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기성 오청원


오청원(吳淸原) 제1화
과거 일본에서는 명인을 9단에 해당하는 사람에게만 불러줬고 한때는최고의 타이틀을 가진 사람에게만 명인이란 칭호를 불러주었다. 그러나 명인은 꼭 바둑에서만 쓰이는 명칭은 아니다. 도자기를 잘 빚는 사람도 명인이 되고 요리의 극치를 달리는 사람도 명인의 반열에 넣곤 한다.
그러나 바둑만큼 명인이란 이름이 잘 어울리는 부류가 또 있을까 싶다. 동서고금을 살아온 바둑의 명인 중에 개인에게서나 팬들의 머릿속에 떠나지 않는 명승부를 다시 한번 리와인드 시켜보는 시간을 갖도록 한다. 먼저 바둑이라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바로 오청원이다.

오청원(吳淸原)
그는 살아있는 기성(棋聖)이다. 중국 본토 발음으로는 우칭위엔. 그러나 우칭위엔 하면 어쩐지 낯선 느낌이 들어 한자의 우리식 발음 그대로 오청원이라고 하겠다. 그는 1914년생이니까, 한국의 바둑 대부 조남철보다는 9년 연상, 일본의 사카다보다는 6년 연상이다. 빅게임이 있으면 어디든 날아가서 검토실의 상좌를 차지하고 젊은 기사들과 어울려 복기 검토에 열중하는 싱싱한 기성이었다. 최근 중국에서는 그의 일생에 관한 영화를 제작하느라고 몹시 바쁘다고 한다. 제자로는 일본서 활약하고 있는 린하이펑(林海峰)이 있고 한국서 활동하고 있는 철녀 루이나이웨이(芮乃偉)도 수제자. 오청원은 언제나 시대를 달리 하는 영웅들과 비교대상이 될 만큼 출중한 기재였고 시대를 오늘날의 관점으로 통합한다고 해도 가장 위대한 기사로 꼽힌다. 바바둑계에선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절대자가 바로 오청원이다. 그의 위대함에는 승부사로서의 업적과 바둑관의 비약적 확대에 힘쓴 구도자로서의 양면이 모두 포함된다.

오청원의 승부사로서의 업적을 헤아려보면 무엇보다 치수고치기 10번기 시리즈를 빼놓을 수 없다.
지금처럼 상금을 건 타이틀전이 드문 시절, 그리고 단위(段位)가 엄하게 존중되던 시절, 오청원처럼 젊은 기사가 기량을 맘껏 그것도 타국 땅에서 펼쳐내기란 무수한 어려움이 따랐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청원은 그의 생애 중 하이라이트였던 십 수 년을 이른바 승부 바둑의 극단, 치수고치기로 화려하게 장식했으니 승부사도 이런 승부사가 일찍이 없었다. 오청원은 1939년부터 1955년에 걸친 무려 17년간의 10번의 치수고치기 10번기에서 단 한차례도 패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세출의 천재를 상대를 전부 하수급으로 전락시킨 기막힌 승부사였다. 또 그의 바둑사적 업적에서 결코 빠지면 안 되는 것은 바로 新포석이라는 새로운 혁명이었다. 1930년대 초반 기다니 미노루(木谷實)와 함께 현대바둑의 효시가 될 업적 신포석을 개발하였으니 그 업적은 바둑의 무궁무진한 세계에 대한 하나의 거대한 비밀을 캐어낸 위대한 금자탑이었다.

신포석. 그렇다. 새로운 포석. 즉, 새로운 바둑이라는 뜻이었다.
젊은 바둑꾼 오청원은 화점 삼삼 천원을 삼각편대로 형성하는 독특한 포진을 선보였다. 특히 천원이란 곳은 바둑판의 한 가운데에 위치한 중심점으로 당시 바둑가에선 착수를 금기시할 정도의 신성불가침에 해당하는 곳. 바로 그 옥쇄를 풀어헤친 이가 오청원이며, 그 정신적 기반에서 현대 포석이 속도와 중앙 중시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중국 복건성에서 태어난 오청원은 이름이 천(泉), 자(字)가 청원(淸原)이었다. 6남매의 3남으로 태어나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났다. 부친은 동경제국대학을 국비 유학생으로 졸업했던 재원이며 유학 후 북경의 최고재판소에서 일을 했을 정도의 엘리트.

오청원의 바둑 인생을 송두리째 결정지은 이는 물론 부친이었다.
오청원의 부친은 일본 유학시절 일본의 뭇 프로들과 어울려 기력연마를 도모했을 정도의 열성 바둑 팬. 그는 손수 오청원을 비롯한 자식들에게 바둑을 직접 가르쳤다. 오청원의 부친은 엄한 교육을 자식들에게 시킨다. 일찌감치 오청원의 3형제를 문관시험에 나가게 하기 위해 가정교사를 붙여 개인지도에 들어갔다. 아예 소학교에는 보내지도 않았다. 그런 부친의 열성은 급기야 바둑으로 옮아오게 됐는데, 가장 먼저 규칙을 설명했고 곧장 기보를 마련해 두게 했다. 애당초 3형제에게 모두 바둑을 가르쳤으나 제일 어린 오청원이 기재를 보이자 오청원에게만 스파르타 훈련을 시키게 된다. 오청원이 살아있는 기성으로 추앙 받은 것도 알고 보면 부친의 지독한 권유에 의한 것이니, 천재는 만들어지는 것일까. 필자는 가끔 그런 상상을 하곤 한다. 오청원은 두 손의 중지가 조금씩 굽어 있다. 어릴 때부터 몸이 좀 허약했던 오청원은 부친이 가져다 준 일본의 최신 기보집을 외우다시피 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당시 그 책은 너무 무거워 책을 받치다 보니 중지가 휘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불세출의 영웅이 되는 과정의 험난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오청원의 부친은 오청원이 12세 되던 해 갑자기 사망한다.
폐결핵이라고 추정되는 몹쓸 병에 걸려 각혈을 한 지 2개월여, 그는 33세의 젊은 나이로 불귀(不歸)의 객이 되고 만다. 유복했던 오청원의 집안이 갑작스런 부친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기울고 마는 것은 당연지사. 급기야 오청원이 바둑으로써 집안일에 보탬이 되어야 하는 소년가장의 처절한 신세가 된다. 일본 유학길에 오르는 것도 따지고 보면 든든한 후원자이던 부친의 죽음이 만든 일이었다. 부친의 죽음은 오청원에게나 가족에게나 몹시 슬픈 일이었으나 오청원에게는 어린 나이에 바둑으로 대성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계기가 된 것이니 아이러니 하다. 그 당시 빼놓지 못할 일화가 하나 있다. 부친이 저 세상으로 가기 며칠 전, 3형제를 불러놓고 부친은 유품을 하나씩 아들들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장남에겐 탁본을, 차남에겐 소설을, 그리고 막내인 오청원에게는 기보를 주었다고 한다. 훗날 장남은 공무원이 되었고 차남은 문학자로, 막내는 기사가 되었으니 셋 다 부친의 기대대로 걸어간 셈이다.

오청원은 부친이 사망하기 얼마 전부터 북경의 한 장군에게 소개된다.
그 장군은 친일성향을 갖고 있어 국민에게 그리 신망이 높지는 않았다. 그러나 권력으로 따지면 실세중의 실세로 지금으로 치면 북경시장과 경찰청장을 합친 권력가였으니 북경의 대통령으로 불릴만한 거물이었다. 그 장군은 바둑을 몹시 좋아하였고 고수였다고 전해진다.

오청원(吳淸原) 제2화
1920년대의 중국은 프로제도가 당연히 없었다.
따라서 권력자가 내놓은 약간의 돈을 상금으로 삼아 지역 고수들이 몰려들어 일종의 대회를 치르는 형식이 잦았다. 당시 오청원의 이모부는 오청원이 바둑의 세다는 소식을 전했고 흔쾌히 북경의 장군은 그를 받아들인다. 지금으로 치자면 권력자의 녹을 받는 장학생이 된 셈이었다. 그 장군에게는 오청원이나 여러 바둑꾼들이 대국을 해주기도 하고, 자체적으로 대회를 하면서 장군을 즐겁게 하는 일이 주업무였다. 오청원은 그 당시 중국에서 한 달을 여유 있게 생활할 수 있었던 정도의 보수를 받았다. 부친의 죽음으로 가세는 급격히 기울고 집안 가재도구까지 내다 팔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으나 오청원이 가져오는 장학금 탓에 오청원의 가정은 금세 복원될 수 있었다. 12세의 어린 나이에 부친이 가르친 그 바둑으로 인해 오청원이 졸지에 가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오청원이 시대를 새롭게 창조할 인물로 인정되기엔 많이 모자랐고, 북경을 벗어나 새로운 무대로 나가는 데에도 시간이 약간 더 걸렸다. 그런데 장군의 수하에 들어간 지 1년도 채 못돼 그 장군은 실각하고 오청원에겐 또 다른 기회가 찾아온다. 지금으로 치자면 상금을 따낼 수 있는 대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오청원은 거기에 참가하는 일이 잦아들기 시작한다.

북경에는 청나라 때 조성된 큰 공원이 세 개 있었는데 당시 그중 두개의 공원에는 바둑판을 마련해둔 가게가 있었다. 따라서 북경의 바둑 팬은 두 가게에 집중적으로 몰려들기 시작하는데, 거기에는 가끔 부자들이 상금을 걸고 선수들을 불러모아 대회를 열곤 했다. 오청원은 그를 돌봐주던 장군이 사망하자 자연스레 그 공원의 대회에 자주 끼게 되었고 연전연승하여 푸짐한 상금과 상품을 가져오기도 했다. 지금으로 치자면 아마추어 대회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도 독식하다 보면 상당한 재물이 되곤 했다. 가세가 기운 오청원의 입장에선 그만한 복도 없었다고 할 것이다. 사실 그곳에서의 연전연승이 북경신문에 오르락내리락거리게 했고 그때부터 오청원은 제법 기재가 있는 소년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그러다 일본인 클럽에서도 소문이 자자하게 나게 되자 오청원의 주변에서는 오청원과 일본인 중 센 선수와 맞붙이는 등 일종의 이벤트가 성행하기도 했다.

신동 오청원을 보기 위해 그가 나이든 일본인 아마추어 기사를 혼쭐내는 모습을 즐기려고 일부러 대회를 만들기까지 했으니 가히 오청원은 날개 돋친 천리마처럼 기재를 키워나갔다. 당시 구경꾼 중에 한 프로모터가 있었으니 그가 훗날 일본인 스승이 되는 세고에 겐샤꾸에게 ‘북경의 천재소년’ 오청원을 알린다. 오청원이 12세 되던 여름. 일본으로부터 이와모토 6단, 고수기 4단 일행이 방중한다. 그때 이미 오청원은 북경의 소년강자로서 이름이 자자했으니 당연히 그들에게 오청원은 소개되어지고 지도대국을 받게 된다. 이와모토는 1940년대 중반 하시모토 우따로와 함께 일본 바둑계의 거성이 되는 인물로 지금으로 치자면 단순 보급기사가 아니라 혁혁한 토너먼트 프로였다. 1902년생으로 오청원보다는 12년 연상의 장형.

그때 처음으로 일본의 프로기사와 대국하게 되는데 이와모토 6단에게 오청원은 석 점을 놓고 2연승, 두 점을 놓고 2집 패배를 당한다. 그리고 고수기 4단에겐 두 점 바둑에서 이긴다. 즉, 일본의 프로와 두점 치수라는 실력평가를 받게 된다. 일본 정상 프로와 두 점 치수라... 이때 오청원이 거둔 성적은 혁혁한 것이었고 일본 내에서도 중국의 천재소년을 불러들이자는 여론을 형성하게 만든 기폭제 역할을 한다. 물론 그로부터 오청원이 막상 일본으로 건너갈 때까지는 2년이 더 소요되며 스승이 되는 세고에와는 그동안 무려 50여 통의 서한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세고에는 마지막 제자로서 한국의 조훈현을 택한다. 세고에의 제자 중 또 한 명은 하시모토 우타로. 따라서 이 세고에는 한-중-일 3국의 최고수급인 오청원, 조훈현, 하시모토 우따로 등 세 사람을 동시에 거느린 행복한 기사였다. 그가 오청원의 기예를 알아듣고 얼마나 그에게 러브 콜을 했는지 증명해주는 것이 바로 50여 통의 편지다. 그런데도 2년이나 시간이 소요된 건 소개하는 측에 좀 소극적인 인사들이 끼어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 기원의 부총재인 오오쿠라 남작은 2년 동안 월 200원의 생활비를 보증했고 2년 동안은 확실하게 재능을 뒷바라지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또 다른 측에서는 오청원의 몸이 쇠약하다든지 날로 험악해져가는 중일관계의 장래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한쪽에서는 오청원을 대대적으로 환영하였지만 또한 쪽에서는 주저하는 일이 생겨 2년의 세월을 보냈던 것이다. 1927년이 되자 오청원은 북경의 기사 중 일인자가 된다. 그 해 여름 일본에서 또 다른 프로기사가 찾아오는데...

