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빈치코드(The DaVinci Code)의 요지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의 오른쪽에 앉은 사람이 여자?
2004년 출판계의 최고 히트 상품은 단연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다빈치 코드(The DaVinci Code, 댄 브라운 지음)이다.
초기 기독교의 비밀스런 역사, 미술사, 인류학, 기호학에 관한 지식으로 정통 기독교에 대한 도발적인 해석으로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은 소설 다빈치 코드는 국내에서만 벌써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읽었다.
주인공 로버트 랭던과 소피 느뵈의 활약 무대가 된 루브르 박물관이나 생쉴피스 성당에는
다빈치 코드 마니아들이 몰려들고 있으며, 이 소설 내용의 진위를 둘러싼 논쟁도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의 오른쪽에 앉은 사람을 일반적으로 예수가 가장 사랑하던 제자 요한으로 알고 있으나
이 요한을 예수의 왼쪽으로 옮겨다 놓으면 예수의 어깨에 살포시 기대고 있는 다소곳한 여인의 상으로 탈바꿈한다.
얼굴의 인상이나 표정에서도 어디하나 남자의 모습은 찾을 수 없고 가슴도 봉긋하여 여인의 가슴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여인이 바로 예수가 가장 사랑하고 가까이 두고 지낸 그리고 예수가 혼인한 막달라 마리아이다.
예수의 어깨에 기대고 있는 자세의 여인을 예수의 오른쪽에 두므로써 예수와 여인간에는 V자의 여백이 생기는데
이를 성스러운 피(왕족의 혈통)를 받아드리는 여자의 성기 즉 성배(San graal)로 암시했다는 주장이다.
고대 기호학에서는 남자는 Λ(Blade), 여자는 V(Cup)으로 나타내었다고 한다.
San graal(성배,聖盃)의 띄워쓰기를 바꾸어 Sang raal로 하면 이는 왕족의 피(Royal blood)가 된다.
다빈치코드는 성배가 잔이 아니라 성스러운 여자의 자궁, 왕족의 혈통을 이어받은 성스러운 여자로 해석하고 있다.
이밖에도 다빈치코드는 모나리자(Monaliza), 장미꽃(Rose), 성서(Bible)에 대한 학문적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소설 다빈치 코드는 어디까지가 사실이며 역사적 근거를 갖고 있는가.
아래 책들을 참고로 다빈치 코드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몇가지 주제를 문답식으로 풀어본다.
코드의 비밀(Secrets of the code, 댄 번스타인 엮음)은 국내에서는 아직 출간되지 않았으나
이 책은 미술사 철학 과학 종교 기호학 등에 관련된 여러 학자와 전문가들의 입을 통해 소설 다빈치 코드의
모든 궁금증을 심층 분석한 두툼한 분량의 종합 해설서이다.
성배와 잃어버린 장미(마가렛 스타버드 지음)는 소설 다빈치 코드의 원전에 해당하는 책이며,
다빈치 코드의 진실(DaVinci Code Decoded, 마틴 룬 지음)은 다빈치 코드의 주요 주제들을 파헤친 또 다른 해설서.
한편 기독교적 입장에서 다빈치 코드의 내용을 반박하는 책으로는 다빈치의 허구(The DaVinci Deception,
어윈 루처 지음)와 다빈치 코드깨기(Breaking the DaVinci Code, 데럴 복 지음)가 있다.

막달라 마리아, 창녀인가 신의 신부인가?
성서에 따르면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에게서 귀신을 내쫓아주었다.
마리아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던 때 십자가 아래에 있었고,
동이 트자마자 무덤에 찾아가 예수의 부활을 목격했으며, 예수를 금방 알아보고는 포옹했다.
그녀는 심지어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씻어주기까지 했다.
막달라라는 마리아는 예수와 매우 가까운 사람이었음이 틀림없다.
확실한 것은 성서 어디에도 그녀가 창녀였다는 기록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녀가 창녀로 언급되는 이유는
591년 교황 그레고리우스가 부활절 설교에서 누가복음 7장에 등장하는 창녀가 막달라 마리아라고 선언했기 때문.
