水谷縫次, 1846年(弘化三)-1884年(明治十七)
伊予國大島에서 태어나다. 七세 때 今治城主 松平壹岐守 勝吉에 召出되어 御前對局을 두었다. 별도로 스승으로 섬긴 사람은 없었고, 獨學으로 바둑을 연마하였는데 近隣에서는 당하는 者가 없었다. 十三세 때 因之島에 歸省하는 秀策에게 四子와 三子로 두어 壓勝하여 江戶 進出을 시도했으나, 兩親의 反對로 어쩌지를 못하고 代用數員 등을 하고 있었다.
1879年(明治十二) 方円社 設立時 秀甫로 부터 招請을 받고 翌年에 上京, 入社하다.
入社 後, 小林鐵次郞, 酒井安次郞, 高橋杵三郞 등과 함께 方円社 四天王으로 불리우고, 秀甫에게 先相先으로 버티는 唯一한 존재가 되었다.
1884年(明治十七), 七段昇進을 하려고 할때 高橋杵三郞이 五段으로 一局을 더 많이 이겼다는 이유로 진기한 爭碁가 시작되었다. 縫次가 먼저 四連勝을 했다. 이後 爭碁前의 一局을 넣는 것으로 대국을 繼續했는데 第五, 六局을 連敗하는 바람에 새로운 爭碁를 치루게 되었다.
이무렵 縫次는 肺結核이 惡化하여, 十一月에 예정된 中川龜三郞과의 對局을 二日 앞두고 死去했다. 方円社는 縫次에게 七段을 追贈했다. 이를 애달피 여긴 秀甫는 "片枝의 의지마저도 꺽어버린 松의 雪..."이라는 追悼句를 남기고 있다.
上京 後 비록 數年간의 活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縫次는 方円社의 俊秀 中에서도 最高로 囑望되었다. 碁는 대단한 長考派로 읽기와 感覺이 특히 좋았다고 한다. 性品이 溫厚하고, 品性도 賤하지 않고, 碁技도 拔群이었으나, 對局態度에 問題가 있었다.
對局中에 相對의 얼굴을 힐끔힐끔 거린다거나, 石을 떨어뜨려 상대를 놀라게 한다거나, 괴상한 콧소리를 내는 등의 奇癖이 있어 秀甫도 질색을 했다고 한다. 死後에도 上京 以前에 賭碁에 出入한 흔적으로 생각되는 刀傷이 몸에 남아 있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