 또는 괴동(怪童)이라고 불리웠는데,
그가 입단 후에 한국기원에서 기획한 기상천외한 대국, 즉 눈에 안대를 대고 바둑판을 보지않고서 대국을 하는 말하자면 ‘암흑대국’을 하면서 50수인가? 70수인가?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마치 옛날 중국 당나라 시대 바둑 고수인 왕적신(王積薪)의 바둑 설화를 연상하게 하면서 우리들을 놀라게 했던 기억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 이야기를 소개하면, 왕적신은 당시 안록산(安祿山)의 난으로 피난을 하게 되었는데, 현종과 양귀비의 피난 행렬을 뒤따라서 어느 산중에 혼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만 날이 어두어져서 잠잘 곳을 찾던 차에 마침 초가 집 한 채가 있어, 가보니 시어머니와 며느리 두 사람이 살고 있었다 한다. 방이 두 개 밖에 없었는데, 고부(姑婦)가 각각 하나 씩 쓰고 있어서 할 수 없이 처마 뜨락에서 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는데, 달도 없는 캄캄한 밤에 두 방에서 말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애야, 심심하기도 하고 우리 바둑이나 한 판 둘까?” 하고 시어머니가 말하자, “네, 그렇게 합시다. 한 수 가르쳐 주세요.”라고 말하면서 바둑을 두는데, 바로 암흑대국이었다는 것이었다. “동의 5, 남의 9에 두었습니다.”라고 며느리가 좌표를 말하자, “난 동의 5 남의 10에 두었네.”라고 말하는 식이었다. 왕적신이 깜짝 놀란 것은 물론이었다. 이와 같은 식으로 36 수 까지 진행하다가 시어머니가 말하기를 “바둑은 네가 졌다. 내가 아홉 집을 이겼는가 보다.” 라고 종국을 선언하였다.
천하의 고수들이라고 생각한 왕적신은 다음 날 피난길에 누추한 외관이었지만 의관을 갖추어 정중하게 예를 표한 끝에 바둑 한 수를 가르쳐 주기를 청하였다. 노파는 공수(攻守), 살탈(殺奪), 구응(救應), 방거(防拒)의 수법을 가르쳐 주었는데, 생각보다는 어렵지 않은 간략한 것이라서, 왕적신은 한 수 더 가르쳐 주기를 청하였는데, 노파는 “아니요, 지금 가르쳐 드린 것만으로도 인간 세상에서는 적수가 없을 것이요.”라고 말하면서 청을 거절하였다. 이에 왕적신은 허리를 굽혀서 예를 표하고 눈을 들자마자 두 여인과 초가집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한다.(박재삼 저, 바둑한담, 왕적신의 일화에서)
이는 물론 설화(說話)에 불과한 것인데, 그 내용이 매우 재미있다 하겠다. 왕적신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위기십결(圍棋十訣)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위의 설화와 목진석의 암흑 대국, 그리고 목 9단이 풍기는 따스한 성격, (조훈현과는 달리 일본의 사무라이를 연상시키지 않고 있다.) 뛰어난 두뇌, 그리고 중국어를 우리말과 거의 비슷하게 잘한다는 점---등등을 종합해 볼 때 그의 전생이 바로 왕적신이지 않겠느냐 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천기를 누설한 것인가?
그럼 조한승 9단은 어떠한가?
조 9단은 1995년에 입단하여 현재까지 모두 10회의 준우승을 하였는데, 과거 서능욱 9단의 기록을 갱신하지는 못하였지만, 준우승 횟수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세인들은 이를 두고 2%가 부족하다고 하고 있는데, 이는 승부욕이 약간 부족하다는 말로서 조 9단의 부드럽고 고운 마음씨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는 군대를 제대한 후에 국수전 2연패를 하는 등 일반적으로 군대에 갔다오면 성적이 나빠진다는 통념을 깨고 오히려 성적이 좋아지는 과거와는 다른 전통을 새우고 있는 중이다. 그의 우승 기록을 보면, 제11기 신인왕 전, 제7기 신예 프로 10 걸전, 제11기 박카승 천원전,그리고 바로 작년에 GS 칼텍스 배를 우승, 55기 56기 국수전 우승을 하였는데, 과거에는 주로 이창호, 이세돌, 구리 9단의 벽에 막혀서 준우승을 많이 하였다. 원성진 9단은 박영훈, 최철한 9단과 함께 ‘송아지 삼총사’라는 별명이 있는데, 다른 한편 ‘원 펀치’라는 별명처럼 그의 바둑은 물 흐르듯이 흘러 가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강렬한 수를 구사하여 승세를 확립하는 스타일이라서 이런 별명이 붙었지 않았나 싶다. 다른 삼총사에 비하여 우승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은데, 정작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영훈, 철한 친구들이 너무 성적이 좋았을 뿐, 자기는 착실하게 전진하고 있다고 어느 인터뷰에서 말하였다. 그의 우승 기록을 보면 17기 BC 카드배 신인왕전, 12기 박카스배 천원 전, 한중 천원전, 제15기 GS 칼텍스 배 우승, 제16기 삼성화재배 우승의 기록을 갖고 있다. 앞으로 본인의 말대로 착실한 성적을 거둘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삼성 화재배는 구리 9단을 상대로 우승하여 원9단의 진면목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구리 9단이 누구인가? 대 이세돌 9단의 성적이 대략 50% 정도의 엄청난 실력의 소유자이다.
차세대 포스트 이세돌로는 강동윤 9단이 있다.
그는 2002년에 입단하여 꾸준히 좋은 성적을 냄으로서 가장 강력한 차세대 1인자 후보 중 하나이다.
제5기 오스람 코리아배 신예연승전, SK 가스배 신예 연승 프로 10걸전, 제4기 전자랜드배 왕중왕전, 제7기 오스람배, 제1회 월드마인드 스포츠 남자 개인전, 제13기 박카스배 천원전, 제22기 후지쓰배, 광저우 아시안 게임 남자 단체 우승, 2011년 한국 바둑리그 우승 3개 부문 수상 등의 기록을 갖고 있다. 강9단의 특징은 바둑이 매우 끈질기다는 데 있다. 초반이나 중반에 불리하더라도, 한 발 한 발 꾸준하게 뒤 ?아가서 결국 따라잡는 바둑이 많은데, 이 창호 9단의 신중함에다 끈기가 합쳐진 느낌이다.
강동윤 9단과 함께 떠 오른 다크호스(dark horse)라면 김지석 8단이 될 것이다.
우승 기록은 제5기 한국 물가정보배 우승을 제외하고는 별로 없으나, 2009년에 최다승, 최고 승율, 최다 연승의 3관왕, 2012년 한국 바둑 리그 MVP 에 오르면서 장래 화려한 등극을 예고하였으나 우승 기록이 별로 없다는 것이 단점이다. 최근에 단연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신예 기사로는 박정환 9단이 될 것이다. 그는 다른 신예 기사의 공통적인 특징인 자유롭고 유연하며 창의적인 발상을 하며, 전투에 능하고 실리에 민감한 말하자면 전천후 최신예 전투기와 비슷하다고나 할까?그의 전적을 보면 2008년엠게임 마스터스 챔피언(MGame Masters Chamion)전 우승, 2009년 제4기 십단전 우승, 제14기 박카스 배 천원전 우승, 2010년에는 제5회 원익배 십단전 우승, 2010년 한중 통합 천원 전 우승, 2010년 광저우 아시안 게임 남자단체 우승, 2010년 국내 최연소 9단 승단, 2011년 KBS 바둑왕전 우승, 제24회 후지쓰배 우승, 제13기 맥심 커피배 우승, 제31기 KBS 바둑왕전 우승의 기록을 갖고 있다.
박정환 9단의 특징은 뚜렸한 특징이 없다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세돌과 이 창호의 바둑을 합쳐 놓은 것 같은 모든 면에서 높은 수준의 행마를 보여주고 있다 할 것이다.
한편 1990년 이후에 태어난 기사중 영재 입단 케이스로 현재 주목을 받고 있는 신민준, 신진서 초단, 그리고 변상일 초단이 현재 주목을 크게 받고 있다. 이들은 2013년 초에 고 하찬석 9단을 추모하며, 경남 합천군에서 기획했던 위의 세 기사와 이창호, 최철한, 박정환 9단과의 대국에서 신진서 군의 활약이 돋보였다. 즉, 그는 신민준, 변상일을 이겼을 뿐만 아니라, 이창호 9단도 이기는 기염을 토해냈었으며, 또한 연초에 중국의 90후 세대화 대국하는 특별 기전에서도 대략 50% 이상의 성적을 내어서, 앞으로 한국의 바둑 앞날을 밝게 비쳐주고 있는 상황이다. 이 신민서 군은 고향이 부산으로서 아버지는 바둑 학원을 경영하면서 아마 5단이며, 실제바둑 공부는 3급인 어머니에게서 배웠다고 하고 있다. 그 이외에는 특별한 수업을 받지 않아서, 순전히 인터넷 바둑으로 실력을 쌓았던 매우 특이한 케이스가 되고 있다. 입단 전에 약 6개월 동안 충암 도장에서 허장회 사범에게 배운 것이 전부이라고 하니, 그는 전생에 이미 유명한 프로 기사였으며, 현생에서 그 실력이 빛을 발하고 있다고 하겠으니, 과연 전생의 그는 누구였을까? 조남철9단? 일본의 기다니 9단? 이는 필자가 꼭 알고 싶은 사항이기도 하다. 한편 2012년 말 한국 바둑 리그의 대미(大尾)를 장식하며 크게 이름을 떨친 이동훈 2단도 앞으로 주목해야할 큰 재목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여류 기사로서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은 우선 박지연 3단이 있다.
차수권 도장 출신의 밝고 잘 웃는 이 여류 소녀 기사는 2010년도 지지옥션배 4연승과 삼성 화재배 예선 통과는 그렇다치고, 남자 기사도 히말라야 높은 산처럼 올라가기 어려운 농심 신라면배 홍일점 출전을 하게됨으로써, 몇 년 가지 않아서 한국 여성 바둑계를 주름잡는 한 사람이 될 것을 예고하였는데 결국 제17기 여류 국수전 우승과 제14기 여류 명인전 준우승을 하였다.
2011년도에 지지옥션 배에서 8연승을 기록을 달성한 최정 초단은 놀라움 그 자체이다.
광주에서 초등학교 3학년 때 벌써 타이젬 7단으로 바둑을 두었고, 무등산 검객 오규철 사범에게 사사하다가, 상경하여 유창혁 도장에 입문하여 입단하고, 입단하자 마자 단일 기전 단일 횟수 서봉수 9단의 진로배 9연승에 1승 모자란 8연승을 기록하였다. 이어서 2012년 말에는 여류 명인전 우승을 하였다. 앞날이 크게 기대된다고 하겠다.
그럼 한국기원의 입단의 산실이라고 칭하는 연구생 제도는 어떠한가?
바둑 초창기에는 프로기사 선발을 일반인들 중에서 하였으나, 70년 대 초반에 연구생 제도가 생겨서 바둑도 전문적인 교육을 하여 선발하는 제도가 생겼는데, 말하자면 ‘바둑사관학교’가 탄생한 것이다. 강훈9단, 백성호9단, 강만우 8단이 바로 1기 연구생 출신 기사이며, 도중에 중단 되었다가 1985~86년에 다시 부활하여, 이창호9단, 김원 6단이 부활한 연구생 1기 출신기사들이다. 그 이후로 입단 대회에서 연구생 출신들이 입단자들의 거의 전부를 차지했으며, 일반인 출신으로는 94년 김석흥 2단, 96년 김성래 초단, 97년 박성수 초단 등 3명에 불과하였다는 사실이 바둑 사관학교의 위력을 실증하고 있다 할 것이다. 연구생은 1군과 2군으로 운영되며, 1군이 1조~5조, 2군이 6조~10조로 되어 있으며, 각조 10명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이 연구생들은 매주 토, 일요일에 리그전을 벌여서 상위 4명은 한조씩 올라가고, 하위 4명은 한조 씩 내려가는 철저한 실력 위주의 등급제를 운영하고 있으며, 10조의 하위자 4명은 탈락하고 대기자 4명이 연구생으로 되는 제도로서 오로지 실력으로만 말해주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또한 다른 교육제도에 비해서 매우 냉정한 승부사 양성 제도라 할 것이다. 프로 기사 선발 제도를 보면 연구생 입단 대회가 매년 2회 열리고 일반인 입단 대회는 1년에1회, 그리고 여류 입단 대회가 매년 1회 열리고 있으며, 지방 연구생 입단 대회가 매년 1회 열리고 있고, 해외에서 바둑 보급에 힘쓰라는 의미로 외국인 특별 입단 제도가 있어서 소련의 미녀 기사 ‘샤샤’ 초단이 이 케이스로 입단하였다.
기타 특별 입단으로는 과거에는 세계 아마 대회에 우승하면 입단이 되는 제도가 있었으며, 김찬우, 유재성 프로가 이 케이스로 입단하였다. 그러나 이 좋은 제도가 없어지는 바람에 하성봉 아마 7단은 세계 대회를 우승하고도 입단하지 못한 불운의 기사가 되었으며, 하성봉 7단과 함께 이름을 날리던 홍 맑은 샘 7단은 아예 일본으로 건너가서 관서 기원의 입단 테스트에 합격하여 현재 일본에서 프로기사로서 활동하고 있으며, 하성봉 7단도 일본 입단을 꾀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나라 입단의 관문이 엄청나게 어렵다는 이야기를 하다보니 아마 고수의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연구생들의 실력은 매우 높아서, 가령 1군의 1조에 속한 연구생들은 당장 프로로 뛰어도 50 위권 안에 드는 고수들이며, 예를 들어서 2009년과 2010년에 시행했던 BC 카드배에서 활약한 연구생 1조 1위인 ‘나현’ 군은 본선에 올라가서 64강에 들어가는 대국인 중국의 위빈 9단과 격돌한 1월 13일의 기보를 보면 마치 이창호9단의 입단 초기 때의 바둑을 보는 듯하며, 나군은 반집 차로 위빈 9단을 이겼었다. 나군은 연구생 1조 1위를 계속 유지하면서 내신 1위로 자동 입단하였다.(연구생 1군 1조 1위는 내신 1위로 자동 입단됨)
그러나 가장 확실한 입단은 세계 대회에서 발군의 실력을 기록하는 일인데, 세계 대회 8 강에 진입하면 아마추어는 자동 입단이 되기 때문이다. 연구생으로서 이주형 군 외에도 3명이 BC 카드배 본선에 진입하여 연구생들의 뛰어난 실력을 입증하였다. 한편 2010년도 LG배 프로 아마 통합 예선에서 돌풍을 일으켰던 박영롱 아마 7단이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고 있었다. 다음은 박영롱 7단에 관한 글로서 타이젬 바둑 19로 공감 게시판에 올라와 있는 내용이다.