이노우에 5단이 북경을 찾아온다. 당연히 북경 최고수 오청원과의 대국이 빠질 리 없고 두 점으로 맞선 오청원은 완승을 거두고, 다시 정선으로 세 판을 두어 1승1무1패를 기록한다. 당시 일본에서 4단 이상은 고단자로 불렸고, 고단자와 정선으로 두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북경에서는 놀랄만한 일이었다. 이노우에의 결단이 돋보인 대목이었다. 훗날 이노우에도 자신이 정선으로 오청원과 두기로 한 건 대단한 식견이었다고 자랑했다. 어쨌든 이노우에와 정선으로 1승1무1패를 기록했다는 사실은 오청원의 실력을 가늠하는 단서가 된다.

오청원(吳淸原) 제3화
그 무렵 오청원의 집안은 나날이 궁핍해지고 있었다.
작은 형은 학교를 그나마 다니고 있었지만 큰형은 학교를 중퇴하고 집안 일을 돌보는 상황이었다. 집안 형편은 막내 오청원이 이노우에와의 만남을 계기로 물 설고 땅 낯선 일본으로 향하게 된 큰 계기가 된다. 1928년 오청원의 스승이 될 세고에의 뜻을 받들어 하시모토 4단이 북경을 찾아온다. 바로 전해 여름에 있었던 이노우에와의 대국 후 일본에서 오청원의 기재가 대단하다는 얘기가 퍼지자 정확한 기력을 알아보기 위해서 였다. 하시모토는 이노우에와 함께 후지사와 사카다 같은 걸물이 나오기 전까지 일본 바둑계를 호령하던 거물이다. 그 하시모토에게 오청원은 정선으로 덤빈다. 그리고 4집승, 6집승을 거두는 괴력을 과시한다. 불과 14세의 소년의 기력이 일본의 신예들과 맞먹는 수준까지 이르렀다는 얘기다.

그 해 10월 오청원은 도일하기로 맘을 굳혔다. 세고에의 문하에 들어가기로 한 것. 세고에 도장은 훗날 한국의 조훈현이 마지막 수제자가 되는데, 중국의 오청원, 일본의 하시모토 등과 함께 한중일의 최고수를 직접 키우는 행운을 갖게 된다. 오청원은 매달 200원의 생활비를 일본기원의 부총재이던 오쿠라 재벌로부터 2년간 유학비 명목으로 받기로 하고 일본에 진출한다. 지금 돌이켜보면 스카웃된 것이다. 200원은 당시 중류 가정의 한달 생활비가 100원이었음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액수. 살아있는 기성으로 추앙받는 오청원이 일본땅을 밟은 것은 1928년 10월18일. 2년 계약의 일본생활이 시작된다. 소년 오청원은 2년 후에도 중국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한다.

어렵사리 손에 쥔 유학비 200원. 그리고 바둑으로 대성할 수 있는 기회의 땅 일본을 등지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어떻게 들어온 메이저리그인가. 오청원의 집안에서는 2년 후 꼭 돌아오라고 부탁했고, 그도 그러리라 대답했지만 속내는 일본을 떠나올 맘이 전혀 없었다. 소년의 야망은 이미 커질 대로 커져 있었다. 오청원은 '마괘' 라는 중국 옷을 입고 다녔다. 그러나 곧 일본 옷으로 갈아입었고, 선물 받은 일본 옷차림으로 공식시합에출전한다. 중국인의 시각으로 보면 서글픈 일이지만 소년에게는 일본이 좋았다. 바둑만 잘 두면 무엇이든 생기는 이 일본이 좋았다.

오청원이 일본에 건너오면서 문제가 된 것은 과연 그를 몇 단으로 인정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지금같으면 연구생이 아니라 스카웃된 용병기사. 따라서 당연히 프로로 인정을 하는데, 몇 단을 주느냐는 문제는 오청원의 자존심이기 이전에 일본기사의 자존심도 걸린 중차대한 문제였다. 당시 단위는 절대의 권위였다. 지금처럼 프로시합이 없던 때이므로, 일본 기사들은 승단대회가 최고 권위의 승부시합으로 인정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프로라도 치수가 단위에 따라 달라지는 최고의 권위가 단위였다.

오청원(吳淸源) 제4화
일본에 와서 문제가 된 건 오청원에게 과연 몇 단을 인정하느냐는 것이었다.
여전히 토박이 정신에 투철한 기사들은 굴러온 돌격인 오청원이 기껏해야 초단밖에 더 되겠냐고 비아냥거리는 회수가 잦았지만 스승인 세고에 선생만이 오청원에게 3단 실력은 충분하다고 주장하여 3단격(格)으로 간주하고 정식 단위 인정시험을 치른다. 첫 상대는 그 해 정기 승단시합에서 1위를 차지한 시노하라 4단. 그와의 대국에서 오청원은 흑을 들고 불계승을 거둔다. 제2국은 슈샤이 명인과의 2점 바둑이었다.
이 시합이 말하자면 본시험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슈사이 명인은 지금으로 치면 굵직한 타이틀을 전부 보유한 실력에다 9단 이상의 단위처럼 권위로도 최고의 존재였던 살아있는 우상과 같은 존재였다. 슈사이 명인은 몸집이 아주 작아 35Kg에도 미치지 못했으니 바둑판앞에 앉아 있으면 10세 안팎의 소년으로 착각하기 쉬운 타입이다. 오청원은 여기서도 당당히 4집승을 거둔다. 이에 관한 슈샤이의 강평. "흑의 태도는 장중견실(莊重堅實)의 극치이며 가히 최후까지 우세를 지속하고 보무당당(步武堂堂)해 백에게 파고들 틈을 주지 않은 2점바둑으로서 쾌심의 걸작이었다."

명인에게 2점바둑을 이긴 후 다시 무라지마 4단에게는 흑으로 5집을 이겨 3연승. 비로소 오청원은 정식 3단을 인정받게 된다. 3단을 인정받고 난 다음 오청원이 일본 바둑계로 곧장 뛰어든 건 아니다. 그는 평소에도 몸이 약해 장시간 두는 바둑은 힘들어 했는데, 주변의 도움으로 건강진단을 받게 된다. 행운당이라는 병원에서의 진단결과 "가슴에 결핵의 자연 치유 흔적이 있어 재발될 우려가 있다. 선천적으로 몸도 허약하다. 따라서 기사의 목숨을 건 승단시합에는 1년 정도 참가하지 아야 한다. 이 대목이다. 과연 승단시합이 목숨을 건 대회일까. 지금의 관점으로는 도대체 이해가 안가는 대목이다. 요즘이야 단위의 절대적 권위는 무참히 깨진 시대이므로 승단대회가 가장 가치가 적은 듯 오히려 이해하는 시절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돈이 생기는 시합이 드물었을 뿐 아니라 단위의 권위가 극도로 충만한 시대였다. 그리고 단위의 높고 낮음으로 그 신분의 높낮이도 결정된다고 할 만큼 중시되던 시합이다. 아직도 일본에서는 승단시합을 대수합(大手合)이라고 부른다.

가장 크게 생각했던 대회임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따라서 일본으로 건너간 첫해엔 오청원은 잡지나 신문바둑을 두었다. 지금으로 치면 이벤트 바둑이라고 보면 된다. 잡지사에서 주최하여 그 기보를 연재하기로 약속한 그런 임시 대회 말이다. 전적은 12승 7패 2무.

오청원(吳淸源) 제5화
일본무대 첫해부터 오청원의 재주와 끼는 빛을 발한다.
시사신보사에서 주최한 승발전에서 일곱 번째 선수로 참가한 오청원은 기다니 4단과 대국하게 된다. 기다니는 한국의 조남철 김인을 비롯하여 오다케 다케미야 고바야시 그리고 조치훈까지, 일본바둑의 영웅들 모두를 길러낸 일본바둑의 대모(代母). 그리고 훗날 오청원과 함께 바둑계의 폭풍을 몰고 온다.

그러나 이 기다니와의 만남은 수월치 않았다. 자존심 강한 오청원이 도저히 이길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던 것. 그러다 궁리해낸 것이 흉내바둑이다. 흉내바둑이란 무엇인가. 오청원은 흑을 들고 첫수를 천원에 갖다 놓는다. 바둑판의 정중앙 말이다. 그 다음은 바둑판이 천원을 중심으로 점대칭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상대가 두는 대로 저쪽 반대편에서 그대로 따라두는 것이다. 오청원이 이렇게 흉내바둑을 둔 것은 철저히 연구정신의 발로였다. 과연 이렇게 두면 백이 이길 수 있는가에 대한 회의부터 품었던 사람이다.

흉내바둑은 오청원의 탐구심과 승부기질이란 두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먼저 탐구심은 '이렇게 흉내바둑을 두면 그 끝은 어떻게 될까' 라는 식의 궁금증을 직접 실행한 뒤 확인하는 절차. 기질은 바로 기다니라는 거장에게 이길 도리가 없으니 이런 '변칙'으로 판을 좁혀간 다음 좁혀진 전장에서 싸우겠다는 심사이니 승부사다운 면모라 하겠다. 기다니와의 흉내바둑은 62수까지 이어졌고 그 이후 기다니의 완착을 등에 업고 앞서가는 바둑을 둘 수 있었다. 그러나 후반 들어 오청원 역시 실수를 범해 결국은 3집을 지게 된다. 대국이 끝났을 때는 전차도 끊어진 심야였고 기다니와 오청원은 기원에서 밤을 새며 바둑 이야기로 동트는 새벽을 맞이한다. 그때 기다니와 오청원은 맘을 터놓는 사이로 발전한다. 어쨌든 오청원이 일본에 건너온 지 2년이 넘도록 기다니에게는 흑을 들고도 좀체 이기질 못했다.

1930년 오청원은 건강이 회복되자 기다리고 기다리던 춘계 승단시합에 참가한다. 당시 3단의 신분이었으나 춘계승단대회에서 7승1패를 기록하고, 추계대회에서는 7전전승을 기록, 1위로 4단으로 승단한다. 당시 승단시합은 지금으로 치자면 타이틀전에 버금갈 진검승부였으니 오청원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쉽게 짐작할 자료가 된다. 1931년 승단대회에서는 춘계 6승2패, 추계 8전전승. 다시 1932년에는 춘계 8전전승, 추계 7승1패로 당당히 5단까지 다다른다. 오청원은 훗날 회고록에서 1928~1932년에 가장 열심히 공부한 해였을 것이라고 썼다. 어찌 타고난 재능이라고 해서 수삼년의 노력으로 오늘날의 영광의 궤적을 그릴 수 있으랴. 아마도 그 회고는 열심히 공부한 다음해인 1933년 운명처럼 신포석을 오청원이 창안한 해라는 것과 연관이 있을 듯싶다. 다만 그가 승승장구하던 그즈음엔 기력에 비해 저단인 상황. 따라서 그가 흑을 들고 둘 때가 많았다는 점도 관계가 있다. 오청원은 흑으로 공부할 땐 혼인보 수책(秀策), 백을 들었을 때 공부는 수영(秀榮)의 시합바둑을 공부했다고 한다.

