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예수-예수의 초상
신약성서 중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예수의 생애를 집중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복음들은 예수의 이야기로 가득차 있으면서도 그렇다고 예수의 전기도 일대기도 아니다.
아무리 뛰어난 화가라 해도 마태, 마가, 누가 복음서를 읽고 인간 예수의 모습을 그릴 수는 없다.
예수의 모습을 추상할 수 있는 어떤 자료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얼굴의 모양, 머리칼 색깔, 수염, 체중, 키, 피부색 등 그 어떤 것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예수에 대한 그림들은 화가들의 상상일 뿐이다.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문화에 따라 예수의 모습은 천차만별이다.
심지어는 눈녹는 모습이 예수의 얼굴과 닮았다고 해서 그 사진을 액자로 걸어놓기도 한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초상화가 절실하게 필요해 졌을 때 예수는 이미 떠난 후였다.
예수의 초상화는 정형이 없고 모두가 상상화이기 때문에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다.
정형이 없는 여러가지 상상화들은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부정적인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그림이 보는 사람의 생각-상상력을 규정(規定)할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정교회의 성화나 카톨릭의 성화들이 더욱 그러하다.
참고 - http://www.nosuchjesus.com/nosuchjesus.htm
예수의 모습
사도행전 53: 2를 보면 예수는 보통 키에 평범한 얼굴이었던 모양이다.
이마가 반듯하거나 눈이 호수같이 크고 깊어 신비로웠거나, 키가 남들보다 한 자가 더 크거나,
힘이 출중했거나, 눈에 띄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저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다
라고 사도행전은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도 예수의 초상화는 금발을 길게 내린 백인의 얼굴이다.
그게 사실이 아닌 줄은 알지만 그림을 자꾸 대하다 보면 그게 바로 예수의 얼굴로 인식된다.
바로 그림이 갖는 이미지의 힘이다. 레오나드 다빈치의 유명한 그림 최후의 만찬도
실제 상황과는 무관한 이태리인의 용모에 이태리풍의 자기 그림일 뿐이다.
그런 상상화에 여러가지 신앙적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는 매우 위험하다고 할 수 있다.
가느다란 단서
공관(共觀) 복음서라고 불리우는 마태, 마가, 누가 복음을 읽다 보면
어떤 상황을 설명하는 부차적인 기록에서 인간 예수에 대한 가느다란 단서가 나온다.
마가복음 3:21에는 마가만이 기록하고 있는 아주 특이한 내용이 있다.
예수에게 군중이 모여들어 음식을 먹을 겨를도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예수의 친척들은 예수를 붙들러 서둘러 나선다.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붙잡는다는 헬라어 kratesai 는 체포, 구금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수의 친척이란 31절에 내려가 보면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로 밝혀진다.
문제는 가족들이 왜 예수가 미쳤다고 생각하는가 이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은
예수의 치유와 이적은 베엘제불에게 사로 잡혔고 마귀두목의 힘을 빌렸다고 공격한다.
당시 유대사회 에서는 귀신이 들렸다는 것은 미쳤다는 것을 의미했다.
말하자면 가족들은 실성한 예수를 붙잡아 가려고 나선 것이다.
어떤 주석가는 이때 그들이 예수를 묶어갈 밧줄을 가지고 갔다고도 한다.
31절의 나머지 부분을 보면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군중들에 둘러싸인 예수에게 자기들이 왔음을 알려달라고 한다.
그때 예수의 대답은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하면서 만남에 응하지 않는다.
나중에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과 같은 존재가 동생 야고보도 이때까지는 형을 이해하지 못했다.
인간 예수가 가족들과 겪는 갈등은 호소력을 가지며 신빙할 만한 전승이다.
유일한 기록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고향으로 내려가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칠 때 주민들의 반응이다.
마가복음 6:1-6 에서는 저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 그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여기에 살고있지 않은가?
마태복음에서는 표현이 다르다. 저 사람은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누이들도 모두 우리 동네사람들이 아닌가?
마가와 마태 복음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어머니가 마리아라는 것과 시몬과 유다의 순서는 바뀌었지만
4명의 남자 동생들과 두명 이상의 누이가 나사렛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가장인 요셉의 이름이 거명되지 않는 것은 이미 그가 세상을 떠났음을 암시하며
누이들의 이름이 거명되지 않는 것은 그들이 이미 결혼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마가는 예수를 목수로 기록하고 마태는 목수의 아들로 기록한 차이가 있다.
