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후 예수
다빈치 코드에 이어 최근 출간된 제롬 프리외르가 쓴 《예수 후 예수》는 그리스도교의 기원을 낱낱이 파헤치면서
인간의 아들이 어떻게 신의 아들이 되었는지 역사적 사실을 제시하면서 그리스도교를 이야기한다.
그리스도교는 근 2000년 가까이 서구세계를 지배해 왔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고대 그리스도교는 문헌들을 제외하고는 어떤 흔적도 남기고 있지 않다.
단지 글만이 남아 있을 뿐 유물이나 유적, 그림 같은 것들 조차 없다.
게다가 그 문헌들도 현기증이 날 정도로 난해하기 그지없다.
아래 그림은 예수의 성장 모습 ↓
그리스도교의 기원에 대한 새로운 가정
예수는 최하류 층의 보잘 것 없는 유대인으로 태어나서 끝까지 유대인으로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몇 십년 후 사람들은 그를 우리의 구세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여기게 된다.
예수는 인간의 보편적인 신분에서 벗어나 특출한 존재이자 그리스도교의 창시자가 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제롬 프리외르와 제라르 모르디야는 신약성서의 문헌들이
단순히 역사를 후대에 전하는 것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쓰이지 않았나 하는 의문을 끊임없이 제기한다.
한편 신약성서의 가장 오래된 문헌으로 복음서보다 먼저 쓰인 바울의 서신과
예수의 죽음 후 몇 해 동안 일어난 일들을 기록한 것으로 여겨지는 사도행전의 내용을 분석하면서
그리스도교의 기원을 새롭게 조명하고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확산되었는지를 추적한다.
역사로서의 성서 vs 문학으로서의 성서
복음서와 사도행전, 바울서신 내용 간의 불일치, 그것은 차치하고서라도 복음서 내용 간의 불일치는
성서를 단순한 역사적인 기록으로 보기 어렵게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복음서는 제각기 따로 쓰였다. 그것들은 하나로 통합되기보다는 서로 모순적이고 대립적이다.
도표나 지표를 만들듯이 내용을 해석하면 그 속에 묻혀버린 역사를 되찾을 수 있을까?
그것들을 나란히 놓고 상호보완적으로 같이 읽을 수 있을까?
제롬 프리외르와 제라르 모르디야는 성서의 내용을 여러 사람들의 손을 거치면서
극적이고 상징적이며 신학적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로 간주하고
그렇기 때문에 성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문학적 차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그들의 주장은 성서의 가치를 훼손시키기보다는 성서를 바라보는 시야를 트여주면서
성서를 대하는 자세를 되돌아보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한다.
어느날 갑자기
30~150년,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와 완전히 단절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를 진정한 이스라엘이라 주장하면서 유대와 분리된다.
예수는 유대인으로 태어나서 끝까지 유대인으로 살았으며 유대인으로 생을 마감했으므로
예수는 그리스도교를 창시할 수도 없었고 창시할 입장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아마도 제자들 중 하나가 그의 부활을 주장하며 그를 내세웠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예수의 모친인 마리아와 제자들의 수장인 베드로, 예수의 형제인 야고보, 사도요한,
스스로 사도라고 자처하는 바울 등은 어떤 역할을 했고, 새로운 종교를 만들기 위해 무엇을 왜곡했나?
복음서나 사도행전, 바울서신 등의 문헌들에서 그리스도교의 날조는 무엇인가?
예수가 처형당한 진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스도교는 어떻게 탄생했고 어떻게 확산되었는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는 어떻게 분리되었고 대립하게 되었는가?
작품《예수 후 예수》는 그리스도교의 기원에 대한 역사적 가정을 새롭게 조명한다.
이 책으로 성서의 사건들이 사실인지 문학적 허구인지를 따지기 보다는 사실을 사실로 대하는
이성적인 성찰을 추구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란다.
목 차
서문 기적의 기원
01장 예수 후 예수
02장 예수의 형제 야고보
03장 도래하지 않는 나라
04장 가족의 불화
05장 조산자 바울
06장 예루살렘 공의회
07장 심판의 날
08장 원천소설
09장 유대교와의 단절
10장 진정한 이스라엘
역자후기
부록1-연대표
부록2-그리스도교 문헌
그들이 예수를 죽였다
데살로니카 전서에서 바울은 특별히 유대인을 불신하며 그들을 인류의 쓰레기로 취급한다.