최근, 아마 기사에게도 참가가 허용된 프로기전에서 아마기사들의 활약이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박영롱(21)이 그 아마 돌풍의 주역이다. 최근 각종 프로기전 예선에서 프로기사들과의 전적이 8승 2패 승률 80%이다. 그의 전적을 살펴보자.
아마기사 박영롱은 프로기사 서무상에게 2승, 나머지 6명의 프로기사에게 6승을거두었다.
그리고 초일류 기사인 박영훈9단에게만 2패를 했다. 박영롱이 이긴 프로기사들의 랭킹에 주목하라. 랭킹으로만 보아도 만만한 기사들이 아니다. 최철한9단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초일류강자. 세계최고 상금기전인 응씨배 우승자이자 한국랭킹 3위. 다음으로 최원용, 이춘규도 랭킹 50위 이내에 드는 강자이다. 권형진2 단 - 서무상7단 - 이상훈9단도 100위권 이내의 강자들.박영롱에게 두 번의 패배를 안긴 기사는 한국랭킹 5위 박영훈9단 한 명뿐. 이런 쟁쟁한 프로기사들에게 8승 2패를 기록한 기사가 어찌 아마추어라고 할 수 있는가? 박영롱을 프로라고 가정하면 랭킹과 단위는 어느 정도에 해당할까? 단순히 그가 이긴 상대들의 랭킹과 단위를 평균내보면 단위 평균은 6단이요, 태초랭킹은 68위, 배태일랭킹은 62위에 해당한다. 박영롱, 그는 아마7단이 아니라 프로6단 이상, 프로랭킹 60위에 랭크될 수 있는 엄연한 프로의실력자이다. (2011년 8월 16일 박영롱 군은 입단 대회에서 가장 먼저 8승을 올려서 프로가 되었다.)

