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井仙知(大仙知), 1764年(明和元)-1837年(天保八)
武藏國에서 태어났다고 되어있으나 坂口仙德의 長子여서 實際로는 江戶에서 태어났다.
仙知가 9살 때에 父仙德은 安井의 外家로서 御城碁에 初出仕했다. 仙知는 五世仙角이 仙哲의 後繼者로 여길 정도로 어려서부터 碁才를 發揮하고 있었다.
1780年(安永九)七月四日, 六世仙哲의 死去로 十七세, 二段으로 安井家를 後式相續하고, 七世仙知로 되다. 이전에 仙哲과의 養子關係가 되어 있었는듯 보인다.
同年十一月에는 御城碁에 初出仕하여, 八世林門入(祐元)에 二占으로 불계승하고, 林祐元의 후계자 門悅에게도 白番으로 불계승을 거뒀다. 仙知 初出仕시 實父 坂口仙德도 本因坊烈元과 對局하여, 實의 親子와 나란히 御城碁을 두었다고 하는 僥倖도 있었다. 父仙德은 死後에 上手七段으로 追贈되었다고 전해지고 四家元의 信任도 두터웠다. 仙知의 바둑은 段位가 높아갈수록 힘으로 相手를 굴보시키는 當時로서는 豪快無比한 異色的 기풍이었다.
御城碁도 三一年間에 二十九局을 두어 十八勝九敗二無라고 하는 壓倒的인 成績을 거뒀다. 本因坊烈元(十六勝三敗一無), 服部因徹(五勝二敗), 水谷琢元(四勝一敗一無), 河野元虎(九勝二敗) 등 當時의 一流들을 하나하나씩 粉碎하고 있다.
1802年(享和二)二月, 三十九세 때 十四세 年長의 本因坊烈元과 함께 半名人(八段)으로 昇進했다. 華麗한 碁風 자체도 人氣가 있었으나 그는 人德도 있어 知得, 算知, 算英까지 줄곳 安井家의 隆盛의 基礎를 이루었다.
1800年(寬政十二), 當時 二十五세의 知得을 후계자로 하고, 1815年(文化十二)三月晦日, 五十一세에 隱居하여 知得에게 家督을 인계했다. 隱退 數年後 大仙知는 仙角로 改名하고 知得은 正式으로 八世安井仙知를 襲名했다. 知得의 라이벌 元丈이 이미 六年前에 十一世本因坊로 되어 있었음에도 仙角이 五十세에 이르도록 知得에게 家督의 양도를 미루었던 것은 實父 坂口仙德이 일으킨 坂口家의 再興을 꾀하고 있었던 것도 있었으나 그보다는 知得에 이어 虎次郞을 九世安井家의 當主로 만들려든 夢이 있었던듯...
1811年(文化八) 還歷을 맞이하면서 御城碁에는 出仕하지 않고 있었다.
1835年(天保六)七月, 名人碁所 本因坊丈和와 赤星因徹의 [吐血의 局]으로 有名한 松平家의 碁會에서는 主催者 岡田賴母의 相手가 되었다. 天保의 內訌에 仙知自身 아무것도 관계하지 않았던 것처럼 元丈도 그의 態度을 踏襲하여 沈默으로 일관했다.
隱退後 二十年間 實子 坂口虎次郞을 養育하여 坂口家의 再興에 余生을 바쳤다.
1838年(天保九), 虎次郞이 三十一세에 新規에 발탁되었을 때, 이름을 仙得이라 바꿨다. 仙知는 上手로 御城碁에 出仕할 수 있기 前年十月二十八日 七十四세로 世을 마쳤다. 大仙知의 바둑은 知得을 含含한 安井家 뿐만 아니라 元丈, 秀和 등 他家에도 많은 影響을 끼쳤다. 그의 영향은 時間을 超越하여 멀리 木谷實-吳淸源의 新布石 革命에까지 이르고 있다.
打倒 仙知에 坊家의 期待를 一身에 짊어졌던 河野元虎 조차도 仙知의 卓越한 碁才와 力量을 認定하였고, 本因坊秀和는 [이처럼 華麗한 바둑을 두는 이는 오로지 七世仙角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絶讚했다. 瀨越憲作은 [仙角은 寬政, 享和의 覇者로서 絢爛華麗의 棋風에다 近代型戰術의 發案이다][稀世의 雄才][新布石의 元祖]라고 評하고 있다.
著書로는 [烏鷺爭飛集][總追落]이 있다. 仙知을 僊知라고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