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보算砂, 1559年(永祿二)-1623年(元和九)
永祿二年五月, 쿄토(京都) 長者町에서 與輔의 삼남으로 태어나다.
본성은 加納, 어릴적 이름은 與三郞. 법명은 本行院 日海, 토쿄에 나오면서 혼인보算砂로 이름하다. 바둑을 종래 중국류의 호선 치석제(置石制)를 폐하고 일본류의 자유 기법(棋法)으로 개혁했을 뿐만 아니라 信長, 秀吉, 家康의 삼대에 걸쳐 장기-바둑기사를 총괄하는 등 정치적으로도 수완을 발휘한 바둑중흥의 시조(始祖). 加納가는 무악(舞樂) 일류의 종가로 부친 與輔는 당시 제일인자. 八세 때, 妙滿寺에 있던 숙부인 日淵(혼인보日雄,1529-1609)의 문하에 들어가다.
익년 삭발하여 本行院 日海로 칭하다. 堺의 仙也를 스승으로 실력을 연마하여 바둑으로 명성이 높았다. 1578年(天正六)二十세 때, 織田信長에 소출되어 [진정한 명인]으로 표창되고 上洛 대신에 출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信長은 종교탄압에다 安土宗論에서는 日淵을 타척(打擲)하여, 신도 300인을 인질로 하여 항복문서를 쓰게하는 등 승려의 적이었으므로 信長과의 관계에는 의문이 생긴다.
1582年(天正十) 6月1日, 本能寺의 변 전야에 信長의 어전에서 利玄과 대국할 때 三劫(3패)가 나온 희한한 일이 있었고,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수근거리면서 本能寺를 나가던 일, 明智勢의 초소에서 검문하던 일 등으로 本能寺의 변을 알았다고 한다. 이렇게하여 삼패 불길의 전설이 생겼으나 대국기보는 미상이다. 秀吉이 소출했을 때 信長의 상중(喪中)을 이유로 피하고 있던 算砂가 1584年(天正十二)에 秀吉의 초대에 응한다. 익년 安土宗論에서 항복문서를 쓴 日淵의 명예회복이 秀吉에 의해 이루어진다.
1588年(天正十六) 豊臣秀吉의 어전에서 鹿鹽, 利玄坊, 樹齊, 山內是安, 庄林등과 대국하여 성적 우수로 주인(朱印)을 받았다. 朱印에는 전기 5명은 日海에 定先의 치수로 하나 仙也는 사부이므로 호선으로 하도록 했다. 秀吉은 [바둑의 법도]를 日海에게 위임시키고 포상으로 매년 쌀二十石, 二十人扶持를 주도록 했다. 이것이 후에 기소(碁所)의 효시가 된다. 1598年(慶長三) 스승이자 숙부인 日淵이 妙滿寺의 二十六世 관주를 사직하고 空中山 寂光寺 久遠院을 열다. 그후 日海는 寂光寺를 양위한다. 이때에 寂光寺 탑두(塔頭)의 하나인 혼인보를 얻다.
1603年(慶長八) 德川家康의 토쿄막부 개설시, 寂光寺 三世를 日淵의 제자 日榮에 보내 家康의 초대에 응하고 혼인보 이름으로 토쿄에 이주한다. 이 때부터 혼인보算砂로 불리우다. 家康으로부터는 다른 扶持와는 별도로 三百石을 받는 파격의 대우를 받았다.
1615年(元和元) 伊達가와 前田가에서 동시에 초대를 받았다. 算砂는 쿄토(京都)로부터 멀다는 이유를 대고는 법제(法弟)인 本照坊 日至를 데리고 金澤에 2년간 체제한다. 前田가는 先先代의 利家가 秀吉의 五大老의 1인이고, 先代의 利長은 關原의 전쟁에서 德川측에서 싸웠던 外樣大名이었다. 그 때문에 家康으로부터는 경계의 눈으로 보인 적도 있었다. 家康은 算砂를 위해 2년만에 本行寺를 건립하여 기증했다. 算砂를 후대한 것은 家康에 대한 충성심을 보상하는 것이다. 그런 만큼 算砂와 家康과의 관계는 깊었든 모양이다. 기증 후, 本照坊 日至를 二世주직에 임명하고 쿄토로 되돌아온 算砂는 쿄토를 중심으로 비상근의 가중(伽衆)으로 활동한다.
元和(1615-1624)년간에 일본에 온 韓人 李勺史는 算砂와 3점으로 대국하여 패하고 귀국후 [乾揷窟]이라고 쓴 편액과 바둑판, 바둑돌을 증정했다고 한다. 이 무렵, 일본의 바둑 수준은 비약적으로 향상하고 있었다. 남아있는 算砂의 기보는 利玄과의 20국뿐이나, 실제로는 374국이라고 전해진다, 2인의 대국은 朝廷, 諸大名, 大店 등 많은 사람들이 바라고 있었다.
算砂는 信長, 秀吉, 家康 등에게 후대를 받았다. 이 때문에 家康의 숨은 측근이라는 설도 있다. 차 마시는 장소가 밀담의 장소인 것처럼 바둑-장기, 화가, 다방, 악사 등 장유자(長袖者)로 불리는 가중(伽衆)은 公家, 大名, 寺僧 등에 접근할 기회가 많았다. 정보수집이나 밀서의 전달 등 정치적으로 이용되기도 했고 실제로 정치적 힘을 가진 자도 있었다.
算砂에게는 자유도시의 특권을 자랑하는 계(堺)나 불토(佛土)의 현실을 이상으로 하는 法華宗(日蓮宗) 등의 특별한 배경도 있었다. 정치권력과의 관계는 확실치 않으나 1592年(文祿元)에 權大僧都의 지위에 오르고 1612年(慶長十七)에는 법인(法印)에 임명되었다. 1623年(元和九) 4月, 제자 中村道石(硯)을 명인(九段)으로 승진시키고 가독(家督)을 양도하다.
당시 13세의 杉村算悅의 후견을 부탁하고, 同年 5月16日 토쿄 金杉의 假屋敷에서 죽다.
算砂의 직계 제자로는 算硯, 中村道硯(井上家원조), 六藏(安井算哲, 安井家一世), 杉村算悅(二世혼인보) 등이 있다. 算硯은 道碩와 나이가 비슷한 형제 제자로 算砂의 후계자로 지목된다.
[바둑이라면 패로 살겠지만 죽음 앞에는 수가 없구나]라는 말을 남겼다. 묘소는 쿄토 寂光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