2010년말 확정된 입단 제도
한국기원은 지난해 연말 새롭게 개정한 입단제도를 통해 매년 12명씩을 선발한다.
과도기인 2011년에는 남녀 내신 입단자 1명씩 이외에 하반기 일반입단대회를 통해 7명을 선발하며 연구생입단대회 1명, 지역 연구생 입단 대회 1명, 여자입단대회에서 각각 1명을 선발한다. 2012년부터는 1∼2월 열릴 예정인 일반입단대회에서 7명을 뽑고, 7∼8월 개최될 여자입단대회에서 2명, 만15세 미만을 대상으로 하는 영재 입단대회에서 2명, 지역연구생 입단대회에서 1명을 뽑게 된다. 현재 아마추어들의 실력 수준은 어느 정도 될까? Naver에 올라온 기사 내용으로는 현재 아마추어 고수들은 초일류, 일류, 이류의 3 단계로 분류할 수 있다고 하며, 그 실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즉 “제목: 아마추어 강자들의 현 주소 내용: 연구생은 1조부터 10조까지 있으며, 각조는 10명, 도합 100명으로 구성됩니다(남자의 경우) 일단, 아마추어 강자라면 몇 그룹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보세요) 초1류, 1류, 2류---
초1류 - 연구생 최상위조(1조, 2조)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기사, 연구생 최상위조에서 나온 지 꽤 오래되었으나 기량이 여전한 일부기사(하성봉, 강창배가 대표적) 이 레벨은 타이젬 9단을 유지할 수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당장 프로로 가도 프로랭킹 50위권~60위권 대에 진입할 겁니다. 해당기사(개인적인 견해임을 밝힙니다) 함영우, 송홍석, 유병용, 이상헌, 온승훈, 김종해, 박시열, 홍석의(독학), 김남훈, 하성봉.
1류-연구생 상위조(3조, 4조정도 까지)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기사, 연구생 최상위조에서 나온 지 꽤 오래된 기사의 대부분, 비연구생 출신의 전통의 아마정상급 기사, 이 레벨은 타이젬 9단을 근근이 버티며 가끔 8단에 떨어진다고 보시면 됩니다. 해당기사로는 연구생출신-김정환, 김지원, 김샛별, 김현찬, 김성진, 김상준, 김재훈, 김은국, 김재린, 김영권, 김동휘등등 약50명 이상. 비연구생 출신-김경래, 김동섭, 김세현, 김동근, 김정우, 이용만, 이학용, 이철주, 박성균, 박영진, 박강수, 박휘재, 공한성, 문미열, 심우섭, 임동균, 조민수, 조병탁, 최호철, 최철수 등등. 속칭 전국구입니다. 초1류 +1류 아마정상급으로 부를 수 있습니다.
2류-연구생 하위 조(5조, 6조 정도 까지)에서 나온 지 얼마 안되는 기사, 연구생 상위 조에서 나온지 오래된 기사, 비연구생 출신의 전통의 아마 강자 급 기사, 이 레벨은 타이젬 9단과 8단을 왔다 갔다 하는 정도입니다. 해당기사는 많아서 생략합니다(100명 쯤 되지 않을 런지)보통 특정 지역 최고수입니다. 속칭 지역구입니다.
2류 아마준정상급으로 부를 수 있습니다. 초1류와 1류 사이는 반 칫수 정도 차이. 1류와 2류 사이역시 반 칫수 정도 차이. 참고로 기원 강 1급(단으로 치면 아마6단급)은 아마준정상급에 반 칫 수 내지 한 칫 수 모자라는 수준, 타이젬 급수로는 8단급이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심우섭씨(공인 아마7단)는 아마정상급에 속하나, 김지명씨(공인 아마6단)는 그냥 상당한 고수급입니다(대략 타이젬8단정도?). 연예인 중에선 엄용수씨(타이젬 7~8단급?)가 잘 두며, 가수 김장훈씨(타이젬 6단급?)도 꽤나 둡니다.
cf. 저는 타이젬8단을 두는 사람으로 온라인, 오프라인 등 바둑대회 수 십 회 경험한바, 답변을 신뢰하셔도 될 겁니다.
2008년 10월 29일 naver 지식in”이상이 naver에 올라온 아마추어 고수들의 현주소인데, 우리나라는 마치 중국의 탁구 선수층이 투터운 것처럼 바둑의 선수층이 매우 두터운 것이 특징이다.
바둑의 해설자는 사실 아마추어들과 가장 친숙한 기사들이다.
중요한 대국의 해설뿐만 아니라 바둑의 강좌까지 맡아서 아마추어들의 기력 향상에 일조하고 있으며,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해설자들은 어떻게 보면 연예인들보다 더 인기가 높다고 할 수 있다. 가끔씩 조훈현, 이세돌등 초일류 기사들이 나와서 해설을 하는 때도 있으나, 보통은 해설 전문 기사들이 바둑 해설 뿐만 아니라, 바둑 주변의 여러 가지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재미있게꾸며서 전달하고 있다. 해설하면 우선 머리에 떠오르는 기사들은 한철균, 조대현, 김승준, 양재호, 백성호, 장수영 9단과 윤현석, 김영삼, 윤성현, 김영환, 김성룡 9단이 있는데, 이들의 뛰어난 해설은 바둑 펜들을 프로 기사와 친숙하게 하는데 일등 공신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프로로서의 풍부한 실전 경험과 바둑에 관한 깊은 지식을 바탕으로 많은 아마추어들에게 바둑의 진정한 세계를 알려주고 있다. 이들 중 양재호 사범님은 한국기원의 사무총장에 취임하여 공무가 많아서 최근에는 해설을 중단하였다. 이들 외에도 탁월한 해설을 하여 항상 바둑 팬 들과 친숙한 기사들로는 송태곤, 김수장, 박정상, 양건, 김만수, 양상국, 노영하9단 등이 있다. 특히 근래에 안달훈 8단, 원성진 9단, 이성재 9단이 해설에 가담하여 해설 면에서 더욱 충실도를 더해가고 있다.
위의 해설자중 매우 특이하게 코믹(comic)하고 정곡을 찌르는 말투로 ‘해설의 달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사람으로 한철균 7단이 있다. 그는 어떤 해설이든 그 때의 상황에 맞는 독창적인 말을 만들어서 시청자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한편 이들 남자 해설가들과 함께 해설의 분위기를 한 단계 높이 올리고 부드럽게 하는 여성 기사들이 있다. 프로 기사로는 박지은, 이민진, 김효정, 이정원, 이지현, 한혜원, 하호정 2단등이 있으며, 여류 아마 기사로는 윤지희, 배윤진, 현미진, 이승연, 최유진, 도은교, 강나연 5단이 있으며, 남자 아마 기사로는 박치문, 김동섭, 박창규, 심우섭, 김지명 6단등이 있다. 이들 중 김효정 2단은 군(軍)의 바둑 보급에 열심이고, 강나연 5단은 바둑 기초 강의에 탁월한 솜씨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들 중 김영삼 8단은 현미진 4단과 프로 부부 기사 1호를 기록하였고, 하호정 3단은 이상훈 9단과 결혼하여 제2호가 되었다. 또한 최근에 다시 깻소금 신혼부부로 등록한 기사로는 박병규 7단과 김은선 3단이 부부 기사 3호가 되었다.
한혜원 3단은 개그맨 김학도 씨와 결혼하였으며, 해설에 있어서 대체로 남성 기사는 해설자로, 그리고 여성 기사는 MC로 연출을 하는데, 특이하게 이민진 5단은 해설자로 연출하여, 치밀한 설명, 부드러운 목소리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몇 년 전 박지은 9단은 BC 카드배 해설로해설자의 선을 보였는데, 매우 차분하고진지한 해설을 하여,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여성들이 진출하여 남성들과 대등한 활약을 하는 것처럼, 바둑 해설 분야에서도 앞으로 여성의 파우어(ower)가 점점 커질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승연 5단은 다른 해설자와는 상당히 차별화 되어서, 자기 목소리를 낸다할까, 혹은 해설자와 MC의 중간 선상에서, 재치있고 위트 넘치는 발언을 한다. 그러나 최근에 출연을 하지 않아서 결혼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하게 하는데, 그녀의 활달한 MC 활동을 볼 수 없어서 아쉬운 점이 있다.
아마추어 기사로 중앙일보 바둑 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박치문 7단은 해설에 있어서도 넓은 지식과 뛰어난 바둑 실력으로 바둑 팬들을 만족하게 하고 있다. 과거 박치문 기자가 목진석 9단과 함께한 명국 해설 프로는 깊고 오묘한 바둑의 세계를 보여주었는데, 마치 80년 대 일본 기원에서 발행한 ‘명국 세해(細解)’에서 임해봉 9단의 해설을 보는 듯 했다는 것이 필자의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그 프로가 없어져서 몹시 아쉬운 감이 있던 차에, 양재호, 유창혁9단과 함께 몇 년 전에 그와 비슷한 프로를 시작했는데, 제목이 '한국 바둑 세계 제패사(制覇史)'이다. 양사범, 유사범과 박 기자의 대담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 프로는 공식 라이브(Live)로 진행하는 프로그램과는 달리 부담감 없이 웃으면서 과거를 회상하며, 바둑 내용과 관련된 많은 비하인드 스토리(behind story)가 있어서 매우 재미있는 프로가 되고 있다. 한편 최근에 새롭게 생긴 '명국을 찾는 사람들은 위의 제패사에 못지 않은 매우 심도 있고 자세한 해설을 하여주어 프로 바둑의 깊이가 어느정도인지 느끼게 해주는 멋진 프로그램이 생겼다. 해설은 윤성현 9단과 심우섭 아마 7단이 맡고 있는데, 윤 9단의 해설을 들으면 따뜻한 그의 인격이 전달되는 듯하여 항상 미소를 지으면서 듣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깊이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 즉, 해설자나 MC의 출연 빈도수에 관한 문제이다. 이들 해설자와 MC는 시청자의 인기 순위가 물론 있어서, 몇 사람은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바둑 TV 시청자 기호는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고르게 출연하게 하는 것이 시청자들을 고르게 만족하게 하는 것이 되고, 또한 출연자들도 형평성을 공정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고르게 출연하게 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편 프로대 아마의 특별 이벤트(event) 기획 대국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기사들이 있다. 우선 김철중 3단이 있다. 김 3단은 아마 시절 아마 바둑계를 평정하면서 80년 대 재야의 고수로 군림하다 1990년에 입단하여, 비록 프로에서는 좋은 성적을 내지는 못하였으나, 바둑 TV에서 특별 기획한 대국에서 대 아마 전적은 모든 대국에서 불과 몇 판만 졌을 정도로 놀라운 성적을 보여주었다. 그는 ‘접바둑의 귀재’로 아마 팬들에게 뚜렷하게 인각되었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 또다시 ‘접바둑의 도사’가 나타났는데 김영환 9단이다.
그 역시 수없이 많은 대 아마 접바둑에서 불과 몇 판을 지는 경이로운 기록을 남겼는데, TV 프로 제목이 ‘영환 도사를 잡아라’로서 도사 복장을 하고 나올 때는 영락없이 신선 도사를 닮았었다. 이 두 사람은 정식 타이틀 대국에서는 우승을 하지 못하였으나, 프로의 바둑 세계가 얼마나 심원한 지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바둑 강국은 물론 중국이다.