다빈치 코드는 베드로와 경쟁 관계인 그녀를 교회가 창녀로 낙인찍었다고 한다.
예수와의 혼인설 등 그녀에 대한 여러가지 얘기가 더 유포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런 선언을 했을 것이란 주장도 있다.
그러나 교회 지도자들이 막달라가 예수가 사랑했던 제자이자 가까운 친구였으며,
부활을 목격한 주요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수용하기 어려웠기에 그녀의 존재가 왜곡됐다고 보는 설이 더 설득력이 있다.
다빈치 코드에서 티빙 박사는 빌립복음을 인용하며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가 혼인한 사이임을 이야기한다.
그리스도의 반려자는 막달라 마리아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느 제자보다 그녀를 사랑했으며 종종 그녀의 입에 입맞춤을 했다.
여기서 입맞춤에 주목해야 한다.
당시 입맞춤은 혼인한 부부만이 할 수 있는 행위였기에
이는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혼인 사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당시 결혼은 남자의 의무였으며, 다윗 왕의 후계자인 예수에게 결혼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예수의 혼인설을 뒷받침하는 다른 이야기로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에게 향유를 붓는 장면을 언급한 마가복음의 구절을 들 수 있다.
고대 근동지역에서 왕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행위는 왕가의 상속녀나 여신을 대리해 왕족 여사제가 수행한 의식이었다.
이 의식은 신성한 혼인으로 불렸는데,
향유를 부은 머리는 결혼 첫날밤 여자에 의해 기름을 부어 받은 남근을 상징했다.
또 당시 결혼식에 사용되던 향유는 매우 귀한 감송향이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두 번에 걸쳐 예수에게 감송향을 부었다.
그 향유를 부을 수 있는 사람은 신부뿐이었는데 말이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신부였다는 설은 이름에서도 추론이 가능하다.
유대의 왕가 아내들에게는 같은 이름이 전해졌는데,
예수가 속한 다윗왕 가문의 아내들은 모두 마리아란 이름을 전해 받는다.
그렇다면 예수의 어머니와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에 마리아가 들어간 이유는 분명해진다.

그림의 V자 설명 :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 사이에 45도를 이루는 공간은 V자 형태를 암시한다.
<다빈치 코드>는 이것이 성배, 여성의 성기, 자궁, 그리고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정의한다.


성배는 은유인가, 실재하는 대상인가?
예수가 체포되던 날 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가 마셨던 바로 그 잔이 성배(Holy Grail, San graal)다.
성배는 기독교 세계 전체에서 가장 신성한 유품으로 여겨졌지만 잃어버리고 만 잔이다.
전설에 따르면 어디엔가 숨겨져 있다고 한다.
성배를 잃어버렸기에 왕은 상처 입고 불구가 되었으며, 왕국은 황폐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예수의 피가 담겼던 그 신성한 잔을 되찾으면 왕이 치유되고,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라고 한다.
이 같은 전설이 이후 수 많은 시로 쓰였는데, 대부분이 아더왕과 원탁의 기사에 관한 것이다.
성배 이설(異說)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성배는 예수의 성스러운 핏줄(Sang raal), 곧 후손을 의미한다.
예수가 죽은 뒤 목숨의 위협을 느낀 막달라 마리아는 딸 사라를 데리고 도망친다.
이후 그 후손이 프랑스의 메로빙거 왕조를 세운다.
템플 기사단이 숨겨놓은 보물을 찾아내기 위해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다는 설에 따르면
그 보물이란 다름 아닌 예수의 후손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성배 전설은 야훼와 메트로니트 신화, 파르지팔 전설 등에 함축되어 있다.
왕은 왕비 없이는 무력하다는 주제, 곧 신이 여성 배우자를 상실한 것은 치유할 수 없는 상처가 된다는 것이다.
