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작곡가 이야기 - About Opera Composers

지아코모 푸치니 (Giacomo Puccini, 1858.12.23~1924.11.29)
베르디 이후 이태리 오페라 최대의 작곡가인 그는 음악가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작곡,연주 교육분야에서 활약했으나, 푸치니가 5세때 세상을 떠나 어머니의 노력으로 음악적 재능을 키워 16세때 오르간 경연대회에서 1위를 하였다. 그 뒤로부터는 교회에서 오르간을 쳤으며 작곡도 조금씩 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베르디의 "아이다"를 보고 크게 감동을 받아 그와 같은 작곡가가 될 결심을 하고, 어머니와 큰아버지의 도움으로 이태리의 여왕 마르게리타의 연금으로 밀라노의 음악학교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에 퐁키엘리(라죠콘다 작곡)를 사사하고, 마스카니(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작곡)와 함께 하숙을 하며 공부했다. 이 때의 가난했던 하숙생활이 훗날 "라보엠"의 작곡 동기가 된다.
그리하여 졸업작품으로 "교향적 기상곡"을 내어 호평을 받아, 차차 오페라에도 손을 대어 처녀작 "빌리"를 작곡하여 현상공모에는 떨어졌으나 1884년 밀라노에서 상연하여 호평을 받았다. 제2의 작품인 "에드가"는 성공하지 못했으나, 제3작인 "마농 레스코"는 크게 성공하여 그의 지위를 확보하였다. 그리하여 "라보엠", "토스카", "나비부인"등을 발표하여 베르디, 바그너와 함께 세계의 오페라 극장에서 가장 인기있는 오페라 작곡가가 되었다.
그의 작품의 특색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풍부한 인간미를 소재로 다루고 있으며 (베리즈모 즉 현실주의 오페라의 대표주자), 음악적으로는 이태리 오페라의 전통과 양식에 바탕을 둔 아름답고 친숙하기 쉬운 멜로디를 구사한다. 그의 작품은 감정이 풍부한 노래, 진실한 인물 묘사로 가장 인간적인 감동을 끌어내고 있다.