중국 바둑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진조덕(陣祖德)9단이 중국의 바둑을 일으켜 세운 후, 불세출(不世出)의 명인인 섭위평(攝衛平)9단이 中日 프로 대항전에서 크게 위세를 떨쳤다. 그는 당시 일본의 최정상 기사들을 거의 이겨서 중국 바둑의 앞날을 밝게 해 주었는데, 1998년도 제1회 응창기(應昌期) 배 대회에서 결승까지 올라 한국의 조훈현 9단과 겨루었고, 준우승에 머무르면서, 이 대국 이후에는 그다지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였다. 아마도, 그 대국이 크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되어 진다. 중국의 바둑이 한국의 바둑, 특히 이창호의 벽에 막혀서, 네웨이핑과 비슷하게 도중하차한 기사로는 마요춘(馬堯春)9단이 있다. 그의 바둑은 변화와 임기응변에 능하여, 당시 국제기전에서 많은 타이틀을 획득하여 중국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었는데, 여러 번 국제기전 결승에서 이창호를 넘지 못하고, 이후 섭위평과 비슷한 상황이 되었으나, 바둑 지도 면에서는 탁월한 기량을 발휘하여, 마치 한국의 ‘태능 선수촌’의 촌장 비슷하게, 대표 선수들의 훈련을 치밀한 계획표대로 수행하여, 현재 중국 바둑이 한국과 쌍벽을 이루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섭위평, 마요춘 9단들과는 달리 이창호의 벽에 막혀서 어려움을 겪었으나, 끈질긴 노력 끝에 드디어 재기에 성공한 기사로는 창하오(相昊) 9단이 있다. 중국의 ‘이창호’란 별명을 가진 창하오 9단은 마요춘과 비슷하게 이창호 9단의 벽에 막혀서, 준우승을 수 없이 하다가 드디어 제5회 응창기 배에서 우승을 하여, '세계 최대의 기전 우승, 준우승 행렬의 종식, 그리고 이창호의 벽을 넘기, 중국 바둑의 한 단계업그레이드(u-grade)하기' 등의 일을 일거에 이루어 내어서 인간 승리의 예를 보 여주었다. 창하오의 끈기는 바로 만만디(느리지만 착실하게 전진하는 중국 특유의 정신)의 중국 정신을 보여주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근래에 두각을 나타내고, 자타가 공인하는 중국 1인자이자 세계 1인자로 인정을 받았던 사람이 바로 구리(古力) 9단이다. 기풍이 침착, 냉정하고, 전투에 능하며, 실리와 세력에 균형을 잘 잡아가면서 두는 기사로 알려져 있다. 구리와 상위 구룹을 이루고 있는 기사로는 콩지에 9단, 천야오에 9단, 류싱 9단, 저우루이양 9단, 튀자시 8단, 씨에허 9단, 위빈 9단, 저우허양 9단, 뤄시허 9단, 왕시 9단, 왕레이 8단, 후야오이 9단, 황이중 9단, 박문요 9단, 구링이 7단 등을 들 수 있겠는데, 이 중 박문요 9단은 한국인 2세이며, 한국인 2세 여류 기사로는 정관장배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었던 송용혜 7단이 있다. 중국 바둑의 최근 경향은 1990년 이후에 태어난 소위 ‘90 후 세대’ 들의 활약이다.
이들은 나이가 어린 관계로 상대방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자기류의 바둑을 구사하여, 가령 2012년 상반기에는 이세돌9단 같은 한국의 초 일류 기사들을 여러 사람 잠재우고, 중국의 무서운 미래를 예고하였다. 특히 삼성 화재배 우승을 하였던 장웨이지에나 또는 판팅위, 펑라야오, 탄샤오, 파오원야오 등의 기사들은 한국의 초 일류 기사들과 대등한 실력을 갖추고, 한국의 영재 입단 제도에 의한 나이 어린 영재들의 바둑계 진입을 촉구하고 있는데, 다행히 앞에서 말했듯이 신진서, 신민준, 변상일, 이동호 등의 영재들이 중국의 영재들과 대등한 실력을 갖추고 있음이 확인되면서 한국의 미래를 상당히 밝게 비쳐주고 있다.한편 일본의 바둑은 어떠한가? 사실 바둑의 발상지는 중국이나,그 바둑을 발전시 키고, 프로 제도를 정착시켜서 근대의 바둑으로향상시킨 나라는 일본이었다.
지금부터 거의 300 여 년 전부터 프로 바둑이 정착되어 일본 최고의 고수인 본인방을 선발하는 어성기(御城棋), 즉 당대의 실권자인 막부의 쇼군(역대 무신 정권의 막부(幕府)의 수장(首長)) 앞에서 바둑을 두는 제도가 정착되어 일본의 바둑은 실질적 인 성장을 계속하였다. 우리에게 알려진 최고의 어성기 실력자는 본인방 수책(秀策)인데, 그는 도책(道策),오청원과 함께 일본 바둑의 3대 천재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고, 수책의 ‘어성기 기보 모음’도 책자로 나와 있을 정도이다. 이 일본의 전통 본인방의 맥은 1900년대 초 ‘불패(不敗)의 명인’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던 본인방 수재(秀哉)를 끝으로 바둑 명문의 계보가 마감되었는데, 그 이후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오청원 9단과 조치훈 9단의 스승인 기다니(木谷實) 9단이 과거와는 다른 신포석(新布石)을 연구하여, 이를 기계(棋界)에 전파하여 오늘날 우리가 두고 있는 현대 바둑의 초석을 마련하였다. 특히 오청원 9단은 그 당시에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3.3이나 천원, 그리고 그 당시에는 잘 두지 않았던 화점을 과감하게 두어서, 창의력의 진수를 보여주었는데, 3.3은 ‘면도날’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던 사카다(坂田榮男) 9단이 애용하여 좋은 성적을 내었고, 조치훈 9단도 심심치 않게 이 3.3을 두었었다. 천원은 포석 과정에서 너무 허하다는 이유로 두지 않게 되었는데, 화점은 오늘날 가장 보편적으로 두게 되었으며, 두 곳의 화점을 포함하는 삼 연성을 두어 대 세력 작전을 펴는 기사로는 다께미야(武宮正秀) 9단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창호 9단이 천하를 호령할 때 이 화점을 매우 애용하였는데, 스승인 조훈현과의 사제대결일 펼칠 때는 보통 처음 4수는 화점을 두었던 것이 기억난다. 일본의 현대 바둑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을 들라하면 당연히 오청원 9단을 누구나 말할 것이다.
루이나이 9단의 스승이기도 한 오청원 9단은 바둑 기술면에서 불세출의 천재 기사일 뿐 아니라 용모가 수려하고 인품이 단아하며, 무엇보다도 현대 바둑의 초석을 만들었다는 데에서 오 9단의 비중이 크다 하겠다. 1914년 중국 복건성(福建省)에서 출생했고, 외조부는 청나라 말기의 중신(重臣)이었고, 부친 오의(吳毅)는 일본 유학을 가서, 동경제국대학(지금의 도쿄대학) 법과를 졸업하였으며, 그의 형은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과 메이지 대학(明治大學)을 다녔는데, 두 대학의 바둑부 주장으로 있으면서 와세다 대학도 메이지 대학도 모두 우승을 따냈을 정도로 기재가 출중하여 일본 기원으로부터 2단을 인허 받았다고 한다. 한편 그의 누이동생도 상하이에서 바둑 월간지의 편집 일을 맡아보았다 하니, 바둑 명문가라고 할 수 있다.
오청원 9단의 바둑 수업 과정을 보면 1926년에 북경에 유람차 왔던 일본 기원 소속의 이와모도 6단과 대국을 하고, 그 다음에는 이노우에 5단과 대국을 하여 그 기보를 조훈현 9단의 스승이기도 했던 세고에(瀨越憲作) 9단이 면밀 히 검토한 끝에 오 소년의 도일을 적극 추진하게 되었다고 한다. 일본에서의 바둑 수업을 시작한 오청원 9단의 대국 전적은 화려 그 차체로서, 1928년 일본 기원 시험기(試驗棋)를 통과하여 일약 3단으로 인허 받았고, 30년 승단 대회에서 14승 1패, 32년 승단대회에서는 15승 1패로 5단이 되고, 33년 일본 선수권전에서 우승하 고, 그해 10월에 본인방 슈사이(秀哉) 명인과의 기념 대국에서 삼삼(三三), 천원, 화점의 신포석을 두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였으며, 이 무렵 일본 바둑계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조치훈의 스승이기도 한 기다니(木谷實) 5단과의 대국에서도 신포 석을 사용하여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오청원 9단 하면 물론 치수고치기 10번 기가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오를 것이다. 이 치수고치기 10번기는 총 10회를 두어서 치수를 조정한다는 말하자면 과거 한국기원에서 프로 아마 치수고치기 위험 대국과 비슷한 이벤트(event)성 기획이었는데, 여기서 오청원 9단은 당 시의 거의 모든 고수들을 이겨서 군계일학(群鷄一鶴)의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오청원 이후 지금은 세계 대회에서 모든 고수들을 이긴다면 오9단의 치수고치기 10번기에 버금가는 성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국의 이창호9단의 전성기 때가 바로 그랬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이창호 9단의성적은 바둑 역사상 그야말로 불세출의 기록이라고 할 만하다.
한편 기다니 9단은 어떠한가?
기다니 9단은 앞에서 말했던 바와 같이 오청원 9단과 함께 한 시대를 풍미한 뛰어난 기사이었는데, 제자들 사랑으로 더욱 유명한 분이다.
기다니 도장은 마치 우리나라의 기원 원생들이 권갑룡 도장, 또는 유창혁 도장에서 공부를 했던 것처럼 사적(私的)으로 공부를 했던 도장이었는데, 조치훈이 공부를 시작하던 당시에는 10명 정도의 숙식을 기다니 9단의 집에서 하는 이른 바 내제자(內弟子)가 있었고, 또한 그정도의 통학 제자가 있었다 한다. 조치훈 9단이 6세 때 도일(渡日)하여, 기다니 도장에서 공부를 하게되니, 당시 기다니 도장의 사형(師兄) 또는 사제(師弟)로는 고(故) 가또(加藤) 9단, 임해봉(林海峯) 9단, 다께미야(武宮正秀)9단 등이 있고, 한국의 조남철, 김인, 하찬석, 윤기현, 9단등 기라성 같은 고수들이 바로 이 기다니 도장 출신이다. 조훈현 9단이 도일했을 때, 기다니 씨는 자기의 제자로 받아들이려 했는데, 그만 뢰월헌작(瀨越憲作) 9단에게 가게되자, 몹시 아쉬워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데, 기다니 9단은 그만큼 제자에 대한 애착이 컸다고 알려져 있다. 조치훈 9단이 막 일본에 갔을 때, 마침 기다니 도장 출신 100단 돌파 기념일이 있었는데, 기념대국으로 임해봉 9단에게 5점을 깔고 두어서 이겼다고한다. 2009년 10월에는 권갑룡 도장 200단 돌파 기념일이 있었는데, 현재 기다니 도장은 그 맥을 계속하면서 2000년 3월에는500단을 돌파하였다 한다. 기다니, 오청원 9단 이후 우리의 기억에 남는 유명했던 기사로는 우선 ‘면돗날’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사카다(坂田榮男) 9단이 있다.
