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보 元丈, 1775年(安永四)-1832年(天保三)
德川家 무사, 淸水家의 보병대장인 宮重八郞 左衛門의 사남으로 토쿄에서 태어나다. 맏형 作十郞은 大御番-小笠原近江守의 組與力을 지냈다. 烈元의 후계자가 되기까지는 樂山으로 이름했다. 元丈은 야스이 知得仙知, 이노우에 幻庵因碩, 혼인보 秀和와 함께 바둑四哲로 불리운다. 대조적인 기풍으로 한살 차이의 知得仙知와는 甲越 (武田信玄과 上杉謙信)에 비유된다. 바둑을 떠나면 수어지교(水魚之交)의 막역한 사이.
두 사람 다 명인의 기량을 가졌으면서도 서로의 기량을 인정하여 명인기소의 출원을 하지 않았다. 元丈-知得의 대국은 무려 77局에 이른다. 전적은 元丈이 흑으로 27승6패2무, 백으로 6승32패2무. 혼인보 丈和는 이중 7국을 名局이라 절찬했다.
선대 察元에 의해 烈元보다 11살 아래의 河野元虎가 후계자로 지목되었으나, 1796年(寬政七) 元虎가 35세에 죽으므로, 1798年(寬政九) 24四세 元丈이 烈元의 후계자로 되고 이름도 元丈으로 개명했다.
당시는 七世安井仙知(大仙知)와 服部因淑이 활약하던 시기였다.
[당대 화려한 바둑을 두는 이는 七世仙知의 우편에서 나올 것이다]라고 秀和는 후게자 知得이 아닌 元丈을 大仙知 기풍의 후보로 지목했다. 元丈은 어성기 첫 출사에서 大仙知를 상대로 흑으로 5집승을 했다.
1808年(文化五) 10月27日, 烈元은 담석증으로 은퇴원을 냈으나 은퇴원이 허가되기도 전인 12月6日에 죽는다. 다음해 3月27日, 烈元의 은퇴와 元丈의 가독상속이 허가되어, 元丈은 十一世 혼인보가 된다.
1814年(文化十一) 丈和는 실력자 服部因淑을 흑으로 4승1무의 성적으로 압도했다. 察元, 烈元의 낭비로 坊家의 경제도 바닥이 났으므로 元丈은 항상 절약하면서 후배 지도에 주력했다. [넓은 아량으로 언행이 좋음은 元丈을 따를 자가 없고, 元丈의 바둑은 한마디로 군계일학이다]는 평을 받았다.
1819年(文政二)의 어성기에는 服部因淑과 井上家 후계자 安節(幻庵因碩), 林家 당주 元美, 元丈의 후계자 丈和의 4인이 출사했다. 차세대의 기수를 시험하는듯 元丈-安節, 知得-丈和로 조가 편성되었다. 모두가 혼을 불어넣은 기보를 남겼다.
知得-丈和의 대국은 후세 명국으로 유명하고, 元丈의 2점국도 [일생의 역작]으로 자찬할 정도의 명국이었다.
元丈은 丈和라고 하는 큰 그릇에 매료되어, 文政二年 45세에 33세(문서상 25세)의 丈和를 후계자로 삼았다. 8년 후 文政十年 윤6月 53세에 가독을 양위하고 은퇴하나 丈和의 기소취임에 대해서는 일체 입을 열지않았다. 술을 낙으로 여생을 보내다. 元丈이 죽은 2년 후 아들 丈策이 丈和의 후계자로 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