浜比嘉親雲上, 琉球人棋士,
1609年(慶長十四)薩摩의 島津家久는 武力으로 琉球의 尙寧王을 降伏시키고는 薩摩藩의 治世下에 두고 日本과의 交易을 再開하였다. 本因坊道策의 名聲이 琉球의 中山王에게 전해졌으나 天和二年의 朝貢 때에 이르러서야 隨行員에 棋士 親雲上浜比賀를 합류시키게 되었다. 島津侯의 斡旋으로 本因坊道策에 四点으로 二局을 두었다.

屋良里之子, 琉球人棋士,
浜比賀以來 二十八年만에 十五세의 少年棋士 屋良里之子가 동행하였다. 島津家를 통해 名人因碩(道節)에게 대국을 의뢰했다. 因碩은 名人이었으나 碁所는 아니었으므로 本因坊道知 및 公儀들과 協議하여 本因坊道知와 三点局을 두도록 했다. 里之子는 前例에 따른 대국을 원했으므로 當時十三세의 因碩門下였던 相原可硯과 對局하였는데, 可硯이 白番으로 二집을 이겼다.

田頭親雲上과 與那覇里之子, 琉球人棋士,
屋良里之子가 다녀간지 三十八年만에 二人의 棋士가 대국을 요청해왔다. 春硯因碩은 田頭에게 三点、후계자인 井上春達은 與那覇里之子에게 四点으로 對局을 했으나, 兩局 모두 因碩側의 完敗였다. 琉球側의 棋力이 向上된 점도 있겠으나, 當時는 日本棋界가 아주 低迷期여서 七段인 井上春硯因碩가 筆頭格인 시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