그러니까 오청원, 기다니 천하 이후, 고천격(高天格) 9단이 한동안 일인자로 군림해오다가, 사카다 시대가 열렸는데, 이 사카다 9단도 일본 바둑 역사상 뺄 수 없는 위대한 고수 반열에 있는 사람이다. 기풍이 실리에 민감하고, 발이 빠르며, 수 읽기가 날카로워서 위의 별명이 붙었다고 할 수 있는데, 조치훈 9단이 크게 성장하는데 있어서, 사카다 9단은 최대의 장벽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사카다 9단을 극복하는 순간 조치훈 9단의 시대 가 시작되었다고 할 정도였다. 조치훈 9단이 1975년에 생애 최초의 공식 타이틀인 일본 기원 선수권전에서 사카다 9단과의 5 번기 결승 대국이 벌어졌었는데, 그 때 조치훈은 2연승을 하여 승리를 눈앞에두었었는데, 그만 내리 3연패하여 타이틀 획 득에 실패하였다. (이세돌 9단도 LG 배 결승전에서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하였다.) 사카다의 벽을 넘기 직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해 조치훈은‘프로 10걸전’에서 우승함으로서 드디어 일본의 최정상으로 힘차게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사카다 이후 우리의 뇌리에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는 기사로는 후지사와 9단일 것이다.
조훈현 9단의 실질적인 훈련 교관이었다고 알려진 후지사와(藤澤秀行) 9단은 매우 특이한 기사로서 유명하였다.
어린 시절 일본 기원 원생으로 출발하여 바둑 인생을 살았었는데, 많은 기전(棋戰)의 제1기 타이틀 회득자로서 유명했으며, 일본 타이틀 서열 1위인 기성전을 무려 6연패하였는데, 그는 늘 말하기를 “난 매 년 한 번만 우승하면 된다”라고 하였다는데, 그만큼 이 기성전에 쏟아 붇는 그의 열정은 대단했다고 한다. 즉, 그는 술을 좋아해서 늘 술에 취해 있었는데, 기성전이 시작되기 몇 달 전부터는 완전히 술을 끊고, 바둑 연마에 몰두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의 바둑은 뛰어난 감각과 화려한 운석으로 유명했는데, 그래서 현현각(玄玄閣)에서 펴낸 일본 명국선(名局選)에서 그에 관한 책명이 ‘화려(華麗) 등택수행’이다. 그는 조훈현과 조치훈을 집에 초청해서 지도 대국을 많이 두었었는데, 그래서 두사람의 제2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다.
조훈현9단이 현해탄을 넘어서 한국에 가 7개의 타이틀을 획득할 무렵, 이 후지사와 9단은 갑자기 조훈현 9단이 보고 싶어서 술에 취한채 옷가방도 제대로챙기지 않고서, 김포 공항에서 내리자 세관원이 매우 이상한 눈초리고 보았다고 한다. 아무런 짐도 없이 공항에 내리는 사람이 여태껏 없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는 3일 동안 한국에 머물면서 관광이나 기념 대국 같은 것은 전혀 하지 않고, 호텔 방에서 조훈현과 바둑을 두었던 모양이다. 조훈 현이 귀국할 때, “공부 열심히 해, 그렇지 않으면 때려줄테다”라고 했다는데, 실력이 계속늘어서 매우 흡족했다는 감상이 그의 자서전 “괴물 슈우꼬”에 실려 있다. 여하튼 당시 일본에서는 “50수 이하에서는 후지사와의 착점(着點)이 최고다” 라는 말이 유행했다고 한다.
자, 이쯤해서 한국의 바둑 기사로서 일본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기사로서 조치훈 9단을 말할 때가 되었다.
조치훈 9단은 4살때에 아버지나 형의 손에 이끌려 기원에 출입하게 되었는데, 출입한지 불과 1년만에 아마추어 5단의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형인 조상연이 먼저 일본에 갔고, 조치훈은 6세 때에 도일하게 되었는데, 필자가 중학교 2학년 때에 바둑 신동이 일본에 간다고 신문에 크게 나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형 조상연은 그리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자, 동생 조치훈의 뒷바라지를 열심히 하기로 마음을 고쳐먹고 동생의 모든 어려운 일을 도맡아서 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이세돌9단의 형인 이상훈8단(小 이상훈임, 大 이상훈은 9단임)이나, 이창호 9단의 동생인 이영호씨가 각각 동생과 형을 위하여 헌신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것이다.
그가 기다니 도장에 들어가서 입단하기 까지 이국에서 심리적인 갈등을 많이 겪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승부욕이 매우 강하여 입단 시합에서 지고 나서 자살을 생각했다는 무서운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조치훈의 어록 중에는 “목숨을 걸고 둔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후지사와 씨의 조치훈에 대한 평가를 보면 조훈현과 비교를 했던 말이 매우 흥미롭다. 즉, “치훈이도 나에게 곧잘 배우러 오거나 집에서 자고 가거나 한다. 허지만 훈현과는 완전히 반대이다. 3살쯤 아래인 치훈이는 현실파로서 집차지가 짭짤하고 끈기가 강한 기풍이다. 이에 비하면 훈현이는 진실성이 부족하다. 감각으로 착점을 선택한다. 이른바 승부사 근성에서 치훈이가 훨씬 위인 것같다. 훈현이의 좋은 점은 독창적인 감각이 날카롭다. 요컨대 나의 기풍을 그대로 닮았다”라고 그의 자서전에서 말하고 있다.
조 소년은 11세 때에 입단하였는데, 무려 40 여 년 동안 일본에서의 최연소 입단 기록이었는데, 최근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후지사와 9단의 손녀인 초등학교 5학년 생 후지사와 리나(藤澤里采)양이 11 세 6개월 만에 입단하여 초치훈의 11세 9 개월을 3개월 앞당기게 되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후지사와 리나 양이 일본 관서 기원에서 입단한 홍맑은 샘 초단이 운영하는 기원의 원생이었다는 점이다.
현재 홍 맑은 샘 사범은 일본의 유망주들을 가르치면서, 한편 일본의 기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위하여혼신의 힘을 쏟고 있는 중이다. 또한 일본 아마 명인전에서 준 우승한 하성봉 아마 7단은 홍 맑은 샘 도장에서 사범으로 어린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는데, 조만간에 일본 프로 기사로 등극할 것이 예상되고 있다. 그후 앞에서 말했듯이 조치훈은 승단 기록도 역시 연속적으로 일본의 기록을 깨면서 최연소 9단이 되었는데, 그가 5단 시절 “5단이 되어서 얼마나 기쁘냐” 라고 말하자, “나는 5단이 되기 위하여 일본에 온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던 일화는 유명하 다. 타이틀 쟁취를 향한 높은 야망을 은연중 나타낸 것이다.
그는 75년에 프로 10걸전 우승을 시작으로 2년 후에는 왕좌전 타이틀을 따고 계속해서 우승을 하면서 각광을 받기 시작했는데, 80년에 오다깨로부터 명인전 우승을 접수하자 온 한국이 떠들썩하고, 어린이들 사이에 바둑 붐이 일었었다. 80년에 한국에 금의환향(錦衣還鄕)하였고, 타이틀 쟁취로서 5단시절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였다. 그는 최연소 타이틀 획득, 최초 동시에 대삼관(기성, 명인, 본인방) 획득, 사카다의 타이틀 획득 기록 경신, 그리고 교통사고 후에 다시 대 삼관 타이틀을 획득하여 동일인 동시 두번째 대삼관 타이틀 획득 기록, 그후 본인방을 10연패하여 타이틀 유지 최장 기록 등 일본의 바둑 역사를 다시 쓰는 쾌거를 이룩하였다. 조치훈 9단은 한국 사람의 우수성을 내외에 널리 알린 자랑스러운 한국인들 중 한 사람인 것이다.
조치훈과의 기다니 도장의 선후배로서 당시에 뛰어난 성적을 냈던 기사는 누구일까?
조치훈 9단과 기다니 문하생으로서 입단 시기도 비슷하고 그 후에 최대의 라이벌(rival)로서 서로 우승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조치훈 못지않게 대 삼관을 비롯해서 일본의 여러 기전에서 수많은 우승 기록을 갖고 있었던 기사는 고바야시(小林) 9단이다.
고바야시는 별명이 ‘지하철(地下鐵)’이라고 하는데, 극단적인 실리를 추구한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 스승인 기다니 9단의 기풍이 초반에 최대의 실리를 챙겨놓고서, 나중에 천천히 적진의 한 가운데를 침입하여 절묘한 타개를 하면서 승리를 확정짓는 것이었는데, 고바야시9단과 조치훈 9단은 스승의 기풍을 가장 충실하게 답습한 기사들이라고 할 수 있다. 조치훈의 별명이 ‘폭파 전문가’인데 이 역시 적진에 특공대를 침투시켜서 폭파하는 전술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실리 추구의 기풍을 그대로 표현하는 별명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대부분의 기사들이 실리와 세력의 균형을 꾀하면서 운석(運石)을 하는 반면 극단적인 세력 위주로 바둑을 두어 좋은 성적을 내면서, 그 호방한 기풍으로 아마추어 펜들이 많이 좋아했던 기사로는 다께미야(武宮正秀) 9단이 있다. 화점 3 곳을 연속적으로 두는 3연성 포석은 그의 전매특허(專賣特許)인데, 사실 중앙에서 집을 짓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로서, 그의 이론에 의하면 중앙에 집을 지으려는 것이 아니고, 중앙을 가장 자연스러운 형태로 운석하여 상대의 돌이 공격권에 들어오면 공격을 위주로 바둑을 두어서 결국에는 실리의 균형을 맞추면서, 두터움을 끝까지 유지하여 승리를 거둔다는 것으로서, 그의 기풍에 관한 별명은 ‘우주류(宇宙類)’이다.
돌의 흐름이 천의무봉(天衣無縫)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간다는 의미에서의 한 말이다.
한편 조치훈 9단의 사형(師兄)으로 이름을 날렸던 기사로는 오다께(大竹) 9단과 임해봉 9단이 있다.
조치훈 9단이 80년도에 바로 이 오다께 9단으로부터 명인 위를 접수 하고난 후 비약하였는데, 오다께 9단의 별명이 ‘미학(美學)의 오다께’이다. 그만큼 바둑의 모양을 중시했다는 의미인데, 사실 모양이 좋을 때 형세가 유리해지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이나, 모양에 구애 받지 않고자유자재로 두는 바둑은 현실 감각이 뛰어난 바둑이라 칭한다. 바로 ‘된장 바둑’ 또는 ‘잡초 바둑’이라고 불리우는 ‘한국류의 바둑’이 그런 종류에 속하는데, 아무튼 오다께의 바둑뿐만 아니라 대체로 일본의 바둑은 모양을 중시한다. 스포츠 보다는 기예(技藝)나 정신수양 쪽으로 더 생각하는 일본의 전통 때문인 것 같은데, 여하튼 시대의 흐름은 ‘모양보다는 현실적인 착점, 그리고 긴 시간 보다는 짧은 시간 바둑’인 것 같다. 오늘날 일본의 바둑이 한국이나 중국에 뒤지는 원인은 이런 시대에 맞추어 가는 감각이 상당히 부족한 면도 있고, 또한 철저한 원생 훈련을 통한 세대교체를 잘해야 하는데, 과거 조치훈이9단이나 현재의 장쉬, 야마시다 게이코 9단의 실력에 버금가는 어린 신인이 없었다는 것만 보아도, 수긍이 가는 일이었는데, 최근에는 일본 사상 최연소 명인이 된 미야마유타 9단의 등장으로 그나마 뛰어난 신인의 갈증을 다소 해소했다고 볼 수 있다.