회화와 문학에서 단테나 아더왕 이야기가 소재로 애용되면서 성배는 중요한 은유가 되었다.
성배는 바그너의 반지 연작에서 톨킨의 반지의 제왕에 이르기까지 여러 문학, 음악, 연극 작품에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정신적 구원의 추구라는 같은 주제의 이야기가 반복된다.
바그너의 오페라와 톨킨의 소설에서 추구되는 대상은 술잔이 아닌 반지다.
성배는 은유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한편 실제 잔인 성배가 스페인의 발렌시아 대성당에 있는 것으로 전해지는데,
가톨릭 교회에서는 이 잔을 성유물로 인정하지 않지만 예수가 최후의 만찬에서 축복을 내린 잔이란 점은 인정한다.

장미는 막달라 마리아의 상징인가?
다빈치 코드에서 장미(rose)는 육체적 사랑을 의미하는 에로스(eros)의 철자 배열순서를 바꾼 것이라 했다.
장미(rose)는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의 혼인과 육체적 결합을 가르키는 에로스(eros)의 상징물로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가리키는 최고의 상징이며 막달라 마리아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장미의 다섯 꽃잎은 여자의 출생, 월경, 잉태, 폐경, 죽음을 가르킨다고도 했다.
그러나 상당수의 상징학자들은 다른 견해를 보인다.
전설에 의하면 에덴동산의 장미에는 가시가 없었다고 한다.
마리아와 아기예수 그림에 나오는 가시없는 장미 덩굴은 천국을 상징한다.
이는 마리아가 에덴동산의 천국 곧 장미 가시가 없는 곳으로 인도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장미는 막달라 마리아가 아니라 인간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성모 마리아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출처 - 다빈치의 최후에 만찬에서 예수의 오른쪽에 앉은 사람이 여자?



예수에게 후손이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프랑스로 망명을 하였다는 사실이 영국의 BBC방송국 기자들에 의해 밝혀지고
영국 법정에서 재판을 통해서 확인되었다. 영국 BBC 방송국의 기자 세 사람은 10여 년간의 조사 끝에
1982년 성혈과 성배(The Holy Blood And Holy Grail : 미카엘 베이젼트,리처드 레이,헨리 링컨 공저)라는 책을 펴내
위와 같은 놀라운 내용을 밝힌 바 있는데 책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을 하여 자녀까지 두었으며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구세주 행세를 하며 다윗 왕을 계승하여 유대의 왕이 되려다가 유대인의 반발로 인해 처형될 처지에 놓이게 되자
예수의 처남 아리마대의 요셉을 통하여 많은 뇌물을 받은 바 있는 로마의 유대 총독 빌라도와 짜고
십자가에서 죽는 것 같이 연극을 하고는 그 뒤 부활의 연극을 한 다음
로마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프랑스로 망명을 하였다.
아내 막달라 마리아와 자녀들과 프랑스 골(Gaul) 지방에 정착한 예수는 은둔 생활을 하며 80세를 넘게 살다 죽었다.
프랑스 남부의 마을 렌느 르 샤토에서 수 킬로 떨어진 야산 몽 카르두에 예수의 무덤이 있으며
막달라 마리아는 렌느 르 샤토에서 교회를 세워 교구장으로 지내다가 프랑스의 액생프로방스 생봄에서 죽었으며
예수의 제자 나사로는 마르세이유에 주교관구 겔트교회를 세워 주교로 있다가 거기서 죽었다.
예수의 후손들은 4세기 후에 프랑크 왕국의 메로빙거 왕조에 동화되었으며
카롤링거 왕조의 비지코트家 등 8개의 가문을 이루었으나
이후 기독교가 번성함에 따라 예수의 혈족은 겉으로 예수의 혈통임을 드러내지 않은 채 살아왔다.
1099년에는 예수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고 드프로아 드 부 이용이
십자군 전쟁 때 예수살렘에서 십자군이 세운 예루살렘 왕국에서 잠시 다윗 왕을 계승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예수의 친척 증표를 가진 귀족을 포함하여 많은 예수의 후손들이 현재 프랑스와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 살고 있다.