바울에게 그들은 예수를 죽인 자들이기 때문이다. 첫 고발에서 부터 가공할 만하다.
유대인은 주 예수를 죽이고...
그리스도교에서는 로마인 총독 빌라도가 예수를 죽였다고 하지만...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대제사장의 발의로 기소되어 십자가 형벌을 받는다.
누가복음(눅23:21)에서 빌라도는 예수를 사형에 처할 아무런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라고 소리 소리치며 재촉했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요한복음(요19:14-5)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그들이 소리지르되
없이하소서 없이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1세기말 요한복음에서 하나님과 예수를 동일하게 여길 때 성서해석의 이론적 변화가 있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인 자들이고 결국은 신을 죽인 자들이기에 그 책임을 묻는다.
요한복음과 누가복음은 바울서신보다 늦게 쓰였다.
바울서신이 유대인에 대한 신을 죽인 책임추궁의 단초가 되었다.
제2의 예수
예수와 스데반을 비교해 보면 예수의 완전한 복사판이라는 사실이 금새 눈에 띈다.
사도행전(행6:8)을 보면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게 행하니
그는 예수처럼 처음에는 민중의 지지를 받는다.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 한다.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최고재판소에 그를 예수처럼 율법 모독죄로 기소하고
그를 시기하는 거짓 증언자들을 세워 결국은 스데반을 처형되게 한다.
스데반은 예수가 죽은 몇년 후에 죽었으며 그리스도교의 첫 순교자로 알려진다.
스데반의 변론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데 사도행전의 5%를 차지한다.
신약성서는 스데반의 변론을 빌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제2의 예수가 또 한명 있다. 예수의 수석 제자인 베드로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교 운동의 중심인물이 되기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요한복음에서 베드로는 변절자로서 그리고 바보스런 인물로 소개된다.
사도행전에서는 그는 기적을 행하는 선교사가 된다.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였던 자를 일으키고, 룻다에서는 중풍에 걸린 자를 고친다.
마지막으로 욥바에서 한 여자를 살린다.
이런 행위를 통해 베드로는 새로운 제2의 예수가 된다.
백부장 고넬료를 개종시킨 사람도, 유대교로 부터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이끌어낸
사람도, 이방인의 세계에 신앙의 문을 열어준 사람도 다름아닌 바로 베드로다.
사도행전의 베드로는 더 이상 주저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지도자이고 웅변가이며 조직가이다. 어떤 망설임도 의심도 없는 영웅이다.
복음서의 모습과는 달리 사도행전의 베드로는 그리스도교 운동의 가장 큰 좌표가 되었다.
65년 베드로는 예수가 당한 것처럼 십자가 형을 받고 죽는다.
같은해 바울은 세례요한처럼 참수를 당한다.
사라진 천국
말세의 형세는 얼마동안 나타날까? 예수에 의하면 그것은 짧은 동안 나타난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임박했다는 기대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이었다.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하시더라. (막1:14-15)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막13:30. 마24:34, 눅21:32)
마가는 AD70년 경 이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막9:1)
10년 후 누가도 죽기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같은 말을 한다. (눅9:27)
마태 역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한다는데 대해 같은 입장을 취한다. (마16:28)
예수가 한 말을 들었던 사람들은 최소한 이 시기에는 대부분이 죽었을 텐데도 말이다.
그러나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아무런 답 없이 남겨진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언제 어떤 징조로 일어나는지에 대한 질문이 끈질기게 다시 나타난다.
제자들은 공관복음서에서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아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아오리까? (막13:4, 마24:3, 눅21:7)
그리스도교 문학은 결정적인 순간에 항상 대답을 미룬다.
그리고는 얼버무린다.
야고보서(약8:5)는 너희는 참고 마음을 굳세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요한계시록(계22:20)은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베드로후서(벧후3:10)도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 하고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
신약성서는 말세에 대한 반론이 없도록 두가지 전략을 채택한다.
첫째는 말세는 가까운 장래의 일이니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둘째는 내세는 멀리 있으므로 인내심을 갖고 징조를 보며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못 보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요16:16)
베드로
베드로는 모든 복음서에서 예수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이다.