임해봉 9단 역시 기다니 출신 기사로서 크게 성공한 사람이었는데, 그의 별명이 ‘이중 허리’인 것 같이 매우 신중하게 착점하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넌다.’라는 말은 그에 대한 말이라고 하는데, 나중에 이 말도 ‘삼중허리’ 또는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지 않는다’라는 말에 밀리게 되었는데, 후자(後者)는 바로 이창호 9단을 두고 유행했던 말이다. 임해봉 9단은 해설을 잘하기로 유명했는데, 80년대 출간 되었던 ‘명국세해(名局細解)’라는 매년 시리즈(series)로 출간된 책의 대부분은 임해봉 9단의 해설로 이루어졌는데, 그의 깊은 수읽기와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전략전술을 가미한 해설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었다.
바둑 판 위에 한 수를 둘 때 어느 정도의 다양한 수가 있는가, 프로의 수읽기의 세계는 얼마나 심원한가 하는 것을 잘 알 수 있게 해주는 이 명국세해 정도의 깊이 있는 해설서가 오늘날에는 나오지 않는 것이 매우 유감스런 일이라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최근에 이세돌 9단이 이 일본의 명국세해를 능가하는 자전 해설서 3권을 펴내어서 한국이 해설서 면에서도 일본을 능가하는 경지에 오게 되었다.) 또 한 사람 잊을 수 없는 기사가 가또마사오(加藤正夫) 9단이다. ‘대마 킬러(killer)' 또는 ‘완력(腕力)의 가또’라는 별명을 보더라도 그의 기풍을 짐작할 수 있는데, 그의 호방(豪放)한 기풍은 삼국지에 나오는 영웅들의 호탕한 풍모를 연상하게 하였는데, 조치훈 9단과도 여러 번결승 대국을 두었고, 조 9단도 전투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는 사람이라, 조 9간과의 대국에서는 격렬한 전투가 자주 일어났었다. 그러나 너무 아쉽게도 수년전에 하늘나라로 장기(長期) 여행을 떠나는 바람에 많은 바둑 팬들을 안타깝게 하였다.
여기서 제작년(2010년) 후지쓰 배 24강 1차전에서 목진석 9단을 이긴 이시다(石田芳夫) 9단(1948년생)을 이야기해야 할 차례이다.
임해봉 9단이 최연소 명인위(23세)에 취임하자, 이시다 씨는 당시 최연소 본인방(22세)에 오르고 본인방을 5연패하면서 이름을 날렸는데, 다시 명인 위에도 올라서, 일본의 바둑계는 그당시 이시다와 임해봉이 석권하다 시피 하였다. 이시다 9단은 별명이 계산력이 뛰어나서 컴퓨터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는데, 조훈현 9단과의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조훈현이 한국 기원에서 입단 시험에 통과했을 무렵,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전화 대국 프로그램이 추진되었는데, 조훈현 초단의 상대는 일본기원 연구생 1급이었던 이시다였다. 입회인은 한국에는 조남철8단, 그리고 일본은 기다니(木谷實)9단이었고, 63년 1월 6일과 13일 이틀간에 두어졌었다. 통화 중계는 한국의 조남철 8단과 일본 측은 한국일보 도꾜 지사장이었던 김평구(金平久)씨간에 오고 갔었다. 물론 흑 1은 16의 4입니다.”와 같이 좌표를 불러서 바둑이 두어 졌었는데, 이 바둑에서 이시다가 19호 반을 이겼었다. 그런데 이 바둑 중계는 당시에 바둑 애호가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다 한다.
오늘날 한국과 일본, 또는 한국과 중국 사이에 인터넷 바둑으로 언제나 바둑을 두고 싶으면 둘 수 있는 환경에 비하면, 전화 대국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가 되겠으나, 여하튼 매우 재미있는 일화이다. 오늘날 일본 바둑계의 거장들은 야마다 기미오, 장쉬, 야마시탸 게이코, 하네나오키, 미야마 유타 등인데, 우리나라에서 도일(渡日)한 조선진9단, 유시훈 9단등이 타이틀에서 한 발자국 멀리 있는 것이 아쉬운 점이다. 옛부터 바둑이 두뇌 발달에 매우 좋다는 것은 알려져 있지만, 이를 과학적으로 규명한 사례가 없어서, 구체적으로 우리 뇌의 어느 부분이 어떻게 발달하는지를 잘 알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 의문점이 서울대 병원 연구 진과 한국 기원 관계자들의 합동 연구로 최근에 해명되었다는 기사가 보도 되었다.
다음은 그 연구 결과이다.
'바둑이 두뇌발달 이끈다' 최초 과학적 입증! 바둑이 두뇌발달에 좋다.
바둑팬들은 대체로 이 명제에 동의했지만 이를 과학적으로 증명한 사례는 없었다. 당장 누군가가 '나는 찬성 못해'라고 말한다면 이를 반박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제'그건 과학으로도 증명된 사실'이야 라고 말해 줄 수 있게 됐다. 서울대 병원 권준수 교수팀이 (재)한국기원과 협력해 이 명제와 관련한 연구결과를 내놨다. (재)한국기원 관계자는 바둑과 두뇌 발달이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과학적인 연구로 증명해 발표한 것은 최초일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대 병원의 언론 발표자료를 입수해 전문을 소개한다.
‘바둑’이 두뇌발달 이끈다- 서울대병원 권준수 교수팀, 바둑훈련이 뇌의 구조적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결과 보고 - 바둑전문가의 뇌 구조는 일반인에 비해 뇌 영역들 상호간 연결이 치밀하고 정보 전달로가 잘 발달되어 있음을 확인- 향후 교육적, 인지적 장애요인 치료에 큰 도움 줄 것으로 기대. 한국을 비롯한 동북아 지역에서 고대로부터 즐겨오던 ‘바둑’이 두뇌의 구조적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결과가 국내 연구진에 의하여 처음으로 밝혀졌다. 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 권준수 교수팀(제1저자: 이보름, 광주과기원)은 바둑경기에 대한 뇌영상 연구를 통하여, 장기간의 바둑훈련이 뇌기능과 연관된 뇌의 구조적인 발달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연구 결과는 뇌 영상학 분야의 저명한 잡지인 뉴러이미지(Neuroimage) 8월호에 게재된다.
재단 법인 ‘한국기원’과 같이 수행한 이번 연구는 협회 소속의 10년 이상 장기간 바둑을 훈련한 젊은 프로기사와 훈련생들을 대상으로 뇌의 구조와 기능의 발달 양상이 일반인들과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이번 연구에는 2007년 6월에서 1년간에 걸쳐 17명의 젊은 바둑 전문가들 (평균연령: 17세, 남: 14명, 여: 3명)이 선발되어 MRI 영상의 하나인 확산텐서영상 등의 실험에 참가하였다. 이들은 어려서부터 바둑훈련을 시작하여 평균 12년 정도의 훈련기간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 9명은 프로기사로 활동 중이었고 나머지는 연구생 신분이었다.
확산텐서영상기법은 고위 인지기능을 담당하는 대뇌피질의 각 영역들을 연결하여 정보를 전달하는 통로역할을 하는 백질다발들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영상화할 수 있는 최신 뇌구조 영상기술이다. 연구진은 확산텐서영상 분석을 통해 바둑전문가 집단의 두뇌는 일반인들에 비하여 구조적으로 대뇌 전두엽과 변연계 그리고 대뇌 피질 하부를 구성하는 시상 등 다양한 영역들 간의 상호 연결성이 고도로 집중적으로 발달해 있음을 밝혔다. 이들 영역은 집중력, 작업 기억, 수행조절능력 및 문제해결력 등의 중요한 인지기능의 발휘에 매우 중요한 대뇌구조들인데, 이번 연구결과는 이러한 구조들 간의 정보전달이 장기간 바둑훈련을 한 사람들에서 보다 효과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바둑 전문가 집단에서 보이는 하부 측두엽 백질 영역의 발달은 하나의 기술을 장기간 수련한 ‘장인’들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특성인데, 일반인들은 기억을 할 때 하나하나씩 기억이 저장되는데 비해, 전문가들은 패턴 자체 를 통째로 측두엽에 담아놓고 저장하게 된다.
즉, 바둑전문가들은 바둑게임에 대한 고도의 전문화된 능력을 갖추기 위해 오랜 기간의 훈련을 통하여 획득한 다양한 경험에 기반한 특별한 경기패턴을 전문화된 기억저장소에 저장해 두고 있다가 더욱 효율적이고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울러 바둑 전문가들은 비언어적인 공간적 시간적 정보를 주로 처리하는 우측 뇌의 전두엽-피질하부 영역 회로가 일반인에 비해 발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바둑 전문가들이 반복적인 바둑 수련을 통해 시-공간적인 정보처리 능력을 효율적으로 빠르게 발휘하도록 훈련이 되어 있음도 추측해 볼 수 있다. 또한 대뇌 우반구의 백질이 좌반구보다 상대적으로 더 발달되어 있는 결과는 바둑경기의 주된 과제가 공간적 특성을 가짐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권준수 교수는 “이번 연구의 성과가 인간 두뇌의 구조와 기능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규명에 기여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며 “이를 바탕으로 두뇌계발의 교육적인 목표와 인지기능에 연관된 여러 장애들의 치료성과 의 증진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권 교수팀은 현재 장기간 바둑훈련을 통한 기능적 두뇌발달의 영향을 규명하고자, 기능적 자기공명영상을 이용한 작업 기억실험에 대한 분석과 신경심리검사에 대한 분석도 병행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바둑훈련에 의한 뇌기능의 발달 및 인지기능의 전개과정을 보다 포괄적이고 명확하게 규명해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자료제공 : 서울대학교병원]

