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Christianity)의 역사
그리스도교는 예수를 구세주(救世主)로 믿는 종교, 그리스도 교도는 크리스찬이라고 한다.
중세 서양의 역사는 그리스도교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리스도교의 발전사를 소개한다.
출처→ http://kr.dic.yahoo.com/search/enc/result.html?pk=11437000

종말관과 메시아
서력기원은 예수의 탄생으로부터 시작된다.
예수의 탄생에 대해서는 정확한 시기는 모르고 BC7~AD1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미 BC 8세기 말에 북반부가 아시리아에게 멸망하고, BC 6세기 초에는 남(南)유다 역시 바발로니아에
멸망했으며 모든 유대인들은 노예의 몸이 된다. 페르시아로 부터 해방한 후에도 유대는 독립국이 되지 못하고
그리스의 지배하에 있다가 BC63년에는 다시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가고 거기서 예수시대를 맞이한다.
유대인은 하나님으로 부터 선택된 민족이라는 선민의식에 기초한 민족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계속되는 노예생활로 인해 악한 이 세계가 끝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한다는 종말관이 신앙의 중심이 되었다.
종말에는 최후의 심판이 있고, 죽은 사람도 부활하여, 의로운 유대교도가 이 나라의 백성이 된다.
이 하나님 나라의 왕이 메시아이다.
그리스도교의 성립
예수의 가르침을 복음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온다는 복된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예수의 교훈의 중심은 사랑이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2가지로 예수의 신관(神觀)과 인간관이 요약된다.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던 유대교는 최후의 심판에서 의롭다는 심판을 받는 것이 최대의 과제였다.
유대교는 율법을 엄격히 지키는 자가 의로운 자로 이를 율법으로 규정했다.
나병환자, 심신장애자, 난치병환자는 마귀의 지배하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예수는 죄를 회개하고, 스스로를 낮추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가르쳤다.
이것은 유대교 지도자에게는 율법에 반(反)하는 것으로 비쳤다.
율법학자, 바리새파, 사두개파는 예수를 정치적인 반(反)로마의 메시아 운동가로 로마에 고발하고,
민중을 선동해 십자가 위에서 죽게 했다. 예수의 제자들은 메시아라 여겼던 스승의 죽음에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곧 예수 부활의 신앙이 일어났고, 예수가 참된 메시아라는 신앙이 전개되었다.
메시아를 그리스어로 번역하면 기름을 붓다(크리오, Xrio), 기름이 부어진 자(크리스토스, Xristos)이다.
예수를 구세주(그리스도)로 믿는 종교를 그리스도교, 그리스도 교도를 크리스찬이라고 한다.
그리스도교와 바울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중심으로 한 12사도들은 부활신앙의 뒷받침으로 교세를 넓혀 나갔다.
그리스도교는 북쪽은 사마리아에서 시리아, 남쪽은 아프리카, 서쪽은 소아시아에까지 퍼졌다.
12사도 중 요한은 에페소스에 정착해서 만년까지 초대교회의 지도자가 되었고,
마가는 알렉산드리아에 교회를 세워 아프리카 전도의 길을 열었다. 다른 사도들은 순교했다.
그리스도교를 유대교의 테두리에서 해방시키고 세계의 종교로 비약시킨 것은 바울이다.
바울은 엄격한 유대교의 교육을 받은 바리새 파로 율법을 소홀히 하는 그리스도교를 적대시하고 박해했다.
그러나 율법은 의를 가르치고 죄를 가르쳤으나 죄로부터 사람을 해방시키는 정죄(淨罪)의 힘이 없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신앙은 정죄로 고뇌하는 바울을 구원하게 된다. 바울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다.
개종한 바울은 예수의 신격화와 그리스도교 신학의 기초마련에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된다.
카톨릭교회의 성립
2세기에 이르러 교회는 조직을 정비하고 경전으로 신약성서(New Testament)를 편찬하였다.
또한 유대교에서 이어받은 성서는 구약성서(Old Testament)로 하여 모두 성전(聖典)으로 채용했다.
AD140년경 로마교회는 세례신조를 바탕으로 오늘날 사도신경의 원전이 되는 로마신조(Romanum)를 제정한다.
이 신조에서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신(聖神)의 삼위가 하나의 신격을 이룬다는 삼위일체설이 형성되었다.
AD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예수는 아버지인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질의 신격을 갖는다고 의결했다.
교회와 로마제국
로마제국 내에는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공존하였고 모두가 안식일을 지키고 있었다.
유대인 반란으로 인해 안식일 금지령 칙령이 생겼는데 이는 기독교인들도 해당되는 칙령이었다.
로마제국은 안식일을 지키는 기독교인들은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무지막지한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다.