이러한 예수가의 비밀에 대해 탬플기사단(聖堂騎士團, 1118년 예루살렘 순례자 보호를 위해 조직된 교회군대)과
시온(Zion) 수도원이라는 유명한 비밀조직은 이를 깊이 믿고 신뢰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이러한 비밀에 대해 자세한 비밀기록들을 간직하여 남겨 놓았다.
그것이 중세 탬플기사단의 지방비부의 성터가 남아있는 프랑스 남부마을 렌느 르 샤토에서
1891년 폐허가 된 이 성채의 성당을 복원하던 교구 신부 베란제르 소니에르에 의해
양피지 문서와 보물이 발견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보물과 고문서를 팔아 막대한 부를 누린 신부에 대한 이야기를 조사하던 기자들에 의해 사실들이 밝혀지게 되었다.
BBC 방송에서 3차례에 걸쳐 방송되었던 예수가의 비밀이 책 성혈과 성배로 출판되어 세계를 경악케 하자
이에 놀란 영국의 기독교와 천주교 측의 사실 확인소송이 영국 법정에 제소되어 재판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대로 예수를 믿어온 가문의 기독교인이 주심 판사를 맡아 3년간에 걸쳐 심리를 하였으나
프랑스에 사는 예수의 27대 후손 피에로 프랑타르씨 등 많은 증인과 증거들을 비롯해
조상이 예수로 되어 있는 족보 책과 프랑스의 렌느 르 샤토에 예수의 묘비명이 있는 예수의 무덤까지
현지 답사하여 확인하고는 무덤의 사진까지 보여주며 책의 내용을 모두 인정하는 판결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심판사는 판결을 미뤄오다 빨리 판결하라는 법원의 독촉을 받고 판결하기를
나도 3대째 예수를 믿어온 기독교 집안의 자손으로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부정하려고 무던히 노력했습니다만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프랑스로 망명하여 84살까지 살다 죽었습니다.
예수는 로마 병사 판델라의 아들이었습니다.
책의 내용은 모두 사실이었습니다.
라고 판결을 하였다.
이러한 광경을 지켜보던 신부, 수녀, 목사들은 법정 방청석에서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며
기독교인이 목을 메고 자살하는 등의 소동이 벌어지고 교회가 문을 닫는 등의 소란이 영국 전역에서 확대되어
영국정부에서는 이러한 혼란이 지속되고 전 세계로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판결문의 공개 및 해외 유출을 금지시키고
언론에 보도를 통제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미 재판과정을 지켜본 영국의 기독교인들은 약 80%가 회교 등 타종교로 개종을 하였으며
유럽과 미국 등에서도 수 많은 교회가 문을 닫는 등의 소동이 이어졌다.
1982년 처음 책이 나와 세계적인 화제가 되자
한국에서는 전 언론(동아, 조선, 중앙, 부산일보 등)에서 보도하였으나
재판과 판결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보도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기독교가 급격히 퇴락하던 그 당시의 세계적 추세와는 달리
한국의 기독교는 한국의 경제발전에 편승하여 계속해서 급성장하는 이변을 낳았다.
그리고 또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이 죽지 않았다는 증거로서 예수의 시신을 쌌던 천을 성의(聖衣)라고 하여
기독교와 로마 교황청이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증거로 삼아왔던 세마포(細麻布, 토리노 성의로 불러 왔음)가
죽은 사람이 아닌 산 사람을 감쌌던 것이라는 것이 과학적 분석과 여러가지 문헌의 고증에 의해 밝혀진 바
국내에서도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 (엘마 그루버,홀거 케르스텐 지음,홍은진 번역)라는
제목의 책이 출판되어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음을 더욱 분명히 밝혀주었다.
토리노 성의는 1세기 때부터 유대와 유럽의 교회와 왕가에 때로는 공개 전시되며 보관되어 오다
1460년에서 1983년까지 성의를 보관해 오던 사보이 왕가에서 교황청에 기증하게 되어 현재 로마 토리노의 성당에 보관되어 있다.