호의적이지 않은 요한복음 저자도 베드로에게 서열 제1위를 주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아무런 망설임 없이 베드로를 첫번째 제자로 올려놓는다.
사도행전에서는 베드로가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나 예수는 베드로를 안드레 다음에 두었다.
마태복음(마16:18)에서 예수는 자신을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한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하고 말했는데, 반석 위의 교회란
말의 본원적 의미는 그리스어로는 결코 그런일은 없을 것이란 의미이다.
마태복음의 저자는 다른 복음서의 저자들과는 달리 베드로를 권좌에 올려 놓았다.
로마는 그를 수호의 상징으로 선택했으며 카톨릭 전통도 여기에 기반한다.
오늘날에도 교황은 바티칸에 있는 베드로의 권좌에 앉는다.
그런데 베드로가 권좌를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마태복음을 보면, 예수는 베드로에게 주었던 권좌를 없었던 일로 한다.
마태복음 18:1-4,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물으니
예수 가라사대 너희가 어린아이 같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20:23,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자기의 아들들을 주의 좌우편에 앉혀달라자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라고 대답하고 있다.
너희중에 으뜸이 되고자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이로써 베드로에게 특별히 허락되었던 모든 권좌는 물건너 가버렸다.
베드로는 물위를 걷다가 믿음이 작은자로 예수에게 심한 핀잔도 받았고 (마14:30-31)
예수로 부터 사탄이라고 모욕도 당했고(막8:32), 마귀라고 모욕도 당했다.(요6:70)
바울이 쓴 갈라디아서에는 야고보, 베드로, 요한 순으로 서열이 나온다.
사도행전
바울이 죽고 20여년이 지난 후 누가는 사도행전을 기록한다.
바울은 사도행전의 중심 인물로서 태동하는 그리스도교 운동의 영웅으로 등장한다.
사도행전은 그리스도의 삶과 바울의 위대한 업적을 잇는 고리로서 4복음서 다음에 위치한다.
모든 복음서들은 예루살렘에서 이야기의 끝을 맺으나 사도행전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한다.
사도행전은 로마에서 끝을 맺으므로 사도행전을 잇는 바울서신은 당연히 로마서가 된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교 세력을 확장시키는 주인공으로 묘사된다.
바울은 신약성서의 27개 문서중 절반이 넘는 14개의 바울서신을 썼다.
14개의 바울서신은 분량적으로도 신약성서 1/4을 차지한다.
율법의 그리스어는 nomos 이다. 이 용어는 바울서신에 한없이 나타난다.
율법은 신약성서에서 190회 이상 언급되는데, 65%가 바울에 의해 거론된다.
율법 용어는 바울서신인 갈라디아서(32회)와 로마서(52회)에서 집중적으로 나온다.
사도행전은 예수의 제자들 즉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했어야 옳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도입부에서 열두 제자들의 신분과 예수가족을 잠깐 소개한 후
전체의 절반이 넘는 분량을 오로지 바울 한사람의 행적과 업적을 기록하는데 할애한다.
중요한 위치에에 있는 야고보 조차도 별 소개도 없이 이름만 3번 거론된다.
사도행전에서 중요한 사도는 오직 베드로 하나가 있을 뿐 바울은 사도가 아니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에 대한 기록이 아닌 바울에 대한 기록이다.
예수사상의 반전
마태복음(마10:5-6)을 보면, 너희는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말고 사마리아의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로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예수의 명령은 단호하다.
이후 (마15:24)에도 예수는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노라.
예수는 또 구원을 청하려 온 가나안 여인에게
자녀에게 줄 떡을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마15:2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짖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마7:6)
당시 예수는 오로지 신성한 땅과 선택된 민족 이스라엘의 구원만 생각하고 있었다.
살아 생전의 예수에게는 이방인들은 개나 돼지이고 구원의 대상이 아니었다.
예수가 죽자 복음서 저자들은 무례하게도 예수의 사상을 바꾼다.
마태복음(마28:19)은 부활한 예수를 통해 지시한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마가복음(막16:15-16)에서는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누가복음(눅24:47)에서는 죄사함이 모든 족속에게 약속되어 있으며...