네로(AD64), 레키우스(AD250), 발레리아누스(AD258), 디오클레티아누스(284~305) 황제의 박해가 잇따른다.
그리스도교의 세력이 커지자 제국측에서는 적과의 동침을 선언하고 상호협조의 악수를 청하게 된다.
협조의 대가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313년에는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고 그리스도교를 승인한다.
322년에는 공인종교로 국가에서 보호까지 해주게 된다.
당시 태양신을 국교로 믿었던 로마시민들의 반발을 피하기 위해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교회도 태양신의 날인 일요일에 예배를 보도록 했다.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는 태양의 날인 일요일을 부활절로 성수하도록 결의하였고
365년 라오디게아 종교회의에서는 그리스도 교회의 예배일을 안식일에서 일요일로 바꾸게 된다.
바나바의 서신과 저스틴 마터의 변증서는 그리스도인들은 150년경부터 일요일에 예배를 보았다고 한다.
392년, 테오도시우스 1세는 한발 더 나아가 그리스도교를 로마의 국교로 정했다.
이로써 그리스도교는 서유럽 사회의 정신적 지도권을 확보한다.
중세의 그리스도교
카톨릭교회는 전 교회를 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의 5교구로 나누었다.
로마(서)와 콘스탄티노플(동) 두 교구가 큰 세력을 유지했고 나머지 교구는 이슬람제국(帝國)의 지배로 없어졌다.
동·서 교회는 회원국가의 서로 다른 정치관계로 말미암아 사회적 역할도 달랐으며 관리체제도 달라지고 있었다.
동방교회는 황제를 수장으로 하는 황제교황주의의 그리스정교회로 발전하여 동방문화권을 만들었다.
서쪽의 로마교회는 교황과 왕권과는 서로 독립하는 독립교황주의의 입장을 확립했다.
451년의 칼케돈공의회에서 심화된 대립이 11세기에 와서는 로마교회와 그리스정교회로 갈라졌다.
로마교회는 프랑스의 메로빙거 왕조와 제휴하여 중세 서유럽에 세력을 폈고 결국은 서유럽을 지배하게 된다.
카롤루스 대제는 영토확장과 그리스도교의 보급공로로 교황 레오 3세로부터 서(西)로마 황제로 임명되었다(AD800).
그는 교황의 지지 아래 옛 서(西)로마령과 게르만지역을 포함한 서유럽문화권의 통일을 완성했다.
독일의 오토 1세는 로마의 내란을 진압한 공로로 962년 교황으로부터 신성로마의 황제로 임명되었다.
그 동안 로마교회는 9세기부터 11세기에 걸쳐 서유럽 전토에 세속적인 세력을 신장하고 있었다.
각 지방의 주교나 수도원장은 영주나 신도로부터 토지를 기증받아 강대한 봉건영주가 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1073∼85)는 성직자 임명권에 반대하는 황제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여 굴복시켰다.
교황 인노젠시오 3세(1198∼1216)부터 교황은 전 서유럽 군주 위에 군림하게 되었고 각국의 교회를 통치했다.
1170년 교황 알렉산더 3세는 재산을 교회에 헌납하도록 유언은 사제 앞에서만 할 수 있도록 법령을 만들었다.
1184년 교황 루시우스3세는 종교재판소를 인정하였고, 1190년 교황 클레멘트3세는 면죄부판매를 개시했다.
1229년 교황 그레고리 9세는 평신도에게 성경소유 및 읽기의 금지와 성경의 자국어번역을 금지했다.
그토록 권세를 부리던 로마카톨릭교회도 중세 말에 이르러 쇠퇴기를 맞았다.
교회와 교황의 권력쇠퇴 요인의 하나는 십자군의 실패였다.
십자군은 성지회복이라는 이름 아래 1096년에 교황 우르바노 2세의 제창으로 조직되었으며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박해하는 셀주크터키의 징벌을 위해 1270년까지 약 200년간 7회에 걸쳐 원정한다.
한때 원정의 성공으로 교황과 교회의 권위는 크게 올라갔으나 결국은 실패로 끝나 교황권 실추의 원인이 되었다.
그 후에도 교회분열(1378∼l418)은 계속되고 교황이 병립하여 싸우는 등 교황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14세기말 영국의 J. 위클리프, 15세기초 보헤미아의 J. 후스 등의 종교개혁 시도가 시작되고,
농민봉기와 롤라즈의 난(亂), 후스파(派)의 전쟁 등이 잇따라 일어나 카톨릭교회를 위협하게 되었다.
