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井算知(俊哲), 1810年(文化七)-1858年(安政五)
江戶兩國藥硏堀에서 태어나다. 八世知得仙知의 實子. 幼名金之助, 후에는 俊哲로 바꾸다. 十六세에 知得의후계자로 되다. 御城碁에 初出仕하여 服部因淑에게 三点으로 不計勝을 거두다. 1838年(天保九), 父知得仙知의 死後에 安井家九世를 승계하고 算知로 改名하다.
名人算知와 同名이어서 二世算知로도 불리운다.
飄逸에 失敗하여, 其의 行動이 往往 眉間을 지푸리게 하나, 본래 篤實한 性品으로 然諾를 주는 任俠의 氣風이다. 碁風은 家父의 愼嚴과는 달리 豪放一家를 자랑한다. 그의 성격 탓이기도 하겠지만 그는 父訓은 따르되 結果에는 그리 구애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後世에 그의 바둑을 評하기를 俊敏하면서도 재미있다. 古來로 부터 수많은 바둑을 보아왔지만 "이건 算知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라고 했다. 특히 算知의 바둑은 形보다도 力이 발군이면서도 그의 纖細함에 入微를 넣는 기술은 本因坊秀和의 之를 畏敬시킨다. 젊은 시절은 마시고 치고 노는 三拍子를 두루 갖춘 道樂者였다.
代稽古로 돌아오는 길에는 父親에게서 빌린 羽織에다 袴를 質에 넣고 遊蕩에 들렸으며 御城碁의 下打 前夜에도 술에 취해 同僚의 걱정을 산 것도 이만 저만이 아니었으나 父知得은 生活態度에 대해서는 조금도 말하지 않았지만 되지도 않은 바둑을 두었을 때는 激하게 나무랐다고 한다.
後年, 海老澤健造(後에 嚴崎姓)가 算知의 實子 算英의 바둑을 보고 있던 중에 너무도 심한 바둑을 두는지라 생각도 없이 회초리를 들었다. 아직 十세 前後의 算英은 울면서 母親에게 하소연을 했고 烈火같이 怒한 母親은 建造를 追出하려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算知도 처음에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말라는 옛말도 있거늘 하물며 스승의 자식을 때린 처사는 破門-放逐 감이라고 펄쩍 뛰었으나, 자초지종을 듣고는 깊이 느끼는 바가 있어 算英이 今後 또 다시 이런 忍耐심없는 행동을 할 때는 얼마든지 때려도 좋으니 앞으로 算英의 師兄이자 芸兄이 되어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며 羽織을 내려 建造의 行爲를 치하했다.
算知의 바둑은 豪力無雙의 흔들기가 有名하나 힘(力)에 自信이 있어서인지 序盤은 堅固하게 두고 때로는 父知得처럼 집바둑을 두기도 한다. "저 힘바둑에 正面으로 돌파할 馬鹿이 있는가" 하고 秀和도 算知의 豪腕에는 敬意를 表하고 있으나 그 中에는激烈한 秀和-算知의 힘겨루기의 正面衝突도 있다. 秀和에게 한번이라도 互先으로 만든 것은 算知一人이었다. 一局에 向하는 集中力, 瞬發力은 拔群으로 御城碁라는 大舞台에서는 秀和에게 黑番으로 五勝, 白番으로는 一勝三敗의 好成績을 남겼다.
秀甫는 秀和-算知局을 "算知는 序盤에 損을 보았으나 中盤에서 追勢를 取返했다" 고 評했다. 秀策의 御城碁 初出仕 對局에서는 序盤의 弱点으로 인해 金剛力가 完封되었다. 御城碁는 三十三年間에 四十二局을 두어 本因坊烈元의 四十六局에 버금간다. 그리고 林門悅門入과 나란히 史上二位의 最多記錄이다. 天保十三年 御城碁에서 幻庵因碩과의 對局은 算知의 名局이었고, 伊藤松和와의 대국은 “古今唯一의 長局”라고 하는 古來의 著名局 중의 하나이다.
伊藤松和, 坂口仙得, 太田雄藏와 더불어 “天保四傑”로 불리웠는데, 四人중에서는 算知가 가장 어렸다. 그리고, 四人중 松和를 빼고는 三人 모두가 安井門이다.
1852年(嘉永五)에는 京都의 寂光寺에 있던 三世知哲 以前의 先祖를 江戶深川의 淨心寺에 合葬했다. 四世安井(古仙角)의 代부터 淨心寺(日蓮宗身延派)를 菩提所로 해왔다. 1858年(嘉永五) 七月四日, 海老澤健造(巖崎健造)를 따라 關西遊歷에 나섰다.
駿府에서 行해진 柴田權左衛門의 亡父樵山 追善碁會에 出席하던 途中 東海道의 沼津에서 急死했다. 病死라고 하나, 博徒의 元締家에 何日인가 滯在하던 때에 그의 妾와 情夫에 의해 殺害되었다고도 전해진다. 算知는 雄藏 以上의 美男이었다. 寺나 墓의 在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