마지막으로 바둑에 얽혀 있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일화(逸話)와 위기십결, 단위의 명칭과 그 의미를 써 볼까한다.

바둑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들 --- 박재삼 저 '바둑 한담', 중앙일보사, 1983년(요약한 내용임)

1) 토혈 대국(吐血對局)
1842년 5월 16일 본인방 수화(秀和)와 정상인석(井上因碩)의 20 번기 승부가 시작되었는데, 당시 최고수를 가리는 대국이었다. 그때는 대국 시간이 며칠 또는 수십일 동안 진행되기도 했는데, 제1국이 9일 동안 진행되는 동안 정상인석은 두 번이나 피를 토했다고 전해진다. 폐결핵은 아니었고, 객혈의 원인은 알 수 없었다 한다. 그리하여 대국도 중단되었고, 1년 반 후에 속개(續開)되어, 본인방 수화가 6호 승한 바둑으로서 일본 바둑 역사상 매우 유명한 대국으로 기록되고 있다.

2) 이적(耳赤)의 수(手)
1846년 7월 21일부터 25일 까지 둔 본인방 수책(秀策)과 환암인석(幻庵因碩=井上因碩) 사이에 두었던 바둑인데, 본인방 수책은 그 유명한 1,3,5 포석을 두었고, 중반전까지 갔을 때, 대국이 행해진 원재일랑(原才一郞)의 집 별실(別室)에서 순절(順節)을 바롯한 인석의 문하생들이 그 바둑들 검토하고 있었는데, 백을 쥔 인석이 우세하여 누구나 총수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한다. 이때 관전하던 의사가 들어와서, 인석이 질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문하생들이 그이유를 묻자, “지금 수책이 돌 소리도 힘차게 바둑판 중앙에 두었다. 그 것을 본 선생은 두 귀가 점점 빨개졌다. 의학적인 관점에서 귀가 빨개진다는 것은 뭔가 돌발 사건이 생겨서 마음이 동요하고 있다는 증거이다”라고 말하였다. 의사 선생의 말대로 국면은 일변하여 결국 수책은 3집을 이겼는데, 이 대국은 수책의 유보(遺譜) 360 국중 가장 유명한 대국으로 기록되고 있다.

3) 이승만 대통령은 아마추어 9단
1950년 3월 27일은 이 대통령의 생일날이었다. 당시 한국기원 제2대 이사장이었던 최하영(崔夏永)씨가 돈 안들이고 생색내는 방법을 궁리한 끝에 이 대통령에게 바둑의 단위(單位)를 드리고 애로 사항을 풀어보자고 하여, 9단의 단증을 주기로 하였다고 한다. 아마추어에게 주는 명예 단증은 당시 7단이 최고였는데, 기왕 단증을 수여할 바에는 한 예외적인 조처라고 할 수 있다. 그 9단 인허장의 문구가 재미있는데, “윤허장(允許狀), 9단, 이승만. 귀하는 기력이 입신의 역(域)에 달하였으므로 자이(玆以) 단위를 윤허함. 1950년 3월 27일. 한국기원 이사장 최하영” 이었다. 이 윤허장을 받아든 이대통령이 “내 기력이 9단 밖에 되지 않나?” 라고 말하여 좌중을 웃겼다고 하는데, 3개월 후에 6.5 사변이 일어났었다.

4) 예성강곡(禮成江曲) 전 후 편
고려사(高麗史)의 악지(樂志)에 실려 있다는 바둑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예성강은 고려와 송나라 사이의 교역의 관문 이었다. 그 송나라 상인중에 하두강(賀頭綱)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거상(巨商)이었고 또한 바둑을 매우 잘 두었다. 어느날 그 하두강이 예성강 강변을 거닐다가 눈이 황홀할만한 미인 한사람을 발견하여서, 짝 사랑에 빠졌다. 어떻게하면 저 미인을 손에 넣을까 궁리하던 중에 그 미인의 남편이 바둑을 매우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賀는 그 남편에게 바둑을 두자고 하여 두게 되었는데, 점차로 내기 바둑으로 이끌고 갔다. 처음에는 속셈이 있어서 일부러 져주고 돈을 잃은 다음 큰 내기를 하자고 제의하였다. 야금야금 돈을 따는 데 재미를 붙인 남편은 두 말하지 않고 그 제의를 받아들였는데, 그 조건이 賀의 배에 실은 상품 전부와 상대편 아내를 걸고 두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일단 대국이 시작되자 賀는 가면을 벗고 갖고 있는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그 바둑을 이겨버렸다.
그리하여 그 바둑 한 판으로 賀는 몽매에도 그리던 그 미인을 손에 넣고, 배를 띄우니, 바둑에 진 남편은 만금(萬金)을 잃은 듯 원통하였다. 바둑 용어로 말하자면 남편은 소탐대실(小貪大失)하고, 賀는 대탐소실(大貪小失)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때 남편이 애 끊는 정념(情念)에 지은 노래가 예성강 곡 전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미인을 실은 배가 바다 한 가운데를 갔을 때, 빙빙 돌면서 전혀 앞으로 갈 수가 없었다. 마침 그 배에 탔던 점술사(占術士)의 말로는 그 배에 타고 있던 그 부인을 돌려보내야만 갈 수 있다고 하자, 賀는 할 수 없이 뱃머리를 다시 예성강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예성강에 이르자 부인은 그녀의 착잡한 심경을 노래했는데, 그 노래가 예성강 곡 후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예성강 곡은 전 후편이 모두 후세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5) 서신 대국(書信 對局)
월남 전(越南 戰)이 한참 진행 중일 때, 그곳에 파견된 맹호 부대원 중에서 바둑을 좋아하고, 잘 두는 1급 정도의 실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바둑을 둘 상대가 부대 안에 없었다. 그래서 고국에 있는 바둑 관계 책을 펴내는 어느 출판사에게 바둑 책을 보내주라는 서신을 띄웠는데, 마침 그 출판사의 사장이 1급 정도의 바둑을 두어서 서신 대국을 하면 어떨까 하는 제안을 하고, 첫수를 적어서 편지로 보내게 되었다. 출판사 사장은 ‘월남 장병 위문차’ 그와 같은 서신 대국을 제안하게 되었고, 편지의 왕복에 대략 2주 정도 소요되므로, 한 달에 4 수 정도의 진행을 보게 되었다. 서신에는 고국과 월남의 소식도 오고 가게 된 것은물론이다. 때로는 그 장병의 소식이 두어 달 끊어지기도 하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때는 작전을 나가서, 최전선의어느 참호에서 격전 중이었다고 한다. 부대 안에서 유명인이 된 그 장병에게 기보가 적혀있는 편지를 트럭과 헬리콥터를 동원해서 작전 현장에 가져다주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 대국은 꼭 1년 동안에 38 수밖에 진행되지 않았는데, 장병은 귀국하여, 유서 깊은 운당 여관(옛날에 바둑 결승 대국 등 중요한 대국이 자주 있었던 여관)에서 나머지대국을 하게 되었는데, 백을 쥔 맹호부대 병사가 이겼다고한다. 그 맹호 병사는 양상국 9단의 친형이고, 출판사 사장은육민사(育民社)의 최태열(崔太烈) 사장이었다고 한다.

6) 원자 폭탄 대국
2차 대전이 막바지를 향하여 치닫던 1945년 7월 하순, 제3기 본인방 도전기가 시작되었다. 타이틀 보유자는 하시모도(橋本宇太朗)9단 이었고, 도전자는 이와모도(岩本薰) 9단이었다. 당시에는 도전기는 한 판에 3일 걸려서 두었으며, 지금처럼 7번기나 5번기가 아닌 6번기였다. 그런데, 도꾜는 공습때문에 좀더 안전한 히로시마로 결정되어, 그 곳은 큰 폭격은 없었으나, 종종 기총소사(機銃掃射)가 있었다. 3일 동안 두는 대국에서 자주 방공호로 대피하는 소동이 있었다. 그런데, 제1국은 도전자인 이와모도 9단이 이기고 2국을 두려하자 경찰 당국이 안전상의 이유로 대국 허가를 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히로시마에서 약 10km 정도 떨어진 곳에서 두게 되었는데, 8월 4일, 5일을 계속 두고 6일이 되었다. 8시가 조금 지나자 이와모도 9 단이 바둑판을 닦고 (일본에서는 도전자가 바둑판을 닦고 기다린다.) 어제까지 둔 바둑을 새로 바둑판 위에 두려고 할 즈음, 히로시마 쪽 하늘에서 이상하게 번쩍하고 빛이 발하고 이어서 하늘에 버섯구름이 생겼다. 모두들 일어서서 그 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몇 초 뒤에 엄청난 바람이 불어와서 인근에 있는 모든 집의 유리창이 깨어졌다. 그러나 다행히 대국실의 유리창은 커튼을 쳐 둔 상태이어서 다치지는 않았다. 이어서 다시 방을 치우고 대국을 한 결과 하시모도 9단이 5집을 이겼었다. 그 위급한 상황에서 천운(天運)으로 목숨을 구한 것은 물론, 기사는 어떤 경우에도 바둑판을 떠나지 않는다는 기념할 만한 대국이었다.