그러나 죽은 시체에는 필요가 없는 100근(40㎏)이나 준비 된 상처 치료제인 몰약과 침향 (알로에 추출물, 요한복음19:40)과
피, 땀 등에 의해 얼굴과 전신이 그대로 새겨져 있는 토리노 성의는 과학자들의 분석에 의해 상처 입은 산사람을 싼
세마포라는 것이 밝혀져 오히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유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이러한 사실을 음폐하기 위해 1988년 10월 13일 토리노의 대주교 발레스트레오 추기경은
토리노 성의가 13~14세기에 만들어진 모조품이라고 발표를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아는 과학자들이 공개적인 검증을 계속 요구하자
1997년 9월 5일에는 토리노의 성의가 예수의 시신을 쌌던 진품이라고 번복 발표를 하고는 감정 요구에는 일체 응하지 않고 있다.
토리노의 성의는 예수 대신 십자가를 진 사람의 몸을 감쌌던 것이지만 그 마저도 죽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증거물이 되어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음을 더욱 분명히 증명하고 있다.
출처 - 1982. 2. 20자 동아일보

하나님은 누구인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여호와(Yehowah), 야훼(Yahweh), 엘로힘(Elohim)으로 혼용한다.
아직도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용어는 정의되어 있지 않다.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이 인정하는 정설로는 야훼=여호와, 엘로힘=하나님의 정도다.
Elohim : 기독교 성경에는 하나님으로 번역돼 있으나 원래 의미는 고대 히브리어로 '하늘에서 온 사람들'이란 복수형.
먼 옛날 외계에서 지구를 방문해 고도로 발전한 DNA 합성기술로 실험실에서 모든 생명체를 과학적으로 창조(지적설계)한
다른 행성에서 온 인류의 창조자들을 의미한다. 출처 : http://www.rael.org


야훼 신은 어디서 왔는가?
구약성서를 보면 아브라함에게 신이 자신의 이름을 야훼라고 자칭하며 나타난다.
성경에서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우는 아브라함은 신학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허구의 인물이다.
이집트와 가나안지방에서 아피루 라고 불렸던 셈족계열의 유목민들이 히브리민족의 시조로 알려져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며, 신학적 사실이다. 아피루는 히비루 또는 하비루라고도 불리운다.
최근발견된 아마르나 문서등에 의하면 아피루들은 부족적, 가족적 유대가 없는 다양한 출신의 비정착인들로 등장한다.
그러므로 다양한 씨족 출신으로 출현시기 또한 제각각인 셈족 이주민 부족들이 유일신을 섬겼다는 것은 전혀 타당성이 없다.
그렇다면 히브리민족의 시조인 아피루들은 언제부터 야훼를 숭배하게 되었는가?
모세는 이집트인에게 학대받고 있는 아피루 노예에 대한 분풀이로 이집트인을 죽이고
이집트를 탈출하여 미디안 땅으로 도망가서 사제의 집에 의탁했다.
모세는 시나이산(=호렙산)에서 여호와를 만나고 동포 이스라엘을 구출하라는 사명을 받는다.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여호와와 맺은 계약을 시나이 계약이라고 하는데 이는 기독교인이라면 잘 아는 사건이다.
그러나 현대의 신학계에선 그러한 것들은 모두 신화이고
사실은 모세가 여호와의 제의를 미디안인들로 부터 전해 받은 것이라는 가설이 대두되기도 한다.
이는 무엇보다도 모세의 장인이 미디안인 이었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구약성서에는 미디안인들과 겐족속이 서로 동일하게 쓰이고 있다는 점에서 종종 '겐족속 가설'이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이집트를 탈출한 신화적 인물 모세는 새로운 신 앞에 동포 이스라엘 백성을 규합하여 하나의 새로운 공동체를 이룬다.
