岸本左一郞, 1822年(文政五)-1858年(安政五)
石見國 銀山領 大野村 出身이다. 出雲國의 儒學者 山本閑休에 발탁되었다. 十五세 때에 丈和 門下에 入門하여 十七세에 入段하다. 秀甫 前에 塾頭을 지냈다. 七년 年下의 秀策과는 鄕里가 같다고 하여 對局이 특히나 많다. 秀策이 鄕里에 가지못해 대신 碁譜를 보낼 때에는 芸兄 左一郞에게는 보이고 싶지 않다는 글을 쓰는 등 左一郞에 대한 配慮가 깊었다.
五段시절, 左一郞은 同門인 鶴岡三郞助, 安井門下의 鬼塚源治와 서로 技量이 伯仲이었으므로, 三人이 同時에 六段으로 昇段할 것을 希望했으나, 五段인 松本錦四郞 因碩의 反對에 부딛혀 三人이 因碩과 爭碁를 두어야만 하게 되었다. 이때 左一郞이 國元에 돌아가지 않으면 안될 일이 생겨 爭碁가 취소되고, 因碩을 포함한 四人이 同時에 昇進했다고 한다. 左一郞은 人品이 円滿하여 누구로 부터도 好感을 사는 사람이었다.
秀策이 후계자가 되고나서 急速한 기력의 진보를 보였으나
1854年(安政元)九月에 歸鄕하여 四年後 安政五年에 三十六세로 죽는다.
秀和는 塾頭를 繼承한 村瀨彌吉(後의秀甫)의 名儀로 左一郞에게 七段을 追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