7) 왕질(王質)의 고사(故事)
중국의 진(晉) 나라 때 왕질이란 나무꾼이 살고 있었다.
하루는 꿈을 꾸었는데 신선과 함께 구름 위에서 하루를 보내는 꿈이었다. 그래서 그날 산삼이라도 한 뿌리 캐지않을까 하는 마음에 평소에 가던 우봉(牛峰)을 가지 않고, 숲이 우거지고 인적이 끊긴 서산(瑞山)이란 곳으로 향하게 되었다. 얼마쯤 갔을까 갑자기 앞이 탁 트인 곳이 있었다. 새들이 우짓고 꽃이 만발한 곳이었다. 그런데 그곳 평평한 바위 위에서 동자(童子) 몇이서 이마를 맞대고 바위 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왕질이 호기심이 나서 가보니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왕질도 약간 바둑을 둘 줄 아는지라 펼쳐지는 귀수(鬼手)와 신수(神手)에 넋이 나가서 계속 바둑 구경을 하였다. 이윽고 해가질 무렵에야 왕질은 허둥대며 집에 가려고 도끼를 집어드니 자루가 썩어서 흩어지고 도끼날만 땅에 딩구는 것이었다. 왕질이 집에 와보니 자기의 집은 온 데 간 데 없고 그 자리에 웬 대궐 같은 기와집이 있었으며 그 집안에서 사람들이 왁자 기껄 떠들며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왕질이 놀라서 물어보니 그날이 고조부 되는 質 어른의 백주기(白周期) 제삿날이라는 것이었다. 바둑 한 판 관전하는 데 100년이 걸렸던 셈이었다. 여기에서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라는 말이 생겼는데, 술이기(述異記)에 나오는 이야기라고 한다. 바둑을 운치 있게 말할 때 난가(爛柯)라고 하는데, 이 때 난은 ‘썩어 문드러질 난’이고 가는 ‘도끼자루 가’이다.

8) 한국 최초의 바둑 책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님이 여러 면에서 선각자 적인 행보(行步)를 보였던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데, 한국 최초로 바둑책을 발간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않은 사실이다. 그가 문학잡지 ‘소년’을 창간하여 ‘해외에서 소년에게’의 시를 실은 것이 그의 나이 19세(1908년) 때였으니까, 한국 최초의 詩가 말하자면 나이 어린 10대의 소년에 의하여 쓰여져 인쇄된 책으로 출간되었다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육당이 1910년에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를 창립하여 사전 편찬, 국학 관계 도서 및 계몽 도서를 편찬하기 시작하였는데, 여기서 최초의 바둑 책을 편찬하여 펴냈다는 것이다. 그 때가 1913년 이었는데, 책명은 ‘기보(棋譜)’였으며, 오늘날의 한국기원에서 펴내는 잡지 ‘바둑’과는 달리, 그 내용이 묘수풀이 집이었다는 것으로서, 창작 묘수풀이가 아니고 대부분 ‘현현기경(玄玄棋經)의 내용을 수록한 책이었다고 한다. 좌우지간에 조남철 선생님이 오늘날의 프로 기전을 확립한 것이 1945년 해방 이후인 것을 생각하면, 까마득한 옛날에 바둑에 관한 책을 펴냈다는 것은 과연 선각자 육당이라고 할만하다. 육당의 바둑 실력은 5급 정도였다고 한다.

9) 첫 점의 시비(是非)
바둑의 첫 점을 네 귀 중 어느 곳에 두어도 자유이나, 흑이 좌상 귀에 두는 것은 금기(禁忌)로 되어 있는 것이 오랜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아마도 300 여년이 넘도록 프로 바둑 제도를 이어오면서 확립한 일본의 전통 때문인 것 같다. 일본의 바둑은 옛날에는 막부(幕府)의 보호 아래서 발전해온 것이었기 때문에, 사무라이 정신을 무시할 수가 없었는데, 검사(劍士)들의 오른 쪽 가슴에 해당하는 곳이 바로 좌상 귀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바둑사상 바로 이 좌상귀에 흑의 첫 점이 놓여 져서 시비가 벌어진 일이 있었다. 1968 년쯤의 일로서, 당시 김재구 7단과 김수영 6단이 국수전 본선에서 맞붙었는데, 김 7단이 집흑(執黑)으로 첫점을 금기의 곳에 두었다. 그러자, 김수영 6단은 대국 장에서 나와 두 시간인가 세 시간인가를 바둑을 두지 않고 있었다. 주변의 권유로 결국 그 바둑을 두었으나 김 6단이 지고 말았다. 김 6단의 얘기는 대충 이런 것이었다. “첫 점을 그 곳에 안둔다는 것은 불문율이다. 불문율은 황금율(黃金律) 같은 것인데, 이를 어기었다는 것은 바둑에서 가장 중요시해야할 기본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다”의 내용이었는데, 그 후에 좌상귀에 첫 점을 두는 것은 완전히 없어졌다고 한다. 필자도 김수영 6단의 주장을 매우 타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인터넷 바둑 같은 데에서 나이 어린 사람들이 이와 같은 관행을 모르고 좌상 귀에 두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는 백이 일방적으로 기권 패를 하고 그 바둑을 그만 두면 될 것이다. 관행을모르는 쪽이 잘못했으니까. (20수 이하는 성적에 반영되지 않는다.)

10) 어느 과객의 내기 바둑
이제현의 역옹패설(&am;#27359;翁稗說) 하면 우리가 역사 시간에 들었던 책인데, 이 책 속에 바둑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즉 옛날에는 과객(過客), 즉 '지나가는 손님’, 또는 ‘떠돌아 다니는 사람’이 많았는데, 어느 과객이 당나귀를 타고 전국을 유람하고 다녔다. 그런데, 그 당나귀가 잘 먹지를 못해서 몸이 몹시 야위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내기 바둑을 두어서, 당나귀를 몇 개월 맡겨두는 일이었다. 이 나그네는 어느 부잣집에 들러 당나귀를 걸고 내기 바둑을 두어서 일부러 져주고, 3개월 후에 다시 그 집에 들러 다시 내기 바둑을 제안하였다. 결국 그 바둑에 이겨서 당나귀를 되찾았다는 이야기인데, 일부러 져주었다는 것이 기도(棋道) 정신에 어긋나기는 하지만, 보통 내기 바둑에 져서 패가망신 했다는 이야기에 비해서 그런대로 애교가 있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왕적신(王積薪)의 위기 십결
1)부득탐승(不得貪勝): 바둑은 이기는 것이 목적이나 너무 승부에 집착하다 보면 오히려 그르치기 쉽다.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은 마음으로 최선의 수를 찾아야 한다.
2)입계의완(入界宜緩): 무슨 일이든지 결정할 시기가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포석에서 중반으로 넘어갈 때 승패의 갈림 길에서 너무 서두르지 말고 참고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하다.
3)공피고아(攻彼顧我): 상대방을 공격하기 전에 먼저 자기의 허점을 잘 살피어야 한다. 섣부른 공격은 화를 자초할 뿐이니,나의 약한 곳부터 지켜둔 다음에 공격하여야 한다.
4)기자 쟁선(棄子爭先): 바둑알 몇 개를 버리더라도 선수(先手)를 잃지 말아야한다.
5)사소취대(捨小取大): 작은 것은 버리고 큰 것은 취하라는 뜻이다. 당연하지만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큰 것과 작은 것을 정확하게 분별할 수 있는 안목을 키워야한다.
6)봉위수기(逢危須棄): 위험을 만나면 모름지기 버릴 줄 알아야 한다. 생사가 불확실해 보이는 말은 일단 가볍게 처리하는 것이 요령이다.
7)신물경속(愼勿輕速): 경솔하거나 졸속하게 두지 말고 신중하게 두어라. 대국 자세가 올바를 때, 보다 깊고 정확한 수를 읽을 수가 있다.
8)동수상응(動須相應): 두어진 바둑알 한 개 한 개에 생명력이 있는 것처럼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그러므로 착점을 결정하기 전에 자기 편 바둑알의 능률과 상대편의 움직임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9)피강자보(彼强自保 ):상대방이 강하면 스스로를 먼저 보강해야한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 즉 도약을 위한 웅크림이다.
10)세고취화(勢孤取和): 적의 세력 속에서 고립되어 있을 때는빨리 살아두어야 한다.

바둑의 구품계(九品階)
1품 입신(入神) 9단 : 그 사람의 기법(棋法)이 신묘한 경지에들어갔다는 뜻.
2품 좌조(座照) 8단 : 앉아서 환하게 비춰본다.
3품 구체(具體) 7단 : 바둑의 모든 체격을 갖추었다.
4품 통유(通幽) 6단 : 깊고 그윽한 곳을 통하여 안다.
5품 용지(用智) 5단 : 지혜로 싸운다.
6품 소교(小巧) 4단 : 작은 재주를 부릴 줄 안다.
7품 투력(鬪力) 3단 : 지혜나 재주 보다는 힘으로 싸운다.
8품 약우(若愚) 2단 : 남 보기에 어리석은 것 같지만 자신의 실력은 갖추었다.
9품 수졸(守拙) 초단 : 자력에 의하여 지키는 정도는 된다.

경이적인 기록들

1)이창호 9단의 41 연승
2)단일(單一) 국제기전 단일(單一) 년도에서 서봉수 9단이 기록한 9연승 기록(제5회 진로배)-- 이 기록은 정관장 배에서 문도현 2단이 경신하지 않을까 기대가 컸으나, 7연승에 그쳐 아쉬움을 남겼다.
그러나 7연승이란 말이 쉽지, 경이로운 기록임에는 틀림없다.
3)조훈현 9단의 9세 최연소 입단 기록
4)이창호 9단의 단일 국제기전(농심 신라면배) 연속(連續) 년도 연승 기록 (정확한 기록은 잘 모름. 현재 총 전적은 19승 2패)
끝으로 바둑에 관한 한시 한수를 읊으면서 칼럼을 마칠까한다.

棋局觀人生
盤前無人無我境 : 반전은 무인이고 무아경인데
神仙遊戱暄時經 : 신선의 유희로서 시간 가는 것 잊네. (暄:잊을 훤)
初盤布陣遠謀備 : 초반의 포석으로 멀리 도모하고 준비하며,
定石妙手初志成 : 정석 묘수로서 어릴 때 뜻을 세우네.
中盤戰鬪越生死 : 중반 전투로서 생사를 초월하고
千變用術克難境 : 천변하는 술수를 써서 난경을 극복하네.
終盤計家緻細心 : 종반의 계가는 치밀하고 세심한 마음이요
人生黃昏結終營 : 인생의 황혼에 끝을 맺는 경영일세.
南柯一夢警覺歎 : 남가일몽의 경계와 각성의 탄식하니
一場春夢是局明 : 일장춘몽 이것이 밝은 일국이네.

출처 : http://blog.naver.com/bonanza3000/90163427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