林因長(五世門入,上手門入), 1690年(元祿三)-1745年(延享二)
土佐에서 태어나다, 本名은 井家道藏, 松平土佐守의 家臣. 本因坊道知門下. 本因坊道知가 名人碁所를 命받기 前年 1720年(享保五)十一月十八日, 三十一세로 林家의 養子가 되고, 이름을 因長이라 바꾸고, 翌年 1721年부터 御城碁에 나가다. 1742年(寬保二)까지 총 十六局을 두었다.
1726年十二月二十九日, 林門入(四世)의 隱居로 家督을 相續하고 五世門人이 되다.
1736年에는 岡田門利를 후계자로 세운다.
1737年(元文二)五月, 將棋七世名人 伊藤宗看(伊藤家三世)이 碁方과 將棋方의 席次變更을 求하는 [碁將棋名順訴訟事件]을 일으켰다. 당시 四十八세, 八段(名人上手間之手合), 最年長, 最高棋格을 前面에 세워 奔走했다.
訴訟事件 翌年, 宗看은 名人碁所의 地位를 바라보게 되었다. 當時 他 三家의 當主는 春硯因碩이 三十二세, 五世安井仙角 二十八세, 本因坊秀伯은 二十三세였다. 因碩은 贊同했으나, 秀伯과 仙角의 反對로 碁所運動은 挫折되었지만, 이 문제로 林家-井上家와 安井家-本因坊家간에 不和가 생긴다.
翌年 本因坊秀伯이 七段昇進을 他家에 相談하자 啞然하면서 門入과 因碩이 拒絶한다. 秀伯은 仙角을 添願人으로 세워 門入과 一年 二十番의 爭碁를 出願한다. 五十세의 門入은 病을 理由로 因碩을 代打로 내보내어 因碩-秀伯의 爭碁가 開始되었다. 第八局을 끝낸 상태에서 秀伯이 病床에 누웠으므로 爭碁는 中斷되었다.
그리고 秀伯이 죽는다.
1741年(元文六)에 秀伯이 病死하자, 門入은 다시 名人碁所運動을 再開한다. 仙角과 秀伯의 後繼로 된 伯元의 反發이 강하여 1743年(寬保四) 秀伯은 因碩과 連名으로 碁所就位의 願書를 寺社奉行에 提出하게 된다. 仙角과 伯元도 異議를 제기한 상태였기 때문에 大岡越前守 忠相의 裁定으로 爭碁로 決定하게 되었다.
五十四세의 門入은 十八세 秀伯의 先을 이길 自信이 없었다. 健康上의 不安이 떠올랐으나 그렇다고 碁所를 斷念할 수는 없었다. 同年에 隱居願을 내고 후계자 門利에 家督을 넘겨주다. 二年後 五十六세로 死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