여호와는 이집트의 신이 아니라 분명히 사막과 산악지방의 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어느 학자는 여호와를 남쪽 네게브 지방과 아카바만 사이 지방에서 알려져 있던 신의 이름이라고 추정한다.
이스라엘 민족의 신 야훼는 헤브라이 글자 4자음 YHWH(모두 자음이고 모음이 없다)로 표기되어 있다.
구약성서에서는 야훼라는 이름이 7,000번 이상이나 나온다.
그러나 신약성서에는 야훼 이름이 전혀 나오질 않는다.
이스라엘의 신인 고유명사 야훼(Yahweh)의 본래의 뜻은 분명하지 않으나
야훼는 '있다, 살다'를 뜻하는 하야(hayah)가 변화한 것으로 '있게 하는 자, 살리는 자'로 해석된다.
여기에 이스라엘 민족의 신에 대한 개념이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소라(Massorah) 학자들은 자음으로만 구성된 히브리어에 모음표를 붙여 올바르게 읽는 독법을 개발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출애굽기나 레위기 24장 11절의 계명에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고,
이것을 읽어야 할 때는 아도나이(Adohonay, 나의 주)라는 말로 대용해 왔다.
후에 야훼를 나타내는 자음과 아도나이를 표시하는 모음이 합해서 여호와라고 발음되었다.
즉 아도나이의 모음을 YHWH에 붙인 것이다.
제1모음은 제1자음 아래서는 a로 읽지만 y 아래서는 e로 읽는다.
따라서 그것이 16세기의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에 의하여 여호와(Yehowah)라고 읽히고
이 독법이 그리스도교에 전해져서 그리스도교도가 구약성서를 읽을 때 이를 여호와라고 읽었다.
근년의 여러 연구에서 여호와(Yehowah)는 야훼(Yahweh)로 읽는 것이 올바르다고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의 야훼는 결코 인류문명사에서 보편성을 가질 수 없다.
야훼는 모든 신을 총괄하는 하나님이라는 명칭을 들을 자격이 없는 고대의 잡신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출처 - http://kr.blog.yahoo.com/jnj0731/1219.html


야훼는 누구인가?
이스라엘 민족의 신인 야훼는 모세에게 4개의 히브리어 자음(YHWH)으로 계시되었다.
BC 3세기부터 이스라엘 인들은 다음의 2가지 이유에서 야훼라는 이름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았다.
첫째,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다른 모든 신들에 대해 보편적인 주권을 갖고 있음을 과시하기 위해
통상 신(神)이라는 일반적인 뜻을 지닌 엘로힘을 야훼 대신 사용하게 되었다.
둘째, 시나이 계약인 십계명에서 여호와의 이름인 야훼를 함부로 부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회당 예배에서는 아도나이(나의 주)로 불렀고 히브리경전에서는 키리오스(그리스도)로 번역했다.
6~10세기경에 히브리어 성서 원본의 재간행 작업을 벌인 마소라(Massorah) 학자들은
YHWH라는 이름을 구성하는 모음들을 히브리어 아도나이 또는 엘로힘의 모음 부호들로 대치했다.
이 때문에 여호와(Jehovah, Yehowah)라는 인위적인 이름이 등장하게 되었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이후의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야훼 대신 여호와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러나 19~20세기 성서학자들은 다시 야훼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2세기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같은 초기 그리스도교 저자들은 야훼로 발음했다.
다른 그리스어 필사본들도 YHWH를 야훼로 발음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하나님이 지니는 이 고유한 이름은 여러가지 의미로 해석되어왔다.
많은 학자들은 '그는 모든 것을 존재케 한다'(Yahweh-Asher-Yahweh)로 해석해야 한다고 본다.
사무엘 상에서 하나님은 야훼 테바오트(Yahweh Teva-ot) 즉 '그는 만군(萬軍)을 존재케 한다'로 표현하는데
여기서 만군은 하늘의 왕국 또는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듯하다.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은 모세 시대 이전부터 알려져 있었다고 보고 있다.