종교개혁(宗敎改革)
개신교 프로테스탄트의 발단은 카톨릭의 수도사 출신 M. 루터가, 성 베드로 대성당의 수선비 마련을 위해
교황 레오 10세(1512∼152l)가 발행한 면죄부에 반대하여 1517년에 95개조(個條)의 논제를 발표하고
공개적으로 항의한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의 기본은 3가지이다.
첫째, 하나님의 진리의 유일한 근거는 성서이고, 모든 신도는 직접 성서를 대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그리스도교도는 성사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만 의롭게 될 수 있다.
셋째, 모든 신도는 스스로가 사제라고 주장하여 만인사제설을 제창했다.
1529년, 루터는 코뮤니케 프로테스타티오를 발표하여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사회적 지위를 확립했다.
J. 칼뱅은 1520년대 프랑스의 종교적 혼미 가운데서 인문주의 사상의 교육을 받고,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했다.
스위스의 개혁자들은 칼뱅을 제네바로 초청하고 이 도시를 전형적인 그리스드교적 시민사회로 만들었다.
시민사회의 특색은 카톨릭의 교회주의에 대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구원을 얻는 복음주의의 실현이다.
칼뱅파교회는 유럽 각지에 퍼져서 루터파교회와 함께 교회개혁 프로테스탄트의 두 축을 이루었다.
루터와 칼뱅의 개혁은 교회제도, 의례(儀禮), 사회적 관계에서 카톨릭교회를 일변시켰다.
그렇다고 종교개혁운동이 르네상스와 동일선상에 있는 인간회복운동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중심주의이며, 신조나 신학(神學) 자체를 바꾸어 놓은 것도 아니었다.
헨리 8세(1509∼47)는 루터를 공격하여 로마교회로부터 신앙의 옹호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왕후와의 이혼문제를 계기로 로마교회를 탈퇴. 1534년 국왕이 영국국교회의 수장이 된다는
수장령(Act of Supremacy)을 발표하고 교회의 모든 재산을 국가에 귀속시켰다.
근대의 그리스도교
프로테스탄트 신학사상의 큰 전환은 종교개혁시대가 아니라 자유주의와 과학의 진보에 의한 것이다.
아르미니우스주의는 16세기에 네덜란드의 개혁파교회에서 일어난 자유주의운동이다.
아르미니우스는 칼뱅의 인간의 타죄(墮罪)와 구원에 반대하여 인간의 자유의지와 신의 보편적 구원을 주장했다.
그리스도교 특색의 하나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계시된다고 하는 계시종교적 성격이다.
18세기 영국에서 나온 이신론(理神論)은 우주의 창조자로서 하나님은 인정하나 계시자체는 부정한다.
이신론은 프랑스로 건너가 더욱 급진화하여 그리스도교를 정면으로 비난하는 볼테르 등의 사상을 낳았다.
독일 H.S. 라이마루스의 합리주의는 성서의 불합리한 부분을 비판함으로써 그리스도교를 공격했다.
레싱은 예수의 종교의 본질은 성서에도 교리에도 없고 사랑의 가르침에 있다고 했다.
이때까지 성서는 어떠한 입장에서도 신성시되었고 하나님의 진리의 오류없는 계시로 여겨왔다.
그러나 성서 또한 인간의 손으로 된 역사상의 문서라는 인식에서 성서에도 역사적 분석이 시도되었다.
왈 고등비판의 출현이다. 이에 반해 성서문구의 문헌적 연구는 하등비판이라 한다.
타종교와의 비교연구도 도입하여 종교사학파가 생겼다.
1833년~1840년에 영국에서는 옥스퍼드운동이라는 고교회파(高敎會派)의 복고운동이 있었다.
이 운동은 종교의 자유주의에 반대하고 교회의 의례와 사제제도의 역사적 권위를 주장했다.


그리스도교 연대표
BC7~AD1 예수 그리스도 탄생
AD30경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서 죽음
32/33 바울, 개종(改宗)해서 이방인에게 전도
64 로마황제 네로, 그리스도교도를 박해함. 이 무렵 베드로와 바울이 순교함
140경 로마신경 제정됨
250 데키우스황제, 황제숭배를 강요해서 그리스도교도를 전국적으로 박해함
303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 그리스도교회를 멸절시키고자 대박해(~313)
313 콘스탄티누스대제, <밀라노칙령>으로 그리스도교를 승인함
325 니케아공의회, 아리우스설(說)을 이단으로 단정
392 테오도시우스 1세,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정함
430 아우구스티누스 죽음
440 교황 레오 1 세 등위(~461). 교황권, 서로마제국을 지배함
451 칼케돈공의회, 동서교회의 대립이 깊어짐
496 프랑크왕 클로비스, 그리스도교로 개종
529 베네딕투스, 수도회칙을 정함
590 교황 그레고리오 1세 등위(~604), 교황령 형성에 노력함.
