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보 秀伯, 1716年(寶永七)-1741年(元文六)
陸奧國 信夫郡 大飯田村의 농가 출신, 부친은 佐藤勝右衛門. 知伯 문하에 들어가다.
1733年(享保十八) 8月20日, 六世 혼인보 知伯의 급서로 가원간에 협의하여 佐藤秀伯을 후계자로 할 것을 결정했으나 이때 秀伯은 고향 奧州로 가는 여로에 있었다. 3일 후 23日에 연락책을 놓아 秀伯이 토쿄에 돌아온 것은 9月8日. 그해 11月6日에 가독의 상속이 허가되어 七世 혼인보가 되다. 11月17日, 18세 五段인 秀伯이 어성기에 첫 출사하여, 安井五世 仙角(春哲)에게 2점국으로 5집승을 하다.
1737年(元文二)五月, 秀伯 21세 때, 장기七世 명인 伊藤宗看(伊藤家三世)이 바둑과 장기간의 석차 변경을 구하는 [바둑장기인 서열 소송사건]을 일으켜 바둑계를 발칵 뒤집어 놓는다. 소송사건이 정리된 이듬해 元文三年, 林五世門入(因長)이 명인기소를 출원했다.
이에 因碩(春硯)은 동의했으나 秀伯과 仙角이 반대하여 출원은 무산되었다.
그 다음해 元文四年에는 秀伯이 上手(七段) 승진을 출원했다.
이번에는 仙角은 찬동을 했으나 門入과 因碩이 거부하므로써
秀伯은 仙角을 첨원인으로 門入과 1년 20번기의 쟁기를 출원한다.
門入은 쟁기의 결과를 겁내, 전전년 장기측의 소송사건이 바둑계의 자각을 촉구한 교훈을 등진 채, 병을 이유로 春硯因碩에게 대신 나가줄 것을 요구한다.
이로써, 春硯因碩은 생애 두번의 쟁기를 치루게 된다.
쟁기의 진행은 春硯因碩 七段, 秀伯 六段의 치수로 秀伯의 先相先.
1739年(元文四) 11月 어성기 제1국을 시작으로 다음해 6月까지 8국을 끝내다.
秀伯이 병으로 쓰러진다. 여기서 쟁기가 중지되다. 전적은 秀伯의 4승3패1무.
1741年(元文六) 2月, 小崎伯元을 상속인으로 결정한 후 그달 11日에 세상을 등지다. 향년 26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