결국 요셉도 예수도 목수라고 볼 수 있다.
인간 예수의 가족상황과 직업이 기록된 소중한 부분이다.
아래 그림은 예수와 네 남동생 그리고 두명의 누이를 그린 그림이다.
타임머신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그것이 2000년전의 상황인 것을 잊고 지금을 기준하는 경우가 많다.
예수가 목수라고 하여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목수로 이해하는 경우도 그렇다.
지금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인구가 500만명에 육박한다.
그러나 예수 당시의 그곳은 고작 70만명 정도가 살았을 것으로 역산한다.
그렇다면 나사렛도 지금의 규모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작은 동네였을 것이다.
그 작은 동네에서 목수 일만 했다면 당시의 무거운 세금을 감당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목수로 번역된 단어 테크톤(tekton)은 돌, 나무, 금속 등으로 물건을 만드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래서 라틴계 교부들은 요셉과 예수의 직업을 목수보다는 장인(匠人)으로 해석한다.
마가 5:1-20절에 보면 자기를 군대라고 밝힌 악령에 잡힌자가
자기들이 근처에 있는 돼지 떼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간청한다.
예수가 듣고 허락하자 그 악령들은 돼지 떼에 들어갔고, 그 돼지들은 비탈길을 달려 내려가
물속에 빠져죽고 말았다. 그 비탈은 지금도 갈릴리호수 지역에 남아있다.
그 숫자가 거의 이천마리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공급은 수요가 있어야 성립한다.
유대인과 아랍인은 돼지고기를 먹지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규모의 돼지사육은 결국 이방인들을 위한 것이다.
나사렛 인근지역에는 로마인들의 도시, 군대 병영, 그리스인들의 마을이 있었던 것이다.
복음서를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는 예수가 농부였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많다.
예수가 씨뿌리는 비유, 포도밭 등의 비유를 많이 했기 때문이다.
예수의 복원
2001년초 예루살렘의 도로공사장에서 1세기경 유대인들의 두개골이 발굴되었다.
영국 멘체스터 대학의 법의학 교수인 리처드 니브 교수팀은 그중 가장 대표적인 형태를 가진
두개골들을 골라 첨단 법의학 기법과 컴퓨터 작업으로 1세기 유대인의 얼굴을 실제로 복원했다.
연구팀은 사람의 얼굴형태는 두개골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에
이런 복원기법은 생전의 모습을 추정하는 적절한 벙법이라고 했으며
머리카락, 턱수염, 피부색등은 이라크 북부에서 발견된 예수상을 토대로 했다고 말했다.
2001년 4월, 네셔널 지오그래픽 채널로 방영된 BBC의 이 "신의 아들" 프로그램은
1세기 유대인 얼굴의 복원작업 과정을 상세히 보여줬다.(위 그림 참조)
이 프로의 PD 장 클로드 브라가르는
지금까지 만들어진 예수 얼굴 가운데 가장 실제의 예수와 비슷하다고 했다.
예수의 두개골로 복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의 얼굴과 똑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예수의 실제 모습을 추정하는 출발점은 충분히 될 수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복원한 얼굴은 뭉툭한 코, 짙은 갈색피부, 짧은 고수머리, 구렛나루와 턱수염이 무성한
전형적인 유대인 농부였다. 예수도 분명 이런 얼굴 유형이었을 것이다.
이는 지금껏 서양화가들이 그려왔던 창백한 피부에 긴 머리칼과는 딴판이다.
신격화된 예수만 보아서는 예수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에 제한이 따르게 마련이다.
출처 - http://kr.blog.yahoo.com/yorowon2003/1229877.html
예수는 누구인가?
예수의 신격화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루어졌다. 신격화 되기 이전에는
인간 예수에 대한 기록문서가 2,000-3,000개나 있었고 복음서만도 80개나 있었다고 한다.
교회는 예수의 신격화에 적합한 66권(구약39, 신약27)의 문서로 신구약성서를 편찬하고
나머지는 이단으로 분류하여 어디엔가 숨겨두었다고 한다.
니케아 공의회는 당시 로마의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가 주재하였으므로
니케아 공의회에서 편찬된 현재의 성서는 콘스탄티누스 버전의 성서(Bible)라고 한다.
우리는 숨겨진 기록문서에서 그리스도 이전의 예수를 만나야 한다.
그리고 예수의 이해는 거기서 출발해야 한다.
참고 - 다빈치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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