그 즈음엔 아무래도 흑차례일 때가 많았으므로 견실한 수책류를 주체로 하여 흑번무적(黑番無敵)의 시절을 만들기도 한다. 특히 1932년 시사신보에서 주최한 승발전(이기면 계속 두는 연승방식)에서 무려 18연속승을 기록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어찌되었건 1928~1932년에 오청원은 무려 9할의 승률을 기록하고 있었다. 비교하자면, 한국의 이창호가 프로무대에서 가장 활발히 성적을 올릴 때도 9할은 이르지 못했다. 단 일년의 성적도 9할이 된 적은 없다. 그러나 오청원은 무려 6년간의 통산 성적이 9할이었으니 그 기재에 대해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오청원을 말하면서 빠질 수 없는 신포석은 1933년 싹을 보인다. 오청원과 기다니와의 10번기에서 뚜렷한 징후를 보이는데, 이 10번기는 오청원의 승부바둑 10번기와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

기다니와의 10번기에서 오청원은 흑차례일 때 당시로는 상상하기 힘든 4연성 포석을 선보인 바 있고, 기다니도 뚜렷하게 귀보다는 중앙의 세력을 중시하는 타법으로 달라지고 있었다. 달라지고 있다는 이 대목이 중요하다. 젊은 두 기사는 그런 혁신에 대해 공감하고 있었다. 기다니와 오청원의 신포석시대는 두 젊은 청춘기사의 개인의 시대를 넘어 바둑의 청춘시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신포석시대는 청춘의 창조와 모험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며 바둑계 자체를 선연하고 화려하게 재창조시킨 신풍이었다.

오청원(吳淸源) 제6화
당시 일본 바둑계 최고수였던 슈사이(秀哉) 명인의 환갑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된 특별대국에서 오청원은 자신이 창안한 신포석을 유감없이 구사했다. 오청원의 정선으로 시작된 대국에서 흑의 첫 수가 우상귀 '3三', 계속해서 좌하귀 화점, 그리고 세번째 착점이 천원으로 마치 바둑판을 대각선 방향으로 길게 연결하는 듯한 오청원의 신포석은 마치 '천마가 하늘을 나는 듯 호쾌했다'( 오청원, 기다니와 함께 신포석 이론을 창시한 바둑 평론가 야스나가 하지메의 표현).

이에 대해 슈사이는 기존의 포석법대로 얌전하게 두 귀의 소목을 차지했다. 이 바둑 기보가 신문에 보도되자 온 천하의 바둑인들은 야, 오청원이 천하의 슈사이 명인을 상대로 천원에 두었다며 찬반 양론으로 갈려 갑론을박을 펴는 등 난리법석이었다. 당시 바둑 열기는 요즘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뜨거웠다. 특히 종래의 케케묵은 형식에 얽매였던 바둑을 자유롭게 해방시킨 신포석법은 질풍노도와 같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특히 오청원의 인기는 대단했다. 어느 대중 잡지에서 실시한 예능인에 대한 인기투표에서 오청원이 문인 미술가 등을 제치고 당당히 1위를 차지했으며 일설에는 '기생조차 오청원을 짝사랑했다'고 하니 '바둑은 몰라도 오청원은 안다'는 식이었다. 하지만 슈사이 명인과의 대국은 오청원에게 그리 유쾌한 기억을 남기지는 못했다. 이 바둑은 1933년 10월16일에 시작되어 다음해 1월29일에 끝났다. 장장 3개월이 넘게 대국이 진행된 것이다.

물론 이 기간 동안 계속해서 바둑을 둔 것은 아니고 제한시간을 각자 24시간으로 하되 하루에 얼마 동안 바둑을 진행하다가 백 차례의 슈사이가 "오늘은 여기서 그만" 하면 대국을 중지하고 며칠 후에 다시 속개하곤 했다. 게다가 요즘처럼 두 대국자가 대국 장소에서 합숙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적당한 날을 받아서 대국을 계속하기 때문에 백 차례에서 중단한 슈사이로서는 좋은 수가 생각날 때까지 며칠이라도 연구할 수가 있는 셈이다.

물론 이것은 오청원에게 매우 불공평한 진행방식이었으나 당시 바둑계 최고 실력자였던 슈사이 측의 뜻대로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원칙이나 상식보다는 강자의 권위와 특권이 우선하기 마련인 것이다. 슈사이의 거듭된 대국중지 선언으로 인해 3개월 동안 무려 13차례나 대국 중단과 속개를 거듭했던 이 바둑은 패차 팽팽한 접전이 계속되다가 160수에 이르러 슈사이로부터 묘수가 등장해서 결국 오청원이 두집을 졌다.

후일 슈사이의 묘수는 휴식기간 중 본인방 문중의 제자들이 스승의 바둑을 놓고 공동 연구를 벌인 끝에 발견한 것이라는 소문이 공공연히 나돌아 물의를 빚기도 했다. 물론 이에 대해 본인방 문중에서는 "무슨 소리냐"며 펄쩍 뛰었지만 당시 슈사이와 오청원의 대국이 중단될 때마다 제자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공동 연구를 했던 것은 사실이고 보면 충분히 심증이 가는 얘기다.

당시 묘수를 발견한 장본이이라고 지목됐던 마에다 노부아키는 10여년이 지난 후 이 문제에 관해 질문을 받고 그 수를 내가 생각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생(슈사이)이 그것을 몰랐다고 하는 것은 불손이다. 당시 우리 젊은이들이 공동 연구를 하고 있으면 선생께서 가끔 예고없이 들어와 지켜 보곤 했지만 한번도 연구에 직접 참여하는 일은 없었다고 말했다. 표현은 매우 완곡하지만 당시 상황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당시 일본 바둑계에서는 오청원을 내심 동정하면서도 불공평한 대국 운영 방식을 공개적으로 지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부분의 바둑팬은 오직 '불패의 명인'과 '신포석의 창시자'가 맞붙었다는 외형적 사실에만 관심을 집중했을 뿐 슈사이의 불공평한 중단 연발에는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명인의 승부 집착이 최선의 수를 찾기 위해 전력투구하는 모습으로 비쳐져 감동의 물결을 일으킬 정도였다. 덕분에 주최사인 요미우리 신문은 판매부수가 엄청나게 늘어나는 등 흥행은 대성공이었다.

오청원(吳淸源) 불멸의 치수고치기 10번기
당시 일본 바둑계 최고수였던 슈사이.
치수고치지 10번기는 무예자의 진검승부와 같은 것이었다. 가혹했다.
진검승부란 한번 무너지면 가면을 빼앗긴 프로레슬러처럼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운명의 치수고치기에서 패하게 되면 대등했을 터인 상대방에게 뚜렷하게 한단의 격차가 생기고 맞수시합을 둘 수 없게 된다. 그간 쌓아온 명예는 상처가 나고 또다시 치수고치기를 하지 않는 한 바둑계의 일인자 자리는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실제로 재승부란 거의 불가능하므로 1회 한도의 필사적인 승부다.

특히 기계 일인자를 다투는 치수고치기 시합에서 승자는 대단한 명예를 얻는 반면 패자는 그것으로 기사생활를 마감하는 경우가 흔하다. 고래로 바둑계의 제1인자의 지위인 명인기소(名人碁所)를 정하는 대국은 단 한번만인 치수고치기로 10번기, 20번기를 행하는 일이 많았고 대국자는 목숨을 걸고 반상의 사투를 벌여야 했던 것이다. 이것은 과장이 아니다. 에도 시대에 있어 혼인보(本因方), 야스이(安井), 이노우에(井上), 햐야시(林) 등 4대 문파에서는 명인기소를 다투는 치수고치기 승수는 언제나 심각하고 피비린내나는 것이었다.

단차(段差)에 의한 치수라든지 치수고치기가 바둑계 관습에서 없어지게 된 것은 혼인보 슈사이가 은퇴하며 세습 명인제도가 폐지되고 그후 모든 타이틀전에서 따르도록 한 다음부터다. 400년의 바둑역사를 본다면 극히 최근의 일이다. 하지만 치수고치기 10번기는 본질적으로 종래의 치수고치기와 다를 바 없다. 기사생명을 건 살과 뼈를 깎는 매치였다. 특히 요미우리라는 단골간판으로서 10번기를 둔 10년은 글자 그대로 배수의 진이었다. 일본기원의 뒷받침이 없어 10번 승부에서 패한 중국인 오청원을 일본바둑팬들이 알아줄 리 만무했다.

좌우간 치수고치기 10번기는 진검승부의 두려움은 두어본 사람이 아니면 모를 것이다. 지금 기사들은 그런 것이 사라져 다행일 것이다. 현재 타이틀전은 한두번 져도 명예에 상처가 나지 않을 뿐 아니라 치수도 달라지지 않고 몇번씩이나 도전할 기회가 있다. 타이틀 수도 많고, 누가 강한지 뚜렷한 순위를 매기는 것도 없다. 오청원도 10번기를 즐겨 둔 것은 아니다. 1939년 카마쿠라 10번기를 효시로 1955년 다가카와까지 당대 최고수를 상대를 해서 실로 10회, 100국 가까이 치수고치기 십번기를 두었다. 이것을 가지고 '오청원의 치수고치기 10번기'라 부르고 있다.

사실 이 치수고치기 10번기 만큼 당시 처절한 맛이 있던 것은 없다. 뭐니뭐니 해도 "일본에서 제일 강한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므로 세상의 눈은 정상에 있는 두 사람에게 집중된다. 두 사람은 생활을 걸고 명예를 걸고 돈까지 건다. 보는 사람은 손에 땀이 차고 한점 한점에 껑충 뛰기도 하고 한숨을 쉬기도 한다. 이토록 스릴 있는 건 없다. 현재의 승부 형태로 정착되어 있는 7번 승부도 이 점에서는 10번기의 발바닥도 미치지 못한다.
그 처절함은 짐작하리라.

1. 기다니(木谷)와의 10번기
1939년 9월. 오청원의 최초의 치수고치기 10번기가 치러졌다.
제1국은 9월28일부터 3일간에 걸쳐 건장사의 승방에서 두어졌다. 돌을 쥐어 기다니의 흑차례다. 기다니 7단과의 10번기 오청원이 활약하던 나이는 아직 20대. 기다니도 갓 스물을 넘은 한창 나이로서 둘 다 신진기사. 특히 건장사에서 벌어진 제1국은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킨 대국으로서 1933년의 홍인보 슈사이 명인에게 신포석으로 대항한 한판은 오청원으로서는 잊을 수 없는 바둑이다.

기다니의 바둑은 혼인보 슈사이 명인의 은퇴바둑에서부터 신포석 세력을 중시한 위치높은 기풍에서부터 자리를 낮추어 착실히 집을 장만하는 기풍으로 달라지고 있었다. 차분히 집을 장만하고 상대방의 모양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기다니와의 바둑은 쳐들어온 돌을 둘러싸고 엎치락 뒤치락하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지곤 했다. 이 바둑도 흑은 낮게 귀를 차지하고 중반 가까이 흐르자 백의 모양에 쳐들어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흑이 튼튼히 집을 마련하는 동안 백은 발빠르게 모양을 이룩하여 첫날은 흑이 여간 뒤진 모양이 아니었다.

이틀째는 흑모양에 백이 쳐들어와 대접전이 되었고, 돌파전에 흑이 성공한 듯 했으나 국면은 흑에게 그다지 호전되지 않아 흑이 약간 고전이란 인상을 지우기가 어려웠다. 흑77수부터 3일째로 접어들어 엎치락 뒤치락 바둑은 한결 확대되어 쌍방이 무척 착수가 어려운 대목이 따랐다. 기다니는 한수마다 끙끙거리며 장고에 장고를 거듭했다.
기록을 살펴보아도 흑95수에 52분, 흑97에 65분, 흑101 에 55분. 기다니가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120수째 오청원이 두집 정도 벌려고 미끄러져 들어간 수가 실착이었다. 흑의 거센 반격에 부딪쳐 큰 패가 생겼다. 기다니와 오청원은 필사적이었다. 이때 관전기자인 미호리 마사우지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대국은 진검이다. 바둑두는 사람은 필사적이다.
치수를 건 10번 승부의 결전을 새겨넣을 이 일전은 마지막 날 밤늦게 귀기(鬼氣)가 사람에게 다가서고 처절함이 땅을 치는 한 장면을 전개하였다." 그것은 흑57이 두어진 직후 기다니 7단이 코피 낸 다음부터다. 이토록 가슴이 콱 막하는 반측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서둘러 열어제친 미닫이 유리문, 산에서 불어오는 밤의 냉기는 건장사의 선방 구석구석까지 얼어붙어가는 것이다. 그 복도에서 이제 제한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기다니 7단이 데굴데굴 몸부림치고 있다. 머리를 수건으로 식혀가면서 "저편에서 생각하는 동안 나도 생각하고 싶은데."라고 외치는 것이다. 한때는 억지로 바둑판을 안았으나 "안돼"라고 비틀거리며 다시 나둥그러지는 것이다.