주세페 베르디 (Giuseppe Fortunino Francesco Verdi, 1813.10.10~1901.1.27)
베르디는 바그너와 더불어 19세기 후반에 있어서 오페라계의 큰 별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같은 해에 출생하였으며 바그너는 독일 낭만파 가극을 최고수준으로 이끈 반면 베르디는 그의 작품 26편을 통해 근대 이탈리아 오페라 최고의 작곡가로서의 전통을 확립하였다. 1851년 베르디(38세)는 그의 걸작 "리골레토"가 베니스에서 초연되면서부터 작곡가로서의 새로운 기원을 보였다.
그 후 "일 트로바토레", "라 트라비아타", "가면무도회", "운명의 힘", "돈 카를로스", "아이다", "오델로", 팔스타프" 등이 계속 전 유럽에서 초연되면서 실로 오페라에 있어 그의 황금시대가 전개되었다. 그는 그의 오페라 "리골레토" 이후 종래의 이탈리아 오페라의 전통을 넘어 선율미에 극적인 요소를 배합시키면서 기술적인 면에서도 "바그너"의 악풍을 적절히 배합시켜 각별한 진전을 나타내 보였다. 또한 그는 "롯시니"이후 이탈리아 오페라의 전통을 확립시키고 나아가서 이를 "풋치니"에게 계승시킨 위대한 오페라 작곡가였다.
한편 그는 옛 오페라에서 보는 것처럼 단지 아름다운 선율만을 강조해 극적인 내용과 진행이 가볍게 다뤄지는 일이 없도록 풍부한 창작력을 구사하였다. 그리고 노래와 오키스트라가 적절히 극적인 요소와 배합되게 함으로써 변화무쌍하며 여러가지 생동감 넘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1886년에 보인 그의 오페라 "오델로"에서 그는 서정성과 박력을 융화시켜 오케스트라는 선율중심주의를 견지하면서도 음의 중후함과 색채, 유동성, 그리고 내면적인 묘사 등 여러가지로 보아 이탈리아 오페라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정상으로 끌어 올렸다. "바그너"의 작품이 기악적이며 주로 대위법적으로 작곡된데 반하여 그의 작품은 주로 성악적이고 선율적이며 화성적으로 작곡하므로써 이탈리아 오페라의 전통을 확립시켰다.
그의 모든 작품에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성악적인 선율미가 풍부하게 넘치는데 그러면서도 극적인 감정이 강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무대효과도 충분히 발휘되어 있다. 이러한 것들은 그 의 후기작품에서 보다 더 뚜렷이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조르쥬 비제(Georges Bizet, 1838.10.25~1875.6.3)
비제는 성악 교사인 부친과 피아니스트인 모친 사이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부유한 음악적 환경에서 자라면서 일찍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였다. 4세 때부터 아버지에게 피아노 악보, 문자 읽는 법을 익혀 뛰어난 기억력과 음악적 재능으로 9세 때에는 파리 국립음악원에 입학해서 피아노와 오르간 부문에서 우등상을 받기도 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화성법과 푸가, 작곡을 배워 1857년에 '로마대상'을 수상하였고, 그의 피아노 솜씨는 당대의 거장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의 칭찬을 받을 정도로 뛰어났으며 로마에서 귀국한 1860년 이후에는 극음악 작곡에 몰두하였다. 25세 때 발표한 오페라 '진주잡이(Les Pecheurs de Perles)'는 약간의 관심을 끌었을 뿐이었고, 34세에 쓴 극음악 '아를르의 여인(L'Arlesienne)'으로 처음 빛을 보게 되었다. 이 작품은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 1840-1897)의 희곡을 가지고 만든 것으로, 나중에 8곡만 추려 연주회용의 제1, 2모음곡으로 만들어졌다.
비제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오페라 '카르멘(Carmen)'은 1875년 3월 3일, 파리의 오페라 코믹 극장에서 초연 되었는데 도둑떼, 집시, 비천한 연초공장 여직공들이 등장하고, 칼부림하며 시체가 뒹구는 등 그 내용이 당시 귀족들의 취향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여 실패하게 된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카르멘의 참신한 소재와 혁신적 기법이 기존의 신화나 전설, 귀족들의 낭만적 이야기로만 이루어져 있던 오페라계에 일대 새바람을 불러 일으켰음은 물론 일반 대중들에게는 큰 호응을 얻게 되었다.
비제는 카르멘이 초연되고 3개월이 되는 6월 3일에 결핵성 호흡기 질환의 악화로 죽게 되는데 어떤 이는 비제의 죽음이 심혈을 다해서 작곡한 카르멘의 실패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고 있으며, 그의 재능이나 투지를 높게 평가해 모짜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만큼이나 아깝게 요절한 작곡가로 평가하기도 한다.

바그너 (Richard Wilhelm Wagner 1813.5.22~1883.2.13)
바그너(Richard Wagner)는 1813년 5월 22일에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경찰서기였던 아버지를 두고 9번째 아들로 태었났다.
바그너는 소년시절에 드레스덴 극장에서 연주되었던 베버의 "마탄의 사수"를 보고 감명을 받으며 자신도 지휘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바그너는 13살 나이로 호프만(E.T.A. Hoffmann)과 섹스피어(W. Shakespeare)의 작품에 관심을 가지며 로이발트(Leubald)라는 드라마를 만들었다. 그는 대학입학시험도 보지않은채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음악을 공부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는다.
1833년부터 바그너는 여러 도시를 방랑하며, "요정들" (Die Feen, 1834), "사랑의 금지" (Liebesverbot, 1836), "리엔치" (Lienzi, 1840)를 작곡한다. 1841년에는 자신의 시와 음악으로 낭만적 오페라인 "방황하는 화란인"(Der fliegende Hollander)을 만든다. 1843년 1월 2일, "방황하는 화란인"이 드레스덴에서 초연되자 공연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바그너는 드레스덴의 궁정 카펠마이스터로 임명된다. 이어서 "탄호이저"(Tannhauser 1842-1845)와 "로엔그린"(Lohengrin 1845-1848)을 만들므로써 그는 음악인생의 절정기를 맞이 한다. "탄호이저"는 1861년에 파리에서 절찬리에 공연되었다. "니베룽겐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의 오페라 "라인의 황금"(Das Rheingold)은 1869년에, "발퀴레"(Die Walkure)는 1870년에 뮌헨에서 공연되었고, "니베룽겐의 반지"의 다른 오페라 "지크프리드"(Siegfried)와 "신들의 황혼"(Die Gotterdammerung)"은 바이로이트에서 1976년에 공연되었다.
1882년 11월 바그너는 가족들과 함께 베네치아로 여행하다 그곳에서 1883년 2월 13일 생을 마감한다.

