坂口仙得, 1801年(享保元)-1867年(慶應三)
江戶에서 태어나다, 幼名은 萩野虎次郞. 天保四傑의 一人. 七世安井仙知 (仙角,大仙知)는 五十二세로 通例보다 약간 빨리 引退했다. 虎次郞의 養育, 坂口家의 再興에 余生을 바쳤으나 大仙知의 實子는 아니라고 한다. 坂口家(또는 萩野家)는 무슨 事情으로 改易되고, 坂口家出身의 大仙知는 坂口家를 일으켜 세운 사람으로 전해진다.
白木助右衛門의 棋家系譜에는 "上手 坂口仙得, 仙知 門人, 江戶出生으로 幼名은 坂口虎次郞이고, 坂口家는 坂口千壽, 坂口仙得의 二代로 이후는 坂口家를 繼承한 新家로 다시 일어섰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坂口仙德(親仙德)의 長男 七世仙知 는 1780年(安永九)十六세에 安井家의 家督을 繼承한다. 親仙德은 1783年에 죽고, 七世仙知의 弟 千壽가 坂口家를 이었으나, 千壽는 1794年(寬政六)一月에 早世한다. 大仙知가 引退後 二十年에 걸쳐 虎次郞을 훈련하여 坂口家를 再興시키는 것은 虎次郞과는 무슨 血緣關係가 있었던 듯하다. 仙得의 複雜한 生을 考慮하면, 後에 宗家 복귀도 秀和의 名人碁所에 異議를 제기하는 하나의 遠因이 된다. 虎次郞은 十四세 때부터 大仙知의 가르침을 받았다.
入段에 八年이나 걸렸던 晩成型이나 그後 精進을 거듭하여, 1838年(天保九)에는 七段으로 올라간다. 이때 이름을 仙得으로 改名한다. 仙德으로 하고 싶었으나 그러면 坂口家의 初代仙德과 同音이어서 仙得이라 했다. 得은 知得仙知에서 得을 따랐다. 混同을 避하기 위해 仙德은 親仙德이라고도 불리룬다. 三十八세에 外家의 上手로 御城碁에 出仕하여 服部雄節에 不計敗. 以後 二十四年간 三十二局을 두었다. 大仙知는 仙得이 御城碁에 初出仕하기 前年에 죽었으므로 仙得의 御城碁出仕를 보지못했다.
性品은 偏屈, 碁는 時間을 가지고 두는 長考型.
雄藏, 松和, 算知 등에 지지않는 실력으로 雄藏과는 互先으로 두었다. 天保四傑의 一人으로 異彩로운 사람이나 對局數는 적다. 御城碁譜는 仙得의 집에 備置해두고 紛失을 우려해 門外 출입을 하지 않아 秀和는 連日 왔다갔다 하면서 寫本을 떴다.
1844年(天保十五)부터는 [爭碁段付便覽]이라고 하는 爭碁人名錄을 編纂하고, 三個月마다 改正하여 상당히 오래동안 配布했다. 眞面目으로 凡帳面한 性格이다.
1859年(安政六), 安井算知가 죽은 翌年, 秀和는 名人碁所의 願을 낸다.
仙得은 松本因碩을 添願人으로 爭碁를 表明한다. 秀和 四十세, 仙得 五十八세이었다. 安井 宗家는 秀和의 碁所에 贊同을 하나 宗家의 後見役을 맡고 있는 仙得은 宗家의 不當한 處事에 반발한다. 그래도 先相先의 치수인 秀和에게 芸道上의 意地는 표하고 있다. 安井家의 繁榮은 大仙知, 知得, 算知, 仙得로 이어지나, 나중에는 算知 未亡人과의 不和로 인해 算英의 後見도 秀和에게 맡겨지고 仙得은 宗家와는 疎遠하게 된다. 家元이 同業組合의 馴合으로 추락하던 시기에서 仙得의 行動은 壯하고 훌륭했다.
爭碁史的으로는 寡默한 棋士로 알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