사실은 이 관전기자가 쓴 관전기 때문에 오청원은 시달림을 받게 된다.
기다니가 쓰러진 것이 코피 때문이라고 생각지 못했다. 줄곧 미세한 바둑이었던데다가 흑이 줄곧 고전이었던 것이 자신의 실착으로 국면이 호전되어 한숨을 쉬던 중 "휴우"하고 긴장이 풀리다보니 그만 빈혈을 일으킨 것이라 생각했다. 기다니는 대국중 피로가 쌓이면 가끔 빈혈증세를 보였다. 하시모토와의 대국에선 빈혈을 일으켜 30분간 휴식을 취하고 바둑을 둔 일이 있다. 하시모토의 말에 의하면 그 바둑은 큰 끝내기로 접어들고 있었는데 기다니는 30분 휴식중 누워있으면서 머리 속으로 바둑판을 그려 자기의 한집승을 읽어내었다는 것이었다.

사실상 오청원은 기다니에게 마음을 쓸 계제가 아니었다.
반면에 있는 한 대국자는 어떤 상태로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많다. 실제로는 긴 의자에 누어있을텐데 '데굴데굴 구른다'는 표현은 과장된 것이다. 독자에게는 마치 괴로워 몸부림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이다. 휴식 후 큰 끝내기에 들어가 184수째 다시 오청원의 실착이 나와 마침내 흑 우세로 되고, 이대로 두어가면 흑이 2-3집 앞서는 형국이 되었다. 그런데 그 목전인 193수에 이르러 기다니는 실착을 범해 오청원이 승기를 잡고 패를 건 끝에 역전시켰다. 백의 2집승이었다. 오청원의 100국 가까운 치수고치기 10번기 중 이와 같은 격전으로 치른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10번기의 처음이기도 하려니와 오청원의 일생 중 본인방 혼인보 슈사이와의 은퇴기념 대국과 함께 가장 절실한 한판이었다.

그런데 1939년이라고 하면 중일전쟁이 확대일로를 거듭 하고 일본에서는 국수주의가 사회를 뒤덮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시류 속에 앞에 나온 관전기사가 신문에 실렸을 때 독자의 반응은 대단하였다. 기다니가 코피를 내고 괴로워하는데 모른 체 하면서 계속 두어나가는 것은 무자비한 일이다. 왜 곧장 휴식을 취하도록 해주지 않았는가. 무사의 인정을 모르는 냉혹비도(冷酷非道)한 승부의 마귀라고 하는 비난의 소리가 쇄도하였다. 당연하겠지만 동료기사 중에 오청원이 예에 어긋났다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기다니가 독자의 그런 관심을 귀찮게 생각했다.

협박장이 날아들었다.
오청원은 야스나가와 상담하니, 야스나가는 "오선생이 10번기를 이기면 목숨을 잃을 위험이 있다"고만 답했다. 세고에 선생은 10번기를 중지시켜야 할 것인가 크게 고민했으나 "바둑꾼은 비록 반상에서 묵숨을 앗겨도 행복한 일이니 당당히 두어가시게"라면서 격려해주었다. 1940년 4월. 원각사의 제1국 외에도 여러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4국은 2승1패의 뒤를 이어 이 십번기의 결과를 좌우하는 일국이었다. 오청원의 흑번이었으나 백인 기다니가 과수를 추궁해 와 끝내기에 들어설 무렵, 필쟁점인 역 끝내기를 두어 거꾸로 한집을 남길 수 있었다. 사실 이때 오청원이 졌다면 2승2패. 그러면 십번기의 상황도 달라지고 오청원의 십번기가 이렇게 100국 가까이나 두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치수고치기가 걸린 6국이었다.
1939년 10월 원각사내의 자그마한 암자였다. 6국을 앞두고 오청원은 구레 이즈미라는 일본 이름을 다시 오청원으로 돌렸다. 바둑팬의 열망 탓이었다. 호적은 그대로 두고서 '오청원'이라고 이름만 다시 바꾼 것이다. 5국에서 패하자 기다니는 오랜동안 길렀던 장발을 싹둑 잘라 중머리가 되었다. 막판에 몰린 6국부터 분위기를 일신하자는 뜻이었다. 오청원은 본래 까까머리였으므로 둘이서 승방에서 대국하면 선승(禪僧)일 것이라고 동요기사들은 웃기도 했다. 오청원이 6국을 이겨 5승1패. 드디어 기다니를 선상선으로 치수를 바꿔놓고 말았다.

치수는 바꿔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4승차, 예를 들면 4전전승이나 7승3패가 되어 치수를 바꾸기로 한 약속이 그대로 실현되자 호선만을 두던 상대는 이상한 것이다. 그리고 혹자는 그것은 아직 승부가 아니라는 반론을 폈다. 이름하여 '신예 10번기'라고 명명한 것이다. 기다니를 신예로 보아 그들의 뭉개진 자존심을 만회해보려는 소치였다.
지금까지의 대국 결과는 다음과 같다.

<오청원 기다니 10번기 결과>오청원을 중심으로

1국(1939년 9월28일~30일) 백2집승
2국(1939년 12월26일~28일) 흑불계승
3국(1940년 3월15일~4월9일) 흑5집승
4국(1940년 6월12일~6월14일) 흑1집승
5국(1940년 8월4일~8월6일) 백불계승
6국(1940년 10월16일~10월18일) 흑불계승

2. 가리가네(雁金)와의 10번기
1941년 6월, 두번째 치수고치기 10번기가 성사되었다.
기다니와의 가마쿠라 10번기가 종료되자 요미우리 신문사는 다음 치수고치기 10번기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그 결과 오청원을 상대로 하려면 현재엔 재야에 있지만 슈사이 명인 이후 바둑계의 최장로인 기정사 총수, 가리가네 준이찌(雁金準一) 8단을 제외하면 따로 없을 것이란 결론이 나왔다. 당시 일본기원에는 8단이 따로 없었으므로 원래 같으면 가리가네 선생과는 호선으로 둘 수가 없는 상태지만, 가리가네 선생이 오청원과 호선으로 한번 두고 싶다고 한 바 있어 요미우리 신문사가 나섰다.

오청원을 일본기원의 대표로 가리가네 8단을 기정사의 대표 자격으로 10번기를 실현시켰다.
물론 호선이었다. 요미우리신문은 일찍이 혼인보 슈사이와 명인자리를 다투다가 재야에 숨은 가리가네 8단을 재등장시켜 가리가네 8단이 승리하면 바둑계의 장로로 후대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가리가네가 슈사이 명인과 결별하고 결성한 기정사는 일본기원과 원래 사이가 나쁘고, 특히 단위가 비비꼬여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기원에서 기정사와의 치수고치기 10번기를 허락해줄 리 만무했다.

가리가네는 오청원과의 10번기를 위해 기정사를 떠나 경운사를 결성하였다.
그런데 가리가네의 인덕을 따르던 기사들은 모두 경운사에 참가하는 바람에 기정사를 모두 경운사로 옮겨놓은 형태가 되었다. 가리가네 8단이 기정사를 떠나 일본기원으로서도 그 이상 그와의 대국을 거부할 이유도 없어졌다. 오청원과 가리가네의 치수고치기 10번기는 이렇게 성립됐다. 제한시간은 가리가네가 장시간을 요구하고 오청원은 단시간을 희망했다. 요미우리 신문사의 조정 끝에 제한시간은 16시간으로 결정되었다. 대국장은 '요미우리 바다의 도장'.

이 치수고치기에는 일본기원의 명예가 걸려있었다.
오청원이 진다면? 일본기원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리가네는 일본기원 소속이 아니었으므로 그 때까지 일본기원엔 그와 대국한 일도, 그의 기보를 연구한 일도 없었다. 오청원은 오직 한번 4단 시절 요미우리 선발전에서 그와 만나 흑을 잡고 2집을 이긴 일이 있다. 1941년 8월. 3일간의 제1국은 가리가네의 흑번이었으나 오랫동안 공식시합에서 떨어져 있던 탓인지 가리가네는 실력 발휘를 못하고 불계패했다.

제2국은 10월에 열렸다. 오청원의 백번이었다.
이 바둑에서 오청원은 가리가네의 힘을 실컷 맛보았다. 끈적끈적한 힘의 무시무시함은 다른 기사와의 시합에서는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것이었다. 첫째날 엎치락뒤치락 결투가 벌어져 육탄전이라고 해야 할 싸움은 사흘째 계속되었다.

오청원은 중반부터 악전고투했다.
오청원은 가리가네의 맹공을 견디며 백이 약간 우세하다는 평가속에 3일째를 맞았다. 3일째 밤은 둘 다 악전고투였는데, 특히 가리가네는 고령이어서 관전하던 사람들의 말로는 어깨 숨을 쉴 정도라고 했다. 흑이 약간 고전했으나 승패불명인 채 계속 되더니 끝내 기력의 한계에 이르렀음인지 208수만에 오청원의 6집반승으로 끝났다. 이 바둑이 만일 가리가네의 실착이 없었더면 후세에 남을 명국으로 기록될 만 하다. 10번기는 계속된다.

제3국은 12월27일 열렸다.
흑의 가리가네는 백의 큰 모양에 쳐들어와 오청원을 짓밟고 오청원은 수습에 명수다운 솜씨를 발휘했으나 끝내 4집을 지고 만다.

운명의 4국이 찾아온다.

제4국은 1942년 2월25일부터 27일까지 두어졌다.
이 대국 직전인 2월7일에 오청원은 결혼식을 올렸다. 부인은 나카하라 가즈꼬 였다. 결혼 후 지금까지 회로하고 있는 오청원 부부는 8세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국제결혼이라는 낯선 상황을 잘 극복했다. 오청원에게는 이 대국이 결혼 후 첫 시합이었다. 오청원은 흑차례였으므로 이 바둑을 이기면 아주 우위에 서게 되지만 지면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시합이었다. 큰 자리를 선점한 오청원은 3일째 오후에는 우세를 굳혀 3집을 남겼다. 제4국을 이김으로 해서 3승1패로 앞서나갔다.

제5국은 5월2일부터 시작되었는데, 오청원이 중국대륙에서 돌아온 것은 대국 3일전이었다.
오청원은 피로가 가시지 않은 채 대국에 임했으며 3일간의 격전을 이겨낼 수 있을 지가 근심거리였다. 그러나 걱정과 달리 5국은 오청원으로 쉽게 기울었다. 다섯판 중 가장 회심의 작품이었다. 오청원은 백을 잡고 완승을 거두었다. 이 무렵 오청원은 신앙에 열중하고 있었다. 시합보다도 오히려 신앙을 더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1938년 요양소에서 퇴원한 이래 병후임에도 불구하고 시합이다, 종교다 하면서 뻔질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병이 재발하지 않은 것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다.

가리가네 8단과의 치수고치기 10번기는 4승1패가 되었다.
만일 6국을 오청원이 이기면 치수를 고치게 되었으나 관계자가 가리가네 선생의 몸과 마음을 염려해서 6국 이후는 중지하였다. 치수고치기의 백미는 무엇보다도 치수가 고쳐지는 것이다. 그러나 잘 된 일이었다. 이미 5승1패만해도 사람들은 오청원이 이긴 것이라 믿고 있을 것이고 굳이 치수를 바꾸지 않더라도 가리가네 8단이 호선으로 대국을 해준 것 만 해도 고마운 일이었다. 5국까지의 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제1국(1941년 8월5일~7일. 요미우리 바다의 도장) 백불계승
제2국(1941년 10월1일~3일. 요미우리 바다의 도장) 흑6집승
제3국(1941년 12월27일~29일. 요미우리 바다의 도장) 백4집패
제4국(1942년 2월25일~27일. 요미우리 바다의 도장) 흑3집승
재5국(1942년 5월2일~4일. 요미우리 바다의 도장) 백불계승

가리가네 8단과 치수고치기가 끝난 후 1943년 가을 오청원은 기다니와 더불어 8단으로 승단하였다. 오청원의 치수고치기 상대를 물색하고 있었는데, 8단진 중에서는 더 이상 적당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 파죽지세로 승단하고 있는 호사이 쿠라노스케 6단이 뽑히게 되었다. 호사이 6단은 우리가 알고있는 괴물 호사이 슈코와는 다른 인물이다. 흉내내기의 명수가 되는 호사이는 일본기원 최초의 9단이 된다. 호사이 6단은 당시 흑번필승의 신화를 창조하는 기대주였는데 당시 오청원도 정기 승단대회에서 2번을 싸워 한번도 이기지 못한 강자였다. 치수고치기는 호사이가 6단 그리고 오청원이 8단이어서 2단차가 나서 문제가 되었다.