사도행전(행1:8)에서는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부르짖는다.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그리스도교는 창시자가 없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2,000년에 걸쳐 존재하고 있다.
예수가 없었다면 그리스도교는 없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는 역설적 주장이다.
복음의 증거인 예수 자신이 새로운 종교의 창시를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오히려 바울 없이는 그리스도교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게 더 정확하다고 할 것이다.
바울이 창시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중요한 창시 인물인 것 만은 틀림 없다.
그의 서신이 교회의 이데올로기이자 교리의 큰 소재이기 때문이다.
바울의 교리가 없었다면 그리스도교는 스스로 내부분열을 가져왔을 것이다.
복음서들은 예수의 말, 설교 등을 기록하고 있지만 예수자신이 기록으로 남긴 건 하나도 없다.
예수의 존재와 그의 가르침은 그가 죽은 후 2-30년을 지난 후 부터 기록으로 만들어진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최후의 심판을 하러 재림하는 부활의 그리스도이다.
이런 취지의 내용이 최초의 그리스도교 기록인 바울서신의 핵심을 이룬다.
바울서신은 그리스도교 문서들 중 가장 오래되고
저자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문서이기에 그의 역할은 더욱 큰 비중을 차지한다.
예수나 베드로나 야고보 그밖의 어떤 제자들도 그들이 남긴 기록이 없는 것과 비교할 때
바울의 업적은 그리스도교의 창시와 교리의 전승에서 실로 위대한 것이다.
64년 로마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란이 있었다.
로마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70년 유대교의 성전을 파괴한다.
성전의 파괴가 없었다면 그리스도교는 아직도 유대교의 한 부류로 남았을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정치적 결단이 없었다라도
그리스도교는 역사 초기의 수많은 고대종교들 중의 하나로 사라졌을 것이다.
380년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그리스도교 운동을 인가하고 로마의 국교로 만들었다.
교회와 로마제국이 결합하므로서 로마 황제들은 그리스도교인들을 호의적으로 대하고
평화롭게 살도록 했으며 이로써 선조 종교였던 유대교를 이길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그리스도교의 본사는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옮겨앉는다.
기다려라, 인내하라
종말을 기다리는 것은 예수에 대해 남겨진 덧없는 기대라고 보아야 할 것인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에 대해서는 무슨 일이든 추호의 의심도 없다.
지난 2000년 세상을 심판하러 예수가 재림한다는 휴거론을 교회마다 외쳤지만
그리고 휴거론은 황당무계한 거짓으로 판명되었지만
그리스도교는 아무일도 없었던 양 계속해서 새로운 교리로 대처한다.
예수의 어떠한 예언도 실현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온전히 수용하는 바울, 마가, 마태, 누가,
요한 등과 모든 신약성서의 저자들도 예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흔들림이 없다.
예수가 부활하여 항상 살아있다는 주장은
그렇게 해야만 예수에게 건 희망이 계속 유효하게 되며
더 나아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그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기대를 지 않으면서
그의 부활은 그 기대를 다시 활성화시킨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까지나 서로를 의지하고 위로하며
악한 이 세상의 종말과 선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최후의 심판을
계속해서 참고 기다려야 한다고 믿는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한다.
제롬 프리외르와 제라르 모르디야
제롬 프리외르와 제라르 모르디야는 작가이자 시네아스트(Cineaste, 영화감독).
그들은 프랑스와 독일 합작방송인 아르떼(Arte)에서 《예수의 수난과 부활》을 소재로
다큐멘터리 그리스도의 몸(Corpus Christi, 1997년)을 제작했다.
다큐멘터리는 신약성서 4복음서의 내용과 관련한 의문점들을 제기해서 큰 반향을 불렀고
그 후 그것은 《예수 대 예수》라는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그들은 그 반응에 힘입어 신약성서의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교의 기원에 대해 새롭게 조명한 《예수 후 예수》도 도서로 출간한다.
제롬 프리외르와 제라르 모르디야는 냉철한 시각과 예리한 분석으로 촉망받는 작가들이다.
도서구입
인터넷에서 《예수 후 예수》를 검색하면 이 책을 파는 도서쇼핑몰들이 나온다.
정가는 19,000원, 인터넷에선 17,100원에 구입할 수 있다.
2006-1-25출판, 3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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