모세의 어머니 이름은 요게벳인데, 이는 야훼라는 이름에 바탕을 둔 이름이다.
그러므로 모세가 속했던 레위 지파는 '야훼'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을 것이며,
Yo, Yah, Yahu라는 짧은 형태로 특별한 뜻없이 신을 지칭하는 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출처 - http://kr.blog.yahoo.com/cocolandkr/661.html

우리에게 인식되는 신의 존재와 성격은 그 신을 인지하는 사람의 인식 수준에 의해 좌우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신 야훼는 이스라엘 민족이 처한 환경과 그로 인한 민족 정신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강대국에 의해 끊임없이 쫓겨다녀야 하는 연약한 유목민족의 신 야훼,
그는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주변국과 강대국들을 용감하게 물리치는 전쟁이 신이요, 만군의 주였다.
그러나 이렇듯 철저하게 이스라엘을 싸고 도는 민족신 야훼도
이스라엘이 앗수르(앗시리아)에 멸망하고,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당하고 나서는 함께 스러질 수 밖에 없었다.
이스라엘의 수호신 야훼는 앗수르나 바벨론의 신을 넘어서지 못한 나약한 신으로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유다의 지식층이 대거 바벨론으로 유배되고 난 후, 그들의 신에 대한 인식은 민족의 신, 수호신의 개념을 넘어서게 된다.
그리고 당시 유대의 신과는 비교할 수 없는 훌륭한 전지전능의 만나게 된다.
바로 페르시아의 종교, 짜라투스트라의 신을 만나게 된 것이다.
위대한 선각자 짜라투스트라는 한 민족만을 상대하고 돌보는 편협한 신이 아니라
우주 전체를 굽어보는 창조의 신, 전 인류에게 박애를 가르치는 전능하신 신을 만나고 있었다.
비로소 유다의 선각자들은 자기들의 신이 얼마나 유치하고 편협했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들은 자기 민족이 다시 살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그 유치한 신을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기원전 5-6세기 경, 진보적 신학자들이 제2의 이사야라고 부르는 예언자로 등장한다.
이 때부터 이스라엘의 신은 전통적인 야훼에서 벗어나 오늘날 기독교 (개신교, 가톨릭, 정교회를 포함하는)의
유일신(배타적 신이 아니라 우주만물, 전 인류를 품는)에 접근하는 차원높은 신을 만들게 된다.
그러나 바벨탑 노예생활에서 돌아온 유대민족 지도자들은 야훼를 다시 자신들의 민족의 신으로 만든다.
이로써 불쌍한 신 야훼는 다시 이스라엘 민족의 이기적인 신으로 추락한다.
기독인들이여! 안티들이 야훼를 죽이려 한다고 분노하지 마라.
한 민족을 살리기 위해 다른 민족을 무자비하게 살상하는 원시신 야훼는 죽어 마땅하다.
야훼가 죽지않으면 우주만물을 섭리하며, 전능하고 자비무한한 우리의 하나님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출처 - http://kr.blog.yahoo.com/cocolandkr/441.html

중세를 왜 야훼시대라고 하는가?
중세라는 말은 18세기에 나왔는데, 서로마 멸망~17세기말 또는 동로마 멸망~17세기초의 기간을 말한다.
최근에는 서로마제국 멸망이나 프랑크의 분열에서부터 시작하여 산업혁명 이전까지의 기간으로 정의하기도 한다.
18세기 사학자들은 중세를 그리스나 로마처럼 문화가 발전하지도, 그렇다고 당시처럼 과학이 발전하지도 않은
오로지 야훼 종교에만 매달려 있던 어리석은 시대로 간주하여 암흑시대 내지는 야훼시대라고 했다.
십자군원정의 실패, 교황을 뒷받침하던 세력의 몰락(지방호족, 기사 등), 지동설의 주장등으로
교회의 입김이 약해지자 세계는 비로소 야훼시대를 마감하고 산업사회, 정보화사회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출처 - 고대는 그리스와 고대로마, 중세는 야훼의 시대였다고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