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井算英, 1847年(弘化四)-1903年(明治三十六)
九世安井算知의 一子. 江戶에서 태어나다. 11세 때, 父算知가 急逝하는 바람에 本因坊秀和가 後見人이 되고, 14세에 入段하다. 幼兒期부터 苦勞에 시달렸으나 常識있는 人情家였다고 한다.
明治時代에는 最後의 [御城碁 經驗者], [御城碁의 遺物]로서 尊敬되었다.
家元側과 方円社가 對立한 때에는, 秀榮과 秀甫, 中川龜三郞과의 和解에 腐心했다.
秀榮을 中心으로 한 家元側이 方円社와의 合同硏究會에서 脫退한 後도 算英은 方円社의 試合에 參加하고 있다.
五十二세에 七段으로 昇進하다.
算英은 安井家을 絶家하는 氣는 없었던 듯하다.
외동딸이 바둑과 關係없는 곳으로 시집을 가므로서 後繼者에 골머리를 썩혔다.
弟子와의 對局中에 卒中을 일으켜 그대로 不歸의 客이 되었다.
이로써 安井家는 消滅했다.
後에 秀哉名人으로 된 田村保壽를 後繼者로 생각했다고도 전해진다.
後年, 七世仙知(大仙知)을 敬愛하던 木谷實은 弟子 한사람을 보내어 安井家의 再興을 願했으나 實現되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