726 성화상(聖畵像;아이콘) 논쟁 시작됨.
756 프랑크왕 피핀, 교황에게 토지를 기증(교황령의 기원)
800 프랑크왕 카롤루스 대제, 서로마황제가 됨
863 교황 니콜라오 1세, 동방교회의 대주교 포티오스를 파문함
910 클뤼나수도원 창설
962 오토 1세, 교황 요한 12세에 의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됨
988 러시아의 블라디미르대공(大公) 동방교회로 귀의
1054 교황 레오 9세와 동방교회의 대주교 케룰라리우스의 상호파문으로 동서교회가 전면적으로 분열
1076 교황 그레고리오 7세, 성직자의 임명권을 둘러싸고 황제 하인리히 4세를 파문
1077 교황 그레고리오 7세, 황제 하인리히 4세의 파문을 해제(카노사의 굴욕)
1096 제 1 회 십자군(~1099)
1099 십자군, 성지 예루살렘을 점령
1122 교황 칼리스토 2세, 황제 하인리히 5세와 <보름스협약>을 체결함
1170 교황 알렉산더 3세, 재산을 교회에 헌납하도록 유언은 사제 앞에서만 할 수 있도록 법령 제정
1184 교황 루시우스3세, 종교재판소를 인정
1190 교황 클레멘트3세, 면죄부 판매
1198 교황 인노첸시오 3세 등위(~1216). 교황정치 정점에 이름
1202 제 4 회 십자군, 콘스탄티노플 점령
1226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죽음
1229 교황 그레고리 9세, 평신도에게 성경소유 및 읽기의 금지와 성경의 자국어번역을 금지
1274 토마스 아퀴나스 죽음
1296 교황 보나파시오 8세, 세속권을 둘러싸고 프랑스왕 필리프 4세와 다툼
1309 교황청,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옮김(아비뇽의 유수, ~1377)
1378 두 교황, 로마와 아비뇽에 거주. 대분리가 시작됨
1415 후스, 이단으로서 화형에 처해짐
1417 교황 마르티노 5세 등위(~1431). 대분리 끝남(대립교황의 종말)
1453 콘스탄티노플 함락
1517 루터, 면죄부의 발행에 반대해서 95개조의 논제를 발표. 종교개혁이 시작됨
1521 교황 레오 10세, 루터를 파문함 1523 츠빙글리, 취리히 시의회에 67개조의 논제를 제출함
1529 루터파의 제후, 프로테스타티오를 발표. 프로테스탄트교회(개신교회)의 사회적 지위가 확립됨
1534 이그나티우스 로욜라, 예수회를 창립해서 프로테스탄트교회에 대항.
1534 영국왕 헨리 8 세 수장령을 발표. 영국국교회(잉글랜드교회) 시작됨
1536 칼뱅, 그리스도교 요강을 발표. 제네바의 교회개혁에 착수
1545 트리엔트공의회(~1563), 카톨릭 신학을 재확인함
1555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회의(루터파를 승인)
1572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위그노), 대량 살해됨(생 바로톨로매 축일의 학살)
1589 러시아 정교회 독립
1598 앙리 4 세, 낭트 칙령을 발표해서 프랑스 종교전쟁을 종결지음
1609 침례교회가 생김
1620 필그림파더스, 메이플라워호로 미국 플리머스로 이주
1640 영국에서 청교도혁명이 일어남(~1660)
1648 베스트팔렌조약 체결됨. 30년전쟁 끝남
1678 교황 인노첸시오 11세, 프랑스왕 루이 14세와 주교의 국왕관리권 문제로 다툼
1685 낭트 칙령 폐지
1739 감리교회가 생김
1801 교황 비오 7 세, 나폴레옹과 정교조약(政敎條約)을 체결
1924 러시아 정교회를 로마 카톨릭 교회로 바꾸는 교황 비오 9세의 계획을 레닌에게 전달
1929 라테란 협정에 따라 바티칸시국 탄생
1946 교황 비오11세, 마리아에게 왕관을 씌우고 그녀를 세상의 여왕으로 공포함
1960 교황 비오11세, 바티칸-모스크바 협약체결, 로마카톨릭 교회와 공산주의가 제휴함
1965 교황 바오로 6세와 동방정교회의 총주교 아테나고라스, 서로 파문상태를 해제
1965 교황 바오로 6세, 마리아는 교회의 어머니라고 선언
1984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 베드로의 바실리카에서 마리아에게 이 세상을 봉헌함
1987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마리아 숭배를 위한 해로 지정
1987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다윈의 진화론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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