호사이와는 정선의 치수였다.
오청원도 호사이에게 백을 들고 이긴다는 건 아주 힘든 일이라 썩 두고싶은 마음이 없었다. 호사이도 7단 승단을 목전에 두고 있었던 관계로 7단이 된 다음 선상선으로 두고싶다고 말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결국 관계자를 설득하지 못하고 선으로 두게 되었다. 당시는 일본의 전황이 불리해 신문의 바둑란도 크게 축소되었다. 여간 인기가 아니고선 신문에 실리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두 승리자의 대결은 몹시 흥미를 끌었다. 두 승리자란 오청원과 비슷한 번기에서 호사이도 완승을 거두고 있었다는 얘기.

3. 호사이(朋齊)와의 10번기
세 번째 치수고치기 10번기.
호사이 6단은 정선이며 도중에 7단으로 승단하더라도 오청원이 격파되지 않으면 10번기가 끝날 때까지 정선인 채 계속둔다. 물론 오청원이 격파되면 선상선으로 계속 이어간다는 규정이었다. 호사이는 곧 7단으로 승단할 것이 확실하며, 그렇게 된다하더라도 본래 선상선 치수이므로 오청원은 맘이 편했다. 일종의 '져도 본전'이라는 생각이었으니 호사이로서는 왜 그렇게 불리한 규정을 만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아마도 맘속으로는 전혀 지고 싶은 생각이 없었거나 10번기이기 때문에 4승 차이는 두 번의 치수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게 생각했다면 밑지는 장사도 할 수 있을 것이다. 25세 청년의 입장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발상이다.

호사이 6단은 당시 30세인 오청원보다 젊은 25세의 청년기사로서 일본기원에서는 가장 촉망받는 준재급. 실제로 그는 5년 후 1949년에 일본기원 최초의 9단이 된다. 대국조건은 10시간으로 하고 한판에 이틀을 배정한 것도 그 동안의 규정과 다른 것이었다. 1942년 12월17일 지바의 여관 '환취'에서 벌어졌다. 태평양 전쟁의 말기인지라 소등을 하고 바둑을 두어야 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흑번무적(黑番無敵)을 자랑하는 호사이를 상대로 오청원은 약속대로 모두 백을 들고 싸우게 되었다.

제1국은 오청원이 흑의 철벽을 허물 수는 없었지만 제2국은 비로소 흑벽을 돌파하였다. 제3국은 흑의 승리, 4국은 백번 승리. 이런 식으로 승부는 호각이었다. 호사이는 자존심이 상당히 상했다. 맘 같아서는 당장 호선으로 두어도 만만치 않다고 생각할 오청원에게 선상선 다음 치수인 정선으로 두어서 2승2패의 호각이라니, 더욱이 4국의 마치고 호사이는 7단으로 승단했다.

호사이의 의도대로라면 지금쯤 선상선으로 바뀌어야 할 승부가 최소한 3승1패는 달리고 있어야 할 터인데, 2승2패라니 7단의 명패가 아까울 따름이다. 제5국은 오청원의 승리로 돌아갔다. 단위가 7단이면 선상선이지만 정선으로 두기 시작한 것은 '좋다'고 해두자. 6국은 호사이 7국은 오청원의 승리. 이제는 오청원이 먼저 이기고 호사이는 뒤따르기 시작한다. 치수고치기가 4승3패로 호각인 가운데 오청원은 한발 앞서간 것이다.
제7국이 끝난 뒤 오청원과 호사이는 징집영장을 받고 곧바로 귀향 조치를 받으면서 둘 사이도 바빠진다. 호사이는 제8국부터 10국까지 3연패를 당하고 치수고치기 10번기는 4승6패로 마감한다. 호사이를 상대한 치수고치기 10번기는 예상을 뒤엎은 결과이며 무승부에 가까운 성적을 남긴 것은 건투였다고 할 만하다. 호사이는 다시 전후 2회에 걸쳐 10번기를 다투게 되나 처음 10번기에서와 같이 오청원은 만만찮은 저력을 보였다.

세 번째 치수고치기가 끝나자 돌연변수가 나타났다.
바로 오청원이 종교에 귀의한 것. 그의 인생행로 중에 이해하기 힘든 대목인데, 이른바 '세광교'와 행동을 같이 하기로 맘을 먹은 다음부터는 오청원은 다시 바둑으로 컴백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치수고치기가 세 번째로 끝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물론 그 사이 치수고치기 제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오청원은 세광교의 명령에 따를 뿐 이었다. 패전 직후 내일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 사람들은 하루의 양식을 얻기 위해 만원 전차에 흔들리며 죽기 살기로 물건 구입에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중국서 건너온 오청원의 혼란스런 입장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죽음의 공포, 뭐 그런 것 말이다.

오청원은 종교에 빠져 들었다. 이른바 세광교였다.
한마디로 특이한 종교인데, 일본의 종전 직후 불안한 세상을 틈타 구원의 손길을 뻗친 종교는 참으로 많았다. 중국인이라 종전 말미엔 심적 갈등도 심했다. 오청원은 태평양전쟁 말기엔 호사이 7단과 10번기를 마치고 기계를 은퇴한다. 약 2년이 지나도록 이체 바둑으 두지 않았는데 은퇴하고 할 것은 없고 굳이 말하자면 대국을 하지 않았다고 하겠다.
1946년 8월, 세광교에 요미우리 신문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하시모토 8단과 치수고치기로 화려하게 복귀하도록 종요하기 위함이다. 오청원은 당시 세광교과 행동을 같이 하고난 다음부터 바둑돌을 다시 잡게 될 까닭은 없다는 생각을 했고 신앙생활에 열중이었으므로 상당히 낯설었다.

2년동안 일본 기원 건물은 공습으로 다 타버렸고 세상사람도 기계의 향방에 관심을 둘 리 만무했다. 그러다가 전쟁이 끝다고 2년째로 접어들자 차차 관심이 부활하게 되고 '오청원은 왜 바둑을 두지 않았는가'가 세인의 의문이 되었다. 그러던 중 1946년 8월 심기일전한 오청원은 다시 바둑돌을 만지고 싶은 맘이 생기자 신문사가 기사를 선택하면 두겠다는 뜻을 요미우리 신문사에 전달한다. 오청원의 생각은 '전쟁이 끝났으므로 장래 중국으로 돌아가서 중국기사를 통합하고 바둑을 통하여 중국 일본 두 민족의 평화에 이바지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4. 하시모도(橋本)와의 10번기
오청원 재기하다.
기계(棋界)와 신문사는 만천하의 팬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요미우리는 일본 기원과 상의하여 하시모토 우타로 8단을 내세우기로 한다. 하시모토 우타로는 제2기 본인방이 되었고 그해 봄 승단시합에서 전승을 거두고 절정의 기량을 뽐내고 있었다. 세광교의 명령으로 오청원은 바둑돌을 잡게 된다. 제한시간은 비상시니까 6시간으로 하자고 오청원이 제안했고 하시모토 8단도 흔쾌히 허락했다. 그러나 요미우리 신문사가 "6시간이면 너무 싱겁다"고 하여 각자 7시간으로 낙착되었고 하루에 종결하자는 입장을 전달했다. 당시의 대국료는 각자 1만엔이었으며 오청원의 대국료는 세광교의 자금이 되었다.

제1국. 시합 전날부터 세광교는 자기 일처럼 힘을 쓰고 오청원이 이기게 해달라고 신자 전원이 기도를 계속했으나 2년간의 공백은 너무 길었던지 흑차례임에도 불구하고 질질 끌려다니다가 패하고 말았다. 2국은 1국이 끝난 후 3일째 두어졌다. 세광교은 제1국 때보다 더 극성스럽게 오청원을 위해 기도했다. 대국 전날 세광교은 바둑에 이길 법력을 오청원의 몸에 넣어준다고 하면서 오청원과 같은 방에서 자게하였다. 신의 이웃에 누원 오청원은 실례되는 일이 일어나면 큰일이라고 돌아눕지도 못하고 한잠도 잘 수 없었다.
1국 이상으로 산뜻하지 못하여 둘 곳에 돌이 가지 않아 종반이 되자 절반쯤 죽어가는 백돌이 여기저기 산재한 상태여서 누가 봐도 오청원의 패국이 확실하였다. 그래도 "나는 져서는 안된다"는 일념으로 계속 두어갔다. 중반을 지날 무렵부터 절대 우세한 하시모토 8단의 착수가 조금씩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기서 다 죽어가던 돌들이 살아나고 국면은 차츰 미세해지다 드디어 승패불명이 되었다. 그 바둑을 해설한 세고에 선생은 "하시모토는 아주 이상하다. 이런 바둑을 지다니 파문감"이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중반까지 승리는 확정되어 있었다.
그러던 것이 중반이 지난 무렵부터 무언가 기분이 들떠서 집중력이 없어졌다.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밖에 생각이 안난다. 하시모토는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흑의 갑작스런 변조가 너무나 불가사이함으로 하시모토가 둘 차례가 되면 북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와서 사고(思考)를 방해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또 천장에서 거미가 내려와서 하시모토의 눈 앞에 드리워진 것을 보았다는 설(說)까지 파다하게 퍼져갔다. 오청원은 대국 당시 그런 일에 열중해본 적이 없으나 낭설 그 자체였다.
그러나 승부란 인간의 이성으로서 파악하지 못할 부분이 있어서 오청원은 지지 않으려는 집념과 세광교 사람들의 기도로 말미암아 하시모토의 착수를 그르치게 했다는 것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다 못해 왔다갔다 하는 모양도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대국에 영향을 주니까 하시모토는 유망한 청년이었으나 2국을 패한 다음 좀처럼 이겨보질 못한다. 그러니까 바둑계에 오청원이 복귀한 첫날 그를 보기좋게 꺾었으나 그 이후 내리 4연패를 하여 역시 오청원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제3국. 오청원은 흑 차례였고 오청원은 겨우 컨디션을 되찾아 쾌승하였다.
그런데 오청원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세광교가 갑자기 십번기에 관심을 잃어버리던 것이다. 오청원에게 기운을 불러일으킨다고 동침을 허락한 그 세광교가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10번기에 관심을 잃어버렸다. 생각만큼 선전효과가 오르지 않았던 탓일까. 오청원의 승리를 위해 기도하는 일도 없어졌고 10번기의 대국일정도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오청원에게는 어쩌면 잘 된 일이었다. 새우관(세광교과 이념을 같이 하는 이들이 모인 서클)에서 출발하고 대국중에도 속인과 사귀면 안된다고 가르치고 있었다.
점심시간에도 자기 방에 틀어박혀 누구와 잡담을 하는 일이 없었고 대국이 끝나면 곧장 새우관으로 들어갔다. 그렇기 때문에 바둑계의 동향이나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해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편한 일이었다. 바둑계에서는 세광교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는 것을 근심하여 빨리 세광교으로부터 손을 떼어놓아보려고 했다. 오청원이 피하고 있으나 말을 해도 소용없다고 보았음인지 오청원을 설득하는 사람도 없었다.

오청원이 세광교에게서 떨어지게 하는 방법은 지게 하는 방법밖에 없으나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꾸 져서 인기가 떨어지면 필연적으로 세광교을 떠나게 되리라는 뜻일 것이다. 제4국은 오청원의 백 차례로 오랜만에 대각선상에 두 개나 3三을 두어 중앙에 힘겨루기가 잇다른 바둑이 되었으나 백이 리드를 잡아 오청원이 6집승을 거두었다. 5국은 하시모토의 몸 상태가 안 좋은 가운데 생기가 없이 대국에 임했으나 131수만에 돌을 거두고 말아 1패 후에 4연승을 하여 치수가 고쳐지기 일보직전이었다.
6국은 하시모토의 몸 상태가 회복되기를 기다려 당분간 연기하기로 결정이 났다. 그러나 실제로 오청원이 세광교의 사정으로 대국일정을 확정할 수 없어 반년 가까이 후에 벌어진다. 오청원의 백 차례. 오랜만에 만져보는 바둑돌의 감촉이었다. 눈이 빙빙 도는 하루를 보내고 있으나 바둑판에 앉으면 신기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욕심도 불안도 없이 승부에 몰입할 수 있었다. 하시모토는 기력이 회복되었는지 대열전을 전개했고 오청원은 근소한 차이로 흑을 따라잡지 못하고 2집패를 거둔다. 6개월간의 공백은 이렇게 오청원을 감각을 잃게 만든다. 제7국은 계속해서 같은 장소에서 치러졌다. 백의 하시모토는 중앙에 두터움을 쌓았으나 흑도 이럭저럭 흑세를 짓밟는 바둑이 되었고 중앙삭감을 성실히 수행한 흑의 불계승이었다.

