野澤竹朝, 1881年(明治十四)-1931年(昭和六)
島根縣松江에서 태어나다. 1903年(明治三十六)本因坊秀榮에 入門하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二段, 三段, 그리고 四年後에는 四段으로 날아서 昇進하다.
1909年(明治四十二)四月, 万朝報 主催의 敗退碁에서 十二人을 敗退시키다.
1913年(明治四十六)四月, 時事新報社의 懸賞敗退碁에서 明治四十三年 一月 四回戰부터 三年 내리 五人을 敗退시키고, 一社 五回의 新記錄을 達成하여 常勝將軍, 鬼將軍의 異名을 얻었다.
1915年(大正四)五月 五段으로 나아가다. 八月, [爭碁虎之卷]八月號에서 [評의評]을 맡아 意慾的인 論說을 發表했으나, 本因坊 및 方円社 兩者의 干涉으로 一回로 中斷되었다. [評의評]으로 이미 名人으로 인정받던 本因坊秀哉의 評에 野澤이 評을 가한 것이 名人과 方円社의 權威을 위태롭게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1918年(大正七)十月十日, 竹朝의 後援者였던 高橋善之助가 月刊誌 [爭碁評論]을 創刊하자, 竹朝는 [評의評]을 復活하여, 秀哉와 中川龜三郞의 評에 是是非非를 가하고, 人物評論 [棋界月旦]에서는 秀哉의 本因坊繼承을 둘러싼 裏話를 暴露했다.
十二月, 秀哉는 竹朝에 戒告狀을 보냈으나, 아무런 答信도 없었으므로, 同十六日, 竹朝를 本因坊家로 부터 破門하고 段位를 沒收했다. 그러나, 神戶로 移住한 竹朝는 爭碁評論의 誌面에 從來와 같이 계속 五段의 肩書를 쓰고 毒舌을 퍼붓는 硬骨漢의 기질을 發揮했다.
大正데모크라시로 言論의 自由에 대한 民主主義 運動 風潮가 한참인데다 竹朝도 一家言의 見識을 가지고 있어 幕府의 後援이 없어진 家本으로서는 竹朝의 活動에 制限을 가하기란 不可能이었다. 碁界에서는 村八分의 대우는 받지 못하더라도 棋譜와 講評에 대한 著作權의 歸屬을 촉구했다. 新聞社, 出版社 등은 竹朝에 同情的이었다.
秀哉는 스스로 나서는 대신 古島一雄에 이 일의 調停을 의뢰했다.
五年만에 兩者가 築地 料亭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喜多文子를 立會人으로 和解가 成立했다. 그 후에도 坊社合同의 中央棋院 設立集會 席上에서 古島一雄이 秀哉-竹朝의 和解를 報告하고, 兩者가 의첩하여 解決는 했으나, 兩者의 간격을 메우는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離合集散을 되풀이하던 碁界도 1923年(大正十二)의 關東大震災으로 機構의 統一이 시급해지고, 翌年에는 日本棋院이 創立되었으나 竹朝와 井上孝平은 在野에 身을 묻고는 은둔했다. 秀哉와의 관계도 있으나 이 무렵에는 이미 結核을 앓고 있었다.
翌年, 棋院에서 脫退한 雁金準一등이 組織한 棋正社와 日本棋院의 對抗戰이 讀賣新聞의 主催로 개최되었다. 棋正社의 旗色이 나빴으므로 病氣療養中인데도 불구하고 竹朝이 차출되어 나왔다고 한다. 鈴木爲次郞과 十番碁가 開始되었으나 이미 竹朝은 肺患이 惡化되었기 때문에 兩者가 각각 別室에서 對局하는 異常한 事態였다.
1930年(昭和五)三月, 第九局을 끝내고 鈴木이 五勝二敗二無로 막판에 몰리게 되었으나, 이미 心身이 限界에 달해 最終局은 두지도 못하고 翌年一月 五十一세로 죽다. 最後까지 非凡한 사람으로 죽어서도 꽃을 피웠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