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아 연서

신정아가 변양균에게 보낸 러브레터

전화하고 싶었어요. 낮부터요.
정오에는 우리 미술관에서 일하게 될 큐레이터랑 면담을 좀 하느라 바빴고 참 제가 얘기했던가요.
파리국립미술학교에서 복원미술을 전공한 젊은 친군데 실력이 만만찮아요. 전공이 아니라 이쪽에서 일 하는 게
글쎄 어떨지 모르겠지만 일단 경험 삼아 큐레이터 일을 좀 해 보겠다 해서 임시로 채용하게 되었거든요.

아무래도 곧 성곡을 떠날 것 같기도 해서 제 뒤를 맡아줄 사람도 필요한 시점이구요.
우리 미술관에서 소장중인 조선중기 작품 몇 점이 상태가 시원찮아 보관중인 게 몇 점 있는데 그 친구에게 한번 맡겨 봐야겠어요.
미술품 복원작업은 한두 사람 손을 거치는 게 아니라 그 친구에게 전적으로 의지할 수는 없지만
장비로 숨어 있는 손상 부위도 찾아내야 하고 복원 부위를 정해 아주 디테일한 작업이 들어가야 하거든요.

작업이 끝나면 대중 앞에 선보이기 전에 당신께 제일 먼저 보여드리고 싶어요.
당시의 풍속도이긴 한데
선비차림의 양반신분으로 보기 드물게 젖가슴을 풀어헤치고 있는 아낙의 젖가슴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그림이에요.
자세히 보면 선비도 바지를 허리춤까지 내려 있는 걸 볼 수 있어요.

풍속화라 하기에도 그렇고 그렇다고 춘화는 절대 아니죠.
예나 지금이나 다들 체면 차리고 살지만 가능하다면 아낙의 젖무덤 아니라 어디라도
여자라면 - 그 여자가 그 사람의 연인이라면 더 깊은 곳에 얼굴을 파묻고 하루를 나고 싶지 않을까요.

당신은 전설 속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여걸 유디트 손에 죽은 홀로페르네스처럼 나에게 성적으로 유혹 당해
죽음에 가까운 정사를 한번 했으면 하셨지만 저는 빈 시내 남쪽에 있는 바로크 궁전 벨베데레에 소장된 클림트 그림 키스처럼
두 남녀가 꼭 껴안고 성적 교감의 여명을 틀며 시작하는 정사를 당신과 꿈꾸고 있어요.

에로티시즘이 순간적인 육체의 환락이 아니라 영원으로 진입하는 일종의 관문처럼 순간적인 정사의 덧없음을 초월해
욕망의 숭고한 충족에 이르도록 노력한 클림트처럼 숭고한 에로티시즘의 미학을 당신과 나누고 싶어요.

곱슬머리의 남자가 꼭 껴안은 여자의 더 없이 행복한 표정,
오르가즘 직전의 환희가 표현된 얼굴의 그 그림을 보면 저도 언젠가 그런 정사를 하리라 했죠.
그 남자가 내게 당신으로 다가왔다는 걸 저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죠.
지난 가을 저의 미술관에 들렀던 당신을 본 순간 저는 부끄럽지만 클림트의 그림을 떠올렸죠.

그림 속의 곱슬머리는 부드럽게 컬이 져서 넘어간 당신의 희끗한 머리로 대체되었고
나는 속옷을 입지 않고 화려한 노란 무늬의 긴 원피스만 겉옷으로 걸치고 있었죠.
당신은 당시 중국현대작가 초대전을 관심 있게 둘러 보셨죠.
내게 다가와 왕청의 작품에 대해 물어왔을 때 저는 알몸을 내 보인 듯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어요.

이런 상상이 아니더라도 당신은 충분한 성적매력을 지닌 남성이었죠.
두 번째 만남에서 당신이 남한강을 따라 드라이브만 하고 저를 저의 집 앞에 내려주셨을 때 얼마나 서운했는지 모르셨을 거예요.
키스라도 없었더라면 저는 체면이고 뭐고 가리지 않고 당신을 나의 아파트로 유인하여 죽음에 가까운 정사를 펼쳤을지도 몰라요.
저는 너무 뜨거워져 있었거든요.