다시 승패는 5승2패

치수 고쳐지기 바로 직전이었다.
제8국은 7국이 있은 지 2개월이 지나서 벌어진다. 운명의 한판이었다.
하시모토가 지면 영락없이 치수가 바뀌는 그런 중차대한 시합이었다. 백차례인 오청원은 중반까지 고전중이었다. 그러나 오청원은 사실상 진 바둑에서 막무가내로 백돌을 끌어내 움직이는 최후의 승부수를 택했다. 의외로 흑이 대응을 잘못하는 바람에 역전 불계승을 거뒀다. 6승2패. 약속대로 치수가 고쳐지고 말았다. 선상선-. 치수고치기 10번기는 치수가 고쳐져도 고쳐진 대로 계속 두는 것이 처음의 약속이었다. 김이 빠질 대로 빠진 하시모토는 이겨도 그만인 시합이었다.
선상선(두 번은 정선으로 한번은 호선으로 두는 치수)으로 두었으나 제9국은 빅, 10국은 하시모토의 불계승이었다. 그러나 치수가 고쳐진 다음 에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대 하시모토 8단 제1차 치수고치기 10번기 결과

제1국 1946년 8월26일/동경 흑5집패
제2국 1946년 8월29일/동경 백1집승
제3국 1946년 9월/지바겐노다 흑불계승
제4국 1946년 9월/경도 백불계승
제5국 1946년 9월/경도 흑불계승
제6국 1947년 7월/고베 백2집패
제7국 1947년 7월/고베 흑불계승
제8국 1947년 10월3일/도쿄 백불계승
제9국 1947년 12월/지바겐노다 백번빅
제10국 1948년 1월/시즈오카겐 흑불계승

하시모토 8단과의 10번기가 끝나자 당시 신진기사로 이름을 날리던 사카다 에이오(坂田榮男) 7단과의 3번기가 기획되었다. 사카다 7단은 그때 면도날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을 정도로 날카로운 기풍에다 공격도 좋고 수습도 잘해 공수 밸런스를 유지하고 있었다. 훗날 일본 바둑계 영원불멸의 대기록인 통산 최다타이틀 66회 획득을 자랑하는 시카다 에이오. 지금껏 깨어지지 않는 그 기록은 타이틀전이 드물었던 시절이라 그 가치는 더욱 빛나는 것이다. 당시엔 치수고치기 10번기 외의 3번기, 6번기가 많이 치러지고 있었다. 암울한 일본의 시대였으므로 보다 일본 팬들을 자극할 수 있는 라이벌전을 자주 펼친 셈인데, 지금으로 치면 조훈현 서봉수 간의 라이벌전이라든가, 이창호 조훈현간의 사제대결을 자주 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일본팬들은 오청원에 열광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어느 누군가가 그를 꺾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을 것이다. 사카다 7단과 겨룬 3번기는 그가 아직은 오청원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선상선으로 시작된 3번기는 3:0으로 시원스럽게 끝을 맺는다. 3:0으로 전적으로 따지다 보면 그것이 완승이라고 할지라도 1, 3국은 오청원이 백을 들고 간신히 1집을 이긴 바둑이니 아슬아슬했다. 그 때 오청원도 소장기사의 기세를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훗날 사카다는 정식으로 오청원에게 10번기로 도전을 해온다.
다음 상대는 이와모토 가오루(岩本薰) 8단.

5. 이와모토(岩本)와의 10번기
이와모토는 하시모토 8단이 2대 본인방이 되고 난후 도전자 자격을 따내 종전 직전의 히로시마에서 원폭대국을 포함해 도전기를 거듭하고 있었는데 1945년 11월에야 3승3패의 무승부로 끝이 났다.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최종 3차례 승부를 벌였고 이와모토 8단은 2연승을 거둬 3대 본인방에 취임했다. 이와모토와의 10번기는 제한시간으로 난항을 겪었다. 오청원은 하시모토 8단과의 선례를 들어 7시간 하루 마감을 주장했으나 이와모토는 13시간 3일제를 주장했다. 결국 본인방의 주장대로 결정났다. 제한시간을 길게 가져가려는 사람은 필시 기력에 흠집이 나 있게 마련이다.

이와모토 본인방의 기풍은 '콩 뿌리기 바둑'이라 하여 담담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담담한 것은 인품이지, 그의 바둑은 끈질기고 매섭고 패가 장기인 사람이다. 오청원도 패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니므로 이 십번기는 어느 대국을 보더라도 반드시 패싸움이 시작되고 있다. 특히 제1국은 중반이후 끝까지 패싸움을 하고 있으며 중국을 하고서도 문제가 남겨진 채 당시는 '백1집반 내지 2집승'이라는 기묘한 결과를 낳았다. 백을 든 오청원이 바둑에서 이겼지만 그 차이가 극히 작아 패싸움을 피차 양보할 수는 없었다. 마지막 순간, 가일수를 하게 되면 1집승이고 가일수를 하지 않으면 2집승이었으니 늘 이 문제로 시끄러웠다.

당시 일본기원에는 뚜렷한 바둑 룰에 관한 규약이 없었으므로 실로 난감했다. "어느 편이든 패감이 많을 경우 마지막 패는 가일수하지 않고 중국 한다"는 잠정 규정이 있다는 것이 알려져 나중에 백1집승으로 정정되었다. 제2국은 7월21일 온천에서 벌어졌는데 흑차례의 오청원은 불계승을 거두었다. 제3국은 흑차례인 본인방이 본래의 실력을 발휘해서 흑의 3집반승을 거두었다. 제4국은 흑차례인 오청원이 승리, 판세는 3승1패가 되었다. 바둑에서 흑을 들면 아무래도 유리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제1국에서 백으로 1집을 이긴 것이 판 자체를 오청원 쪽으로 기울어 버렸다.
마치 테니스에서 상대가 서브게임을 잃은 것처럼.

제5국은 10월, 본인방의 흑차례였는데 중반 거의 흑승으로 되어있는 바둑을 그가 실수를 하는 통에 오청원의 역전승이었다. 이런 바둑은 되돌리기가 뭣하다. 사력을 다해도 이길까 말까 한 바둑을 다 이겨있는 것을 이기지 못한다면 치수가 고쳐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제6국은 또 오청원의 흑차례여서, 그가 이겨 5승1패가 되었다. 치수를 고친다. 선상선이 된 것이다.
제6국이 끝난 후 종교공동체인 세광교 측에서는 오청원의 아내를 악인으로 지목하고 있었다.

세광교도 예전만큼 새우에 열중하지 못하게 된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 무렵 세광교은 오청원과 아내를 일부러 떼어놓고 만나지 못하도록 하고 그 대신 아내의 후배를 접근시키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세광교가 법정에 오청원의 아내를 세우려는 낌새를 알아차린 오청원은 처음으로 세광교의 의향에 정면으로 반발하는 의사를 드러냈다. 그것이 종교와의 인연을 끊는 선언일 줄은 아무도 몰랐다. 종교와 결별하는 데는 오래 가지 않았다. 4년간의 세광교과의 경험을 돌이켜보면 추호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한다. 그때까지 오청원의 바둑은 순조로웠기 때문에 아무도 진정으로 오청원을 꾸짖으려 하지 않았다. 오청원을 지나(支那)인으로 경멸하고 꾸짖은 것은 세광교가 처음이다.

결국 그 복고적인 국수사상은 따라갈 수는 없으나
세광교에서의 4년간은 순수한 신자로서, 또 인간으로서 오청원이 고락을 같이 할 수 있었음은 귀중한 경험이었다. 그 생활을 통하여 스스로의 자만심을 반성케 하는 일도 많았고 자기를 깊이 알 수 있었음을 오청원은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제7국은 본인방이 중반을 지나기까지 흑차례의 우위를 지키고 있었으나 끝내기에서 실수를 하여 빅으로 끝나고 말았다.
재8국. 초반은 고전하였으나 중반에 힘을 내어 백차례로 3집반승을 거두었다.
제9국. 오청원의 흑차례로 이틀째 결판이 나서 흑불계승이었다.
이로써 상대전적은 7승1무 1패였다.
마지막 10국. 오청원은 그리 이겨야 할 까닭이 없어 그냥 패하고 말아 7승2무 1패로 끝났다.
중국의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쫓겨갔으나 중국을 대표하는 합법정부로서 대만이 일본과 국교를 트자 무국적 상태이던 오청원은 여권을 신청하였다. 1949년 가을 오청원은 국민당 정부의 중국인으로 국적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잃은 것도 있어 오청원으로서 마냥 즐거운 일만 생긴 게 아니었다. 오청원은 일본에 온 이래로 쭉 일본기원 소속기사로 활약했는데 전후 일본기원을 떠나 요미우리 신문의 유일한 간판으로서 무소속 기사 생활을 하게 되었다.

현재 일본기원 연감에 오청원은 500여 소속기사 가운데는 찾아볼 수 없고 맨 끄트머리에 있는 명예 객원기사에 실려있을 뿐이다. 오청원은 그 과정에 대해 아직도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다. 자신이 일본기원의 단위를 획득하는 등 화려한 신고식을 치렀고, 탈퇴한 적도 없으며, 탈퇴 의사를 표시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하태평으로 살았던 오청원은 일본 기원의 제적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20년이 지난 1966년에야 제적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몸이 약했던 오청원은 요미우리 신문사의 10번기 외에는 그다지 대국도 하지 않았고 일본기원과의 관계를 깊이 생각한 적도 없었다. 기원 소속이든 아니든 원하는 바둑을 계속 둘 수 있으니까 문제는 없지만 오청원은 자신이 왜 제적되었는지 궁금했다. 알고 보니 전후에 시합의무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오청원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일본기원에서 그를 제적시키려면 당사자에게 한번쯤은 연락이라도 취해야 하지 않을까. 문제는 알리고 싶지 않을 만큼 조용히 '짜르고' 싶었던 것일까. 1947년 세고에 선생이 일본기원 이사장으로 있을 때 직접 사표를 갖고 온 것으로 알려졌는데 오청원이 스승에게 확인한 결과 "여러가지 압력으로 부득이 했다. 다음해엔 이사장직도 그만두게 되었다"면서 그 이상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1947년이라면 그가 세광교에 신명을 다 바치면서 하시모토와의 10번기를 계속했을 때이고 세상 움직임에 대해서는 무지한 때였다.
당시 패전의 혼란 속에서 무슨 일이 생겨도 이상할 것이 없는 시대였다. 오청원 같은 '국제인'에게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할 일들이 자꾸 생기는 것을 숙명이라 해야 할까. 누가 무슨 목적으로 세고에 선생에게 압력을 넣어 사표를 쓰게 했을까. 오늘날 오청원의 사표 건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세고에 선생은 이미 죽었다.

1949년 호사이 구라노스께 8단이 정기대회의 성적에 따라 9단으로 승단하였다. 유일한 9단.
전전(戰前)까지는 9단이라 하면 명인(名人)밖에 없었으므로 명인에 필적하는 단위다. 지금은 일본기원 소속 9단이 120명에 달하지만 당시로는 대단한 지위다. 호사이는 6단 시절 오청원과 10번기 대결을 펼친 바 있다. 그러나 호사이는 당시엔 정선으로 '진검 승부'가 아니었다고 할 것이다. 당시에 흑번필승의 신화를 창조하던 호사이 6단은 오청원에게 정선으로 호기있게 덤비다가 그만 화를 입은 바 있다. 요미우리 신문이 그를 놓칠 리 없다.
10번기의 달인인 오청원과의 10번기를 기획하였다.

