太田雄藏, 1807年(文化四)-1856年(安政三)
江戶商家에서 태어나다, 또는 江戶本町一丁目, 丁字屋이라고 하는 絲屋의 息子라고도 한다. 初名은 河原卯之助, 後에는 太田姓을 이어받고 이름은 良輔라 했다. 후에 다시 雄三으로 改名하고, 號는 一石庵爛柯라 했다.
1848年(嘉永元)에 安井門下에서 七段으로 推擧되었으나, 江戶의 氣質 때문인지 剃髮円頂을 싫어하여 御城碁 出仕를 그만 두었다. 雄藏은 白面朱唇, 眉秀, 瞳凉, 漆黑頭髮의 好男子였다. 당연히 자신의 風采를 損傷하는 剃髮은 싫어할 수 밖에...
座隱談叢을 보면, 雄藏이 七段昇格을 주저하며 가로되 "御扶持는 바라지도 않고 御城碁도 바라지는 않으나 剃髮하지않고 七段을 준다면..." 했다 한다.
性格이 화려함을 좋아하여 手段의 余地가 많은 外目을 즐겨 두었다.
人間性이 아주 純粹한 人物로서 歌舞에 능하여 柳橋花月 같은 雄三의 춤은 有名했다.
才氣煥發, 速碁의 타입으로 秀和와의 對局이 百三十對局을 넘어간다.
1853年(嘉永六) 秀策과의 三十番碁는 歷史的으로 有名하다.
二十二년 年少의 秀策과는 이미 五十局 以上을 두고 있다. 거기다 三十番을 더 둔다고 하는 것은 秀策과의 對局에서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던 모양이다. 旗本赤井五郞作이 發起人이 되어 三十番碁는 互先으로 시작했으나 第十七局에서 先相先으로 치수가 바뀌었다. 치수가 고쳐진 후 秀策의 三勝一敗一無, 雄藏을 막판으로 몰아가려는 찰라 第二十三局이 빅으로 끝난다. 秀策은 이 一局을 [太田畢生의 傑作]이라고 評했다.
雄藏은 이 바둑을 끝으로 江戶를 떠난다.
三年後 三月二十日, 越後絲 魚川近郊의 旅宿에서 客死한다. 訃報를 들은 秀策은 痛惜했다고 한다. 雄藏이 越後로 갈 때 京橋 吳服商의 딸이 同行했다고도 한다. 雄藏은 知得仙知의 二女와 결혼했었다.
太田雄藏, 伊藤松和, 坂口仙得, 安井算知 四人을 일컫는 天保四傑의 筆頭로서 棋風은 크고 화려하면서도 味을 아끼고 중시하는 바둑이었다. 四名의 上手 중에서도 芸, 毫厘力, 勝負에서 雄藏이 가장 뛰어난다고 秀策은 雄藏을 높이 評價하고 있다.
雄藏이 둔 바둑은 西征手談, 斧之柄傳記에 揭載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