키스? 뭐랄까 당신의 키스에서 저는 오월에 청보리가 익어가는 맛을 느꼈어요. 청보리 말이죠.
풋풋한 풀 내음과 알곡이 영글 때 풋알들이 껍질에 밀착되어 밀도가 촘촘해지는 질감 그 모든 것이 당신의 키스 속에 있었죠.
고백하지만 제가 예일에 다닐 때 조금 사귀었던 의대생인 스티븐과도 나누지 못한 영적인 키스였어요.

당신도 그러셨잖아요. 정아는 자그마한 체구로 그곳 친구들에게 인기가 짱이었을 거라구요.
스티븐은 아버지가 상원이었는데 저를 무척 좋아했죠. 결혼도 생각했었지만 후후.
그랬더라면 당신과 나누고 싶은 숭고한 에로티시즘의 미학을 이룰 수 없겠죠.
당신과 나는 앞으로 긴 길을 걸어갈 거예요.

당신이 그 옷을 입으려 하실 지 모르지만 첫 정사를 저는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있어요.
클림트에 나오는 남자가 입었던 황금색 가운 그리고 저는 비슷한 패턴의 쉬폰 실크 원피스를 준비하고 있어요.
그 키스 씬으로 시작해서 클림트의 유디트1으로 끝나는 섹스 말이죠.
have a nice day! 당신의 신다르크로부터. 저를 신데렐라라고 부르지 마세요 꼭요.

I. 구스타프 클림트 作 키스(Kiss), (1901년)


II. 베로네세 作 유디트(Judith), (1580년)


III. 클림트의 유디트1(Jvdith I), (1901년)


작품해설
I.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 1862-1918)
인간의 사랑과 성(性), 죽음과 같은 소재를 모자이크등과 같은 다양한 장식무늬를 통해서 강조한 화가이다.
20세기 초의 미술은 인간의 질환과 성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었는데 특히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성에 대한 이론이 큰 영향을 끼쳤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클림트는 바로 프로이트가 살던 빈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빈 근교에서 태어나 14살에 빈 국립응용미술학교에 입학, 아카데미적인 회화 교육과 수공예적인 장식 교육을 받았다.
클림트는 화려한 색채와 선으로 관능적인 여성을 그렸다.
그것은 가장 여성적이고, 가장 관능적인 사랑이 세상을 구원하리라는 믿음에 근거한다.
우아한 관능미와 황금빛 장식, 감각적인 구성이 빛난다. 게다가 영원을 향해 정지된 것 같은 키스의 순간을 감미롭게 보여준다.
키스하는 연인을 그린 '키스'는 클림트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사랑 받는 그림이다.
II. 파올로 베로네세(Paolo Veronese : 1528-1588)
16세기 베네치아 3대 화가 중 한 사람으로 독특하고도 화려한 채색법을 남겼다.
티치아노의 영향을 받아 환상적이고 매혹적인 공간구성을 갖는 화려한 양식을 확립하기도 했다.
그림 유디트는 앗시리아의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하여 잠들게 한 뒤 목을 베어 고국을 구한 유디트의 모습이다.
구약 속의 이 이야기는 '용감하고 의로운 여인'의 표상으로 자주 미술 작품의 소재가 됐다.
이 여인은 시공을 초월해 인류가 원했던 여성 이미지 중 하나이기도 했다.
화가는 작품의 주제로 유디트가 하인이 들고 있는 자루에 적장의 목을 넣으려는 순간을 포착했다.
유디트 머리 위의 베일이 바람에 살짝 날리는 모습이 그 순간 동작을 잘 보여 준다.
끔찍한 장면이지만 유디트의 얼굴은 온화하고 평화롭다. 적장이나 하인과 달리 유디트는 환한 빛 가운데 놓여 있다.
명암의 극적인 대조가 돋보인다.
III. 클림트의 유디트1(Jvdith I)
그의 대표작품은 [키스]이지만 클림트의 유디트가 유명한 것은 아마도 유디트의 기묘한 표정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각이 진 현대적 얼굴, 음란한 시선과 유혹하는 듯한 붉은 입술,
부드러운 듯 무심한 표정과는 달리 그녀의 왼손에 들려있는 잘린 목이 주는 섬뜩함...
클림트는 유디트의 이중적인 표정속에서 세기말적인 혼란과 인간의 이중성, 무의식을 표현하려 한 것은 아닐까?
베로네세의 유디트와 대비하면서 감상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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