호사이(朋齊)와의 2차전
호사이(藤澤朋齊) 9단과 오청원의 10번기를 최고의 빅카드로 생각한 요미우리 신문은 오청원을 9단으로 만들 작정을 했다. 그래서 6,7단 선발 10번기를 기획해낸다. 이 10번기를 통해 오청원을 자연스럽게 9단으로 승단시킬 속셈이었다. 오청원도 호사이와의 10번기에 반대했다. 상수가 하수를 시험하는 것은 가능해도 하수가 상수를 평가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그러나 요미우리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호사이가 일본 최초로 9단이 되어 한껏 주가가 뛰고 있을 때 '재야의 일인자' 오청원과 맞붙이는 것은 이때까지 10번기를 펼쳐온 요미우리라면 기어코 성사시키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오청원의 단위가 8단인지라 선상선의 치수로 붙어야 하지 않느냐는 일부의 지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오청원도 7단 승단이 임박한 호사이를 정선으로 계속 두게 한 일이 있다. 10번기의 달인 오청원이 흑을 들고 두게 한다? 기묘한 아이디어를 짜냈다. 오청원을 9단으로 만들어 주기로 작정한 것이다.

6. 六,七단 선발 10번기

그렇게 고안된 것이 '오청원 대 6,7단 선발 10번기'였다.
오청원은 6,7단 선발 10번기를 통한 9단 승단이라는 기획 의도는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창 자라는 기사들을 꺾어놓고 자신이 우뚝 선다고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결론은 '둔다'로 결정했다. 6,7단과의 10번기에 출전하기로 맘을 굳힌다. 전후(前後)의 일본 상황은 뒤숭숭하여 사람들의 잡다한 생각을 묻어버릴 수 있는 쇼킹한 이벤트를 찾고 있었기에 바둑도 좋은 '꺼리'가 됐다. 오청원도 바둑기사이기에 어떤 승부라도 물러나는 태세를 보여주는 것은 옳지 않았다.

10번기에 출전한 6,7단은 사실 10명의 신예로 뽑힌 것만으로도 즐거운 사람들이었다.
'타도! 오청원'을 기치로 힘차게 도전하여 왔으나 오청원이 또한 뒤에서 쫓아오는 후배들에게 질 수는 없는 일. 결과는 오청원의 8승1무1패였다. 더구나 모조리 백차례이고 흑을 든 경우는 두 번밖에 없는 불리한 치수였는데도 오청원의 완승이었다. 오청원의 유일한 패배는 구보우찌 6단에게 패한 것이며 '빅'은 스미노 6단인데, 둘 다 관서기원 기사였다는 것은 묘한 결과였다. 당시엔 일본기원과 관서기원의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청원도 일본기원과의 관계가 좋지 않아 일부러 져주었다는 억측을 듣기에 딱 알맞은 성적이었다.

이 10번기가 끝나자 오청원은 1950년 2월15일 일본기원에서 9단위를 받았다. 그의 나이 36세.
기다렸다는 듯이 요미우리는 호사이 9단과 오청원간의 세기의 대결이라고 호들갑을 떨면서 10번기 기획에 나섰다. 오청원이 9단을 받기 직전인 1949년 11월 일본기원에서 '명예객원'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일본기원에 적(籍)이 없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떤 뜻의 칭호인지 의미도 모른 채 오청원은 그 칭호를 받았다.

드디어 호사이(朋齊)와의 10번기?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호사이 9단이 좀처럼 승낙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6단 시절 오청원에게 흑번필승의 신화를 이어가겠다고 호언장담한 끝에 선상선(先相先)의 치수로 나섰다가 연패를 기록했던 아픈 과거를 갖고 있다. 그런 그가 무슨 원수를 졌다고 오청원과의 사활을 건 10번기를 서두를 것인가. 더욱이 그는 일본 최초의 9단이다. 일본 최초의 9단으로서 명망과 존경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위치인데 섣불리 10번기를 해서 치수라도 고쳐진다면, 치수가 문제가 아니다. 설사 패하기라도 한다면 최초의 9단 입장에서는 얼굴에 먹칠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요미우리는 안달이 났다.
신문 기보도 빨리 작성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 호사이 9단이 고집을 부리자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요미우리가 지금까지 10번기를 기획할 때마다 안 하겠다고 한 기사는 없었다. 그 즈음 하시모토는 이와모토 8단과의 대국에서 혼인보자리를 되찾고 관서기원을 일본기원으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해 뛰고 있었다. 그래서 고안해 낸 것이 하시모토 혼인보와의 2차 10번기였다. 제1차 10번기는 오청원이 치수를 고쳐놓았기에 선상선(先相先)으로 출발하였다. 그래서 오청원은 하시모토와의 예정에 없던 치수고치기를 거행하게 됐다. 반면 호사이는 시간을 좀 벌고 있었다. 호사이도 결국엔 10번기의 전장(戰場)으로 나오지 않을 수 없지만 오청원의 전후 첫 10번기의 상대로 나선 하시모토(橋本宇太郞)는 시원시원한 사람이었다. 원래 오청원의 다음 상대는 '천하제일의 명검' 호사이(朋齊, 藤澤朋齊)였으나 그가 시합에 나서지 않자 대타로 지명된 인물이었다. 그러나 하시모토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7. 하시모토(橋本)와의 10번기 2차전
1946년 1차 10번기를 치를 때 하시모토는 승단시합에서 전승을 기록하고 있었고 제2기 본인방을 획득, 최고의 기량을 과시하고 있었다. 하시모토는 오청원과 인연이 깊은 기사인데, 46년 오청원이 세광교에 빠져 있다가 기계(棋界)에 복귀하며 처음 바둑돌을 잡았던 상대이기도 하다. 당시엔 그가 3승 6패 1빅으로 오청원에게 패퇴했는데, 이번에 또 본인방 5기 타이틀을 따내며 다시 한번 기회를 맞은 것이다. 하시모토는 5기에 이어 6기에도 본인방을 지켜내는 등 제2의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다. 하시모토와의 10번기 준비는 잘 되고 있었다. 제한시간도 10시간에 2일제로 결정돼 속기파인 오청원의 요구대로 끝났다.

제1국이 막을 올린다.
오청원이 1,2국을 연승하고 제3국째는 쌍방이 수를 잘못 보아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였다.
최후의 실수를 했던 오청원의 패배. 초반전은 꽤 빡빡하게 흘러갔다. 제4국은 빅이었다. 2승 1패 1무승부. 그러나 제5국은 오청원의 승리. 3승 1패 1빅이었으나 6국은 또 빅. 7국에서는 하시모토가 백을 들고 불계승을 거두었다. 3승 2패 2빅.
하시모토는 일본기원에 반기를 들고 관서기원을 막 독립시켰던 인물이다.
당시엔 소속도 불분명했고 일본기원 소속기사보다도 관서기원의 기사들이 꿀리지도 않았다. 그런 탓인지 하시모토는 오청원과의 10번기에서 그런대로 잘 버티어 나가고 있었다. 사실 관서기원의 총수로서 10번기에서 참패한다면 막 출범한 관서기원의 체면은 말이 아닌 것이다. 하시모토는 열심히 싸웠다. 10번 승부로서 치수가 바뀌는 일은 없어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김이 좀 빠진 오청원은 8, 9국을 이겨 마지막 대국에서 이기면 치수를 바꾸게 되어 있으나
하시모토도 끝끝내 잘 버텨내 백차례에서 4집을 이겨 치수를 지켜냈다. 선상선. 본래가 선상선인 치수에서 5승 3패 2무승부라면 오청원이 잘 싸운 전적이었다. 더욱이 2무승부가 있다는 사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짜릿한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애당초 호사이와의 대국이 예정되었으나 대타로 나선 하시모토로서도 잘 싸운 시리즈였다. 이제 운명의 오청원-호사이 10번기가 본격적으로 재논의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어차피 맞붙어야 할 운명이었다. 호사이가 기세싸움에서 꿀린 결과라 할까. 일본 최초의 9단으로 일본기원의 희망인 그와 오청원간의 10번기는 여론에 밀려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8. 호사이(朋齊)와의 10번기 2차전
호사이측의 사정은 복잡하였다.
슈사이(秀哉) 명인의 은퇴 이후 공석이 되어 있는 명인의 자리가 탐이 났을 수도 있다. 본인방의 세습은 중단되었으나 상징적인 의미로 기계의 1인자가 되는 어른의 위치인 명인에 오르려는 데에 오청원과의 10번기가 흠집이 될 수 있던 것이다. 오청원과의 10번기는 호사이의 입장에서 원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여론, 요미우리에서 하시모토와의 2차전의 사고(社告)를 내면서 호사이를 자극시킨 것이 그와의 치수고치기가 성립한 가장 큰 이유였다. 바둑팬의 희망이었던 오청원과 호사이와의 맞대면은 오청원이 언제든지 받아들일 태세인데도 불구하고 호사이가 원하지 않기 때문에 실현되지 못하고 있었다. 더욱이 승단 후 호사이 9단은 슬럼프 기미를 보이며 1949년 추계정기대회에서 3승3패, 50년 춘계대회에서 2승4패, 혼인보전에서는 3승3패로 부진해 섣불리 10번기를 가질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오청원-하시모토 2차전에 관한 요미우리 신문의 사고(社告)를 읽은 호사이 9단은 크게 화를 내며 일본기원의 기관지인 기도(棋道)에 "나는 언제든지 선다"는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요미우리가 무례하다고 비난했다. 요미우리도 "어느 쪽이 무례한가?"라는 글을 실으면서 오청원-호사이의 치수고치기 10번기는 계속 난항을 겪게 된다. 수개월이 흐른 후 감정을 삭인 양측은 호사이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화해하면서 오청원-호사이 10번기는 급물살을 타게 된다. 그러나 이번엔 제한시간을 몇 시간으로 하느냐로 싸웠다. 장고파인 호사이는 13시간을 주장하며 양보하지 않았고 오청원은 10시간 이틀제를 고집했다. 제한시간은 어느 기사에게나 문제가 된다.

특히 오청원 같이 감각적 바둑을 구사하는 천재형 기사에게는 제한시간이 짧으면 좋겠지만 장고파 기사에게 제한시간은 생명과도 같다. 그러나 아무리 생명과 같은 것이라도 상대가 있는데 한쪽의 주장만을 담기엔 무리가 따른다. 오청원은 1일 마감을 원칙으로 하는 사람이다. 바둑은 예술로서의 측면도 강하지만 어디까지나 경기다. 2일 이상 되면 동료들의 충고 등 아무래도 불순한 요소가 끼어들기 십상이다. 또 국제적인 경기로 보급하기 위해서도 1일 마감제로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시간이 짧다고 반드시 바둑의 내용이 떨어진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속기일지라도 훌륭한 기보가 많이 남아 있다. 어쨌든 70Kg대의 몸무게를 자랑하는 호사이는 16시간을 해도 끄떡없겠지만 오청원 같은 약골은 16시간 앉아있기엔 힘이 부친다. 오청원의 주장은 기껏해야 10시간 2일제로 두자는 것이다.

호사이는 시간에 대해서는 완강한 뜻을 갖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과거 1차 10번기에서 패한 것도 속기에 강한 오청원의 속전속결 작전에 말려들었던 것이다. 결국 13시간으로 결정났다. 뜻을 굽히지 않는 호사이에게 질려버린 요미우리 담당자는 훗날 "호사이와의 10번기 만큼 애를 먹은 기억이 없다"고 회고했다. 1951년 10월 호사이 9단과 접촉을 시작한지 2년여만에 2차 10번기가 빛을 보게 된다. 이 10번기는 소화(昭和)시대 20년대(1945~1954)를 통틀어 최대의 쟁기(爭期)로 꼽힌다.

오청원은 평소 대국에 임하면서 '절대로 이겨야 한다'든지 '절대로 져서는 안 된다'고 하는 강박 관념을 갖는 쪽은 아니다. 승부는 운이 좋은 쪽에서 이긴다고 보기 때문에 전야제때 밝히는 임전소감에도 강한 승부 의지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대국이 성립할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고 세상소문도 떠들썩했기 때문에 상당히 긴장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의 임전소감은 간단했다.
"내가 평상심을 지킬 수 있으면 지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이 승부는 호사이 9단의 수읽기에 뒷받침된 강펀치에 오청원이 정확한 대국관으로 맞서는 싸움이 될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하느님만 알고 있는 것이다.

제1국은 10월20일부터 3일간 린노라는 절에서 열렸다.
온 산이 단풍으로 물든 산속 대국이었다. 호사이 9단의 흑차례였는데, 돌이켜보면 호선으로 두어본 지도 호사이로서는 처음이었다. 일본기계 공식랭킹 1위와 일본기계의 풍운아이자 비공식랭킹 1위를 달리는 오청원의 대결이 시작됐다. 태산같은 덩치에 육중한 몸매를 자랑하는 호사이. 그 앞에 조그만하고 가녀린 몸매에 눈빛만은 초롱초롱 빛나는 오청원. 50수를 지날 때부터 흑은 좌변의 백 모양에 쳐들어와 일찌감치 엎치락뒤치락 혼전의 양상이었다. 흑은 백모양을 송두리째 깔아뭉개고 백인 오청원도 흑을 자기 집 속으로 몰아놓고 흑을 잡으러 갔다.

피차 한발도 물러설 곳이 없다. 전면전.
이 전면전이 벌어지자 바둑은 단명국이 예상되었다. 운명의 시간은 착착 다가오고 있었다. 흑은 백 모양을 깔아뭉개려 하였고 백을 든 오청원도 자신의 집 속으로 쳐들어온 흑을 소탕하러 나섰다. 장렬한 공방전은 끝끝내 한 수 부족한 흑이 돌을 거두고 말았다. 94수만에 오청원 불계승. 단명국이었다. 그런데 한 수 모자란다는 것은 착각이었고 오청원이나 호사이나 판을 잘못 보고 있었다. 종국후 기록계가 그 '수순'을 지적하자 두 사람은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수를 잘못 본 것은 역시 천하를 양분하는 기계(棋界) 최초의 9단과 언더그라운드 바둑 대부가 2년여만에 속개된 바둑에서 들떠 있었기 때문이다. 당사자가 수를 잘못 보아 돌을 거두는 일은 비일비재했고 당시엔 멋있게 수를 다 놓아보지 않고도 안 되는 수면 돌을 거두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던 시절이므로 간혹 실수는 있을 수 있었다. 호사이로서는 불운하게 패했다고 할 수밖에.

제2국은 오청원의 흑차례였는데, 거의 승리를 거두는 장면에서 과수(過手)가 튀어나와 '아차'하는 순간에 역전당하고 말았다. 제3국은 백차례. 우세한 흑을 필사적으로 따라잡아 빅을 만들었다. 제4국에서는 다시 흑차례인데, 패하고 말아 4국까지는 오청원이 1승2패 1무승부였다. 오청원은 덤이 없는 시합에서 흑을 들고 두 번이나 연속으로 지는 일은 일찍이 없었다. 더욱이 제5국은 오청원이 백차례가 아닌가. 여기서 진다면 1승3패1무승부가 되어 대단히 괴로운 입장에 처하게 된다. 오청원에게 5국은 중차대한 한판이었다.

흑차례인 호사이 9단은 단단하게 두어 나가 이틀째 끝나도 흑의 흐름은 흐트러진 데가 없이 백이 밀고 들어갈 틈조차 주지 않았다. 흑을 들면 이런 점이 유리한 것이다. 두텁게 기다리다 백이 무리를 하면 그때 가서 과실을 따먹으면 된다는 식이다. 어지간히 기력 차이가 나지 않으면 흑으로서는 잘 패하지 않는다. 테니스에서 서비스권을 가진 쪽이 가진 유리함이랄까. 흑을 들면 당연히 이기는 것이고 백으로 한번쯤 이기게 되면 번기(番棋)는 유리하게 진행되는 셈이었다. 3일째 저녁 쌍방이 필사적인 승부에 몰입하고 있을 때 갑자기 정전이 되어 주위가 침침해졌다. 그러나 오청원과 호사이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말하자면 정전에는 익숙해 있어 승부에 몰두하고 있는 두 사람은 전등이 꺼져도 그리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러다 불이 들어오면 "앗 차차!"하고 놀라면서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웃어 제쳤다.
결국 제5국은 전등이 켜진 다음부터 격렬한 싸움바둑으로 대바꿔치기 끝에 백이 승리를 가져갔다. 쌍방이 테니스에서 말하는 상대의 서비스권을 따내는 악전고투 끝에 2승2패 1무승부로 균형을 이루었다. 제6국이 분수령이다. 제5국까지의 명승부는 이제 다 지난 일. 나머지 다섯판에서 한판만 이기면 치수가 고쳐지는 일은 없다. 서로 4승차가 나야만 치수를 바꿀 수 있다는 약속에 따라 1무승부가 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즉 어느 한쪽이 1승을 거두어 3승1무가 되면 설사 상대는 전판을 모조리 이긴다 하더라도 6승3무1패밖에 안 된다. 6승과 3승은 4승 차이가 아니므로 자존심은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오청원의 괴력이 발휘된다.
호사이 9단의 버티기도 이제 기운이 다되었던지 오청원은 6국부터 10국까지 내리 5연승을 거둔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오청원-호사이의 치수고치기 10번기는 그렇게 치수가 고쳐졌다. 호사이 고로스케 9단은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일본 최초의 9단이 두 번의 기회에서 한번은 자만심으로 승리하지 못했고 두 번째는 금세기 최고의 기사로 주목을 받았지만 속된 말로 '상대도 안될' 정도로 일패도지(一敗塗地) 하고 말았다. 이럴 수는 없었다. 오청원이 10번기에서 승승장구하자 약이 오를 대로 오른 호사이 9단은 제3차 치수고치기를 신청한다. 이미 승부는 끝난 것이고 만신창이가 된 다음이나 만약 이긴다면 그나마 반 본전은 하는 셈이다. 그리고 오청원의 치수고치기 10번기 사상 처음으로 오청원을 이기는 기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호사이의 기대는 깨졌다.
선상선으로 출발하였으나 정선치수로 바뀌고 만다. 바둑계(棋界)의 충격파는 대단했다. 호사이가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이기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선상선인 치수가 정선으로 고쳐질 것이란 생각은 못 했던 것이다. 괴력이 따로 없었다. 고수의 깊이는 과연 어디까지일까. 오청원은 6국만에 5승1패로 4승차를 만들었다. 치수가 정선으로 바뀌자 더 이상 대국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더 두다가 두점 치수까지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마지막 제6국 때는 한판만 지면 치수가 바꿔지는 상황이어서 호사이 9단은 일본 기원의 명예를 더럽힌다고 하여 품속에 사표를 넣고 다녔을 만큼 배수의 진을 쳤다. 그러나 그 마저도 무위로 끝났다.

9. 사카다(坂田)와의 10번기
오청원의 치수고치기도 바야흐로 하이라이트를 넘어섰다.
호사이와의 세 차례에 걸친 치수고치기는 오청원 인생의 하이라이트였으며, 이로써 '난다 긴다' 하는 기사들과는 전부 선상선 또는 정선으로 치수를 바꿔놓았다. 그래서 오청원은 바둑을 둘 수 있는, 맞상대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기다니 미노루(木谷實)나 호사이의 경우 한창 때의 전력이었으므로 오청원에게 지지만 않았더라도, 10번기에서 설사 지더라도 치수가 바뀌는 일만 당하지 않았더라면 기사생활을 더 연장할 수 있었다.
승부의 세계는 그렇게 냉혹한 것이다.

이번엔 사카다가 오청원을 찾아왔다.
'면도날'이라고 불리는 사카다 에이오(坂田榮男). 1949년에 이와모토(岩本薰)와의 치수고치기에서 이와모토는 "내가 격파당해도 내 뒤에는 사카다가 있거든"이라고 몇 번이나 되풀이했을 정도의 기재였다. 훗날 일본바둑사상 최고 기사의 반열에 오르는 사카다는 통산 66회 우승을 차지해 타이틀 회수면에서 새 금자탑을 세운다. 그 무렵 사카다는 각 기전에서 발군의 성적을 올려 그의 시대가 다가오리라는 것을 예고하고 있었다.
팬들이 사카다와의 10번기를 학수고대한 것은 당연했다.
첫 10번기 이전에 오청원은 사카다와 6번기를 선상선의 치수로 둔 적이 있는데, 그때는 1승4패 1무승부로 완패했다.
따라서 선상선으로 맞선 사카다가 호선으로 치수를 바꿀 것이란 전망이 우세했다. 이미 호사이와의 운명을 건 치수고치기도 끝난 이후여서 오청원이 최선을 다할 것이란 전망을 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 시작할 때만 반짝 2승2패를 기록했을 뿐 오청원은 내리 4연승을 거두어 6승2패로 치수를 바꾸어 버렸다. 정선이다.

10. 다카가와(高川)와의 10번기
그후 또 다른 일류 기사인 다카가와(高川格) 본인방과의 치수고치기 10번기는 따로 이뤄졌다.
다카가와 9단은 2기 본인방부터 내리 9연패를 이루어 최근 조치훈 9단이 1998년 본인방 10연패 기록을 갱신할 때까지 일본 바둑사의 다카가와(高川格) 본인방과의 10번기는 결과적으로 오청원의 마지막 10번기가 된다. 다카가와 본인방과는 1952년 이래 3번기 시합을 치러 오청원이 연승중이었으나 치수고치기 10번기라서 새로운 마음으로 덤벼들어야 한다. 다카가와 본인방은 비력(非力)이라 일컬어지는데 그의 대국관의 정확성과 균형에 대해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본인방을 연속방어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시하지 못할 존재다.
그가 본인방 9연패를 차지한것은 그의 집중력을 잘 대변해주는 요소. 불세출의 천재 오청원이 두각을 나타낸후 당대의 최고수로 지목된 기다니(木谷實), 가리가네(雁金準一), 이와모도(岩本薰), 호사이(藤澤庫一朋齊), 사카다(坂田榮男)가 줄을 이어 도전했으나 전부 패퇴한 지금 남은 자는 다카가와 뿐이다. 그렇다고 다카가와가 앞서 스러져간 위인들 보다 더 센것은 아니었으나 남아있는 고수중에는 유일했다.

이번 10번기는 치수는 호선, 제한시간은 사카다의 경우와 같이 10시간 이틀제 였다.
그러나 시작하자마자 3연승을 올려 4국이 다카가와 본인방에겐 막판이 되었는데 그는 흑불계승으로 막판의 고비를 가까스로 비켜갔다.
이어 5국은 오청원의 흑승.
제6국은 본인방의 흑승.
제7국은 오청원의 흑승. 그러나 더 이상 버티지를 못하였다.
제8국에서 오청원은 백차례에서 1집승을 거두고 드디어 치수를 6승2패로 고쳐 놓았다.

다카가와 본인방마저 무너지자 당시의 일류기사는 오청원과 1단 차이(선상선)내지 2단 차이(정선)가 되어버렸다. 지금으로 치면 이창호가 철권이라고 볼 때 이창호가 모조리 치수를 바꿔버렸다는 얘기와 똑같다. 조훈현 유창혁 이세돌 등 등... 이 때문에 요미우리 신문사는 치수고치기 10번기를 마칠 수 밖에 없었다. 기다니와의 가마쿠라 10번기부터 15년동안 계속된 10번기가 끝났다는 것은 오청원에게 안도의 느낌과 함께 쓸쓸함도 안겨주었다.

그도 치수고치기 15년이 가장 기력에 충실해 온 시기였음을 밝힌다.
처절한 승부세계의 진면목을 보여준 치수고치기 10번기-. 앞으로 이것보다 더 쇼킹한 기획이 벌이질 수 있을지 의문인 치수고치기 10번기에서 15년동안 11번의 대국에서 모조리 승리했다는 것은 오청원의 탁월한 기량 외에 그 무엇이 있었다. 바로 정신력이다. 전쟁의 와중에서 중국인으로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압박감이 바로 철저한 승부욕으로 나타났을 수 있다. 돌이켜 보건데 치수고치기 10번기는 여러가지 기전 중에서 기사의 기술과 명예를 건 필사적인 승부였다. 다른 모든 타이틀이 중차대하더라도 타이틀을 잡느냐 못잡느냐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치수고치기는 당대 톱클래스에 오른 특정의 두기사가 맞상대해서 승부를 겨루는 대국이므로 다듬은 기술을 다하고 그 정신을 다 바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그 기보의 일국(一局) 일국엔 피어린 역사의 숨결이 느껴진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후학들에게 필독서가 되고 있다는 점은 시대를 달리해도 최선을 다한 한판이라 그만한 교과서가 따로 없다고 하겠다. 오청원은 승부에 있어서는 승리자이자 승부를 초월한 입장에서는 그는 동양문화의 정수이다. 그의 기풍은 변환자재(變幻自在) 화려하기 그지없다. 나는 그처럼 순결한 예술가를 본 일이 없다.
노벨상 문학상을 수상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오청원론이다. <끝>

지금도 정정한 오청원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