조아키노 로시니 (Gioacchino Antonio Rossini, 1792.2.29~1868.11.13)
로시니는 1792년 이탈리아 가이드리아 해 부근의 작은 마을 페드로에서 혼(Horn) 주자인 아버지와 가수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802년 아카데미아 필하모니에 입회하는 파격적인 영예를 얻고 1806년에는 리체오 무지칼레 입학하게 된다. 그는 1810년 1막 희극인 결혼어음(La cambiale di Matrimonio)을 시작으로 오페라 작곡을 시작하였는데 19세기 전반기 이탈리아의 가장 중요한 오페라 작곡가였다. 주제페 베르디가 나타나므로써 그는 이탈리아 오페라계의 중심적 지위를 잃는다.
그의 작품 세빌리아의 이발사(Il barbiere di Siviglia)나 라체네렌톨라(La Cenerentola)는 희가극의 대 걸작품이나 역사적으로 볼 때는 오페라 세리아(opera seria)의 작곡가로써 더 중요하다. 그가 창조하고 완성한 새로운 방식은 50년 이상이나 이탈리아 오페라 세계에 영향을 끼쳤다. 그는 노래 스타일을 변화시켰고 연극적 소재를 바꾸었다. 그는 또 오페라의 형식과 리듬에 생기를 불어넣었으며 음악이 드라마를 이끄는 방법으로 새바람을 일으켰다.

피에트로 마스카니 (Pietro Mascagni, 1863.12.7 ~ 1945.8.2)
이탈리아의 작곡가. 토스카나주(州) 리보르노 출생이다.
리보르노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1881년 오페라 '제사장(製絲場)에서'로 인정을 받았다.
그 후 밀라노음악원에 입학했으나 1년 만에 그만 두고, 순회 오페라단의 작곡가 겸 지휘자로 일하다가 뒤에 음악교사가 되어 체리뇰라에 정착하였다. 1989년 음악출판사의 현상모집에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가 1등으로 당선, 이듬해 초연에서 대성공을 거둠으로써 유명해졌다. 이 작품은 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피에로)'와 함께 베리스모(진실주의) 오페라의 대표작의 하나이다.
그 후에도 마스카니는 일본을 무대로 한 '이리스'(1898) 등 10여 편의 오페라를 썼다.

루지에로 레온카발로 (Ruggiero Leoncavallo, 1858∼1919)
이탈리아의 사실주의 오페라 작곡가. 나폴리 음악원에서 작곡을 전공하고 볼로냐 대학에서는 문학을 전공하였다.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큰 뜻을 품고 '차터톤', '메디가치' 등을 발표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해 순회악사로 각지를 방문하며, 불우한 생활을 보냈다. 1890년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대성공을 보고 같은 형식의 '팔리아치'를 작곡하여 손쪼뇨 출판사의 1막 오페라 콩쿠르에 응모하였으나 2막으로 구성된 작품이어서 콩쿠르에는 탈락하였다.
그러나, 내용이 우수함을 인정받아 스칼라에서의 초연을 성공리에 마치고 큰 명성을 얻었다. 그 후 푸치니의 명작인 '라보엠' 대본에 손을 댔으나 푸치니의 작품이 먼저 발표되는 바람에 실패하였고, 계속 발표한 연작에도 불구하고 어느 것도 출세작에는 못 미쳤다.
그는 이탈리아 작곡가로는 드물게 바그너에 공감한 작곡가로 10여 편의 오페라 대본을 직접 쓰기도 하였다.
그의 작품은 교묘하고 복잡한 극적 구성을 바탕으로 치밀하게 짜여져 있다.
팔리아치의 소재는 판사였던 그의 아버지가 담당했던 작은 시골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에서 취재했다고 한다.
팔리아치의 격렬하고 정열적인 대사와 멜로디는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를 뛰어넘는 극적인 구성을 보여준다.
제2막에서의 극중극 형식 역시 레온카발로의 천재적인 재능을 입증하는 숨돌릴 여유조차 없는 긴박한 마지막 장면은 드라마틱한 파워가 발휘되는 보기드문 명장면이다. 오페라가 살아 있는 한 팔리아치